[Opinion] ‘아스파라거스’ 홍차 한잔 하실래요? -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시각예술]

글 입력 2015.10.30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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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때론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 마르셀 프루스트
 
 
 20세기 최고의 작가 중 한 사람인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 구절입니다. 영화는 이 의미심장한 구절과 함께 시작합니다. 기억은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때론 우리를 따뜻한 행복감에 젖게 만들기도 하고, 때론 밤중에 이불을 뻥뻥 차게 만들기도 하죠. 그리고 때론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아 아예 지워버리기도 합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폴은 이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말입니다. 이 영화는 폴의 그러한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그 어딘가, 지금도 우리의 정신세계 이곳저곳을 누비고 있는 그 ‘기억’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매개체는 다름 아닌 ‘정원’과 ‘아스파라거스’였습니다. 정원과 아스파라거스, 그리고 기억. 이 키워드들 사이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33살의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인 폴은 두 살 때 부모를 여읜 이후로 말을 잃은 청년입니다. 두 이모가 운영하는 교습소에서 피아노를 치는 일이 그의 일과의 전부입니다. 폴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전적으로 두 이모의 몫입니다. 이모들의 그늘 아래에서, 폴은 어른이긴 하지만 행동이 매우 순진하고 수동적인 ‘어른 아이’의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겉보기엔 매우 평범해 보이지만 그의 삶은 어딘가 불안정하고 어둡습니다. 폴을 애지중지하는 두 이모는 그를 사랑하는 것 같긴 하지만, 항상 폴의 과거를 애써 숨기고 있는 듯합니다.
 지루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폴은 어느 날, 장님인 이웃 코엘료를 따라 같은 건물 4층에 사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의 정원에 우연히 들어서고, 마담이 준 홍차와 마들렌을 먹게 됩니다. 그가 준 홍차를 마시는 사이 마담과 코엘료가 나누는 대화입니다.
 

  “버섯 향이 좀 나죠? 걱정 말아요, 진짜 허브차니까. 수프가 아니에요.
  또 다른 향이 나는 것 같은데…….”
  “아스파라거스.”
  “그렇군요.”
 

 폴은 홍차를 마시고 최면에 빠집니다. 마담의 홍차는 잊고 있었던 기억을 되찾게 해주는 신비로운 묘약이었고, 그 재료 중 하나가 ‘아스파라거스’라는 식물이었습니다. 물론 아스파라거스 자체만으로 영화에서처럼 최면이라는 효과까지 기대할 순 없겠지만, 실제로 아스파라거스에는 피로 제거, 체력 증진, 이뇨, 항암, 진정 등의 효능이 있다고 해요. 아마 단지 아스파라거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식물이 지니고 있는 효능일 것입니다. 폴이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정원만이 지니는 평화롭고 안정적인 분위기를 저 또한 느낄 수 있었으니까 말이죠. 평소 식물에는 큰 관심이 없던 저도 집 주변에 이러한 비밀정원 하나쯤 가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짧은 평화로움과 여유마저 즐길 수 없는 각박한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마담의 비밀정원은 갖가지 도심 속 식물들로 가득한 파라다이스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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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면에 빠진 폴이 경험한 것은 아기 때의 기억 한 조각이었습니다. 그 후로 폴은 두 이모 몰래 정원을 찾아옵니다. 홍차를 마시고 최면에 빠질 때마다 트라우마 때문에 잊고 살았던 그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아름답고 다정한 엄마와, 무뚝뚝한 프로레슬러 아빠에 대한 기억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최면에 빠져있던 폴은 화들짝 깨어나 눈물을 흘립니다. 기억 속에서 아빠는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그 옆에선 무서운 개구리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애써 잊으려 했던 기억의 단편이 떠오른 것이죠.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폴을 걱정하던 이모들은 그가 마담의 정원을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정원을 찾아가 망가뜨려버립니다. 설상가상으로 암까지 앓고 있었던 마담 프루스트는 폴에게 편지와 선물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렸어요. 마담이 폴에게 남긴 편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젊은 친구. 네가 텃밭에 안 오니까 텃밭이 네게로 가. 모든 일엔 끝이 있는 법. 일 그만둘 거야. 새 인생을 살기로 했어. 긴 여행을 떠날 거야. 준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네가 추억을 낚고 싶을까 봐 필요한 재료를 마련했어. 나쁜 추억은 행복의 홍수 아래 가라앉게 해. 네게 바라는 건 그게 다야. 수도꼭지를 트는 건 네 몫이란다.
콩쿠르에서 행운이 있길 빌어. 너의 친구 프루스트가.
 

 마담이 남겨준 재료로 홍차를 타 마신 폴은 자신의 ‘나쁜 추억’이었던 아빠의 폭력이 사실은 프로레슬러인 아빠와 엄마의 경기 중 일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마담의 말대로 폴의 ‘나쁜 추억’은 아빠와 엄마의 사이좋은 모습이라는 ‘행복의 홍수’ 아래 서서히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곧 폴은 최면에서 아빠와 엄마가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떠나게 되는 장면을 떠올려버립니다. 당시 위층에 살고 있었던 두 이모의 집 바닥이 무너지면서 아빠와 엄마가 피아노에 깔려 돌아가시게 된 것이죠. 잃어버렸던 모든 기억의 전말을 알아낸 폴은 다시금 충격에 휩싸입니다. 콩쿠르에서 대상을 탔지만, 폴은 곧 자신이 피아노 실력과 콩쿠르 성적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담이 남긴 쪽지,

 ‘Vis ta vie! (네 인생을 살아라!)’

를 떠올리고 결국 피아노를 그만두게 됩니다.
 폴은 암 투병 중이던 마담 프루스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돼요. 피아노를 그만둔 그는 대신 마담 프루스트처럼 피아노 위에 식물들을 심어 가꾸고 있습니다.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폴은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들을 극복해내고 행복한 삶을 삽니다. 그리고 ‘아빠’라는 말을 떼려는 사랑스러운 자신의 아기를 향해 처음으로 말을 합니다. “Papa(파파)!”
 
 
 마담 프루스트가 그에게 남긴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폴의 이모들은 마담이 폴의 아픈 기억들을 들춰내 그를 괴롭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에 비밀정원을 파괴해버립니다. 하지만 ‘네가 텃밭에 안 오니까 텃밭이 네게로 가’라는 마담의 편지처럼, 비밀정원은 폴의 기억의 단편들과 함께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마담은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정원은 이제 없지만, 폴은 그녀를 기억하며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고 행복을 만끽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마담 프루스트가 비밀의 정원을 통해 폴처럼 과거의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어 했던 선물이 아니었을까요?
 마담이 선물한 또 다른 하나는 ‘기억’의 진정한 가치였습니다. 폴은 아빠가 엄마를 힘들게 했다는 기억 때문에 아빠를 증오했고, 아빠에 대한 악몽을 종종 꿔왔죠. 하지만 마담의 홍차를 통해 그 기억은 자신도 모르게 왜곡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지니고 있는 안 좋은 기억들은 사실 아주 짧고, 작고, 왜곡된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안 좋은 과거의 기억들 때문에 남은 삶을 우울하게 살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죠. 영화를 보며 제게 가장 감명 깊게 와 닿았던 마담 프루스트의 말은 두 가지입니다. ‘나쁜 추억은 행복의 홍수 아래 가라앉게 해,’ 그리고 ‘Vis ta vie(네 인생을 살아라)’! 마담이 폴에게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과거의 아픈 추억들에서 벗어나 이젠 행복한 기억들을 쌓아가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자세였을 것입니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을 감상하는 내내 저 역시 마담의 아름다운 비밀정원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요즘 ‘힐링’이라는 말이 난무하다 싶을 정도로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말을 잘 쓰려고 하지는 않지만, 이번엔 정말 제대로 된 ‘힐링’을 한 기분이었어요. 폴의 인생과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을 엿보며 저 스스로의 인생을, 그리고 현대인들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찾아와 아픈 기억들을 치료할 수 있는 마담의 정원과 같은 곳이 현실에도 필요한 것은 아닌지, 저 또한 폴처럼 아픈 기억들을 마음 깊은 곳에서 곪게 만들며 살아가고 있었던 건 아닌지에 대해 되돌아봅니다. 정신적인 평화와 안정을 선물해주는 자연과 너무도 동떨어져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각박한 일상을 잠시나마 내려놓고 여유를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영화입니다. 마담 프루스트의 홍차에 들어있는 ‘아스파라거스’처럼 말입니다.
 
 
 
 


[양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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