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원근법, 장엄함 속에 숨은 폭력 [문화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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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을 가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박물관 또는 미술관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많이들 보게 되는 것은 아마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유럽의 회화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그림들을 보고 있자면 그 엄청난 크기와 회화기법에 압도된다. 심지어 나와 같이 여행을 했던 한 중년 남성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보며 경외심과 숭고함을 느낀다고 했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10~1511년경, 바티칸 서명의 방유럽 예술은 아주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15세기에 발견된 선 원근법은 서양 미술사뿐만 아니라 서양의 세계관, 과학 등에 있어 큰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 ‘원근법‘이라는 것은 우리가 단순히 경외하며 공경해야할 대상일까? 아름다움은 때로 장미와 같이 가시를 감추기도 한다. 서양의 선 원근법을 비판적인 입장에서 고찰해보도록 하자.
미술사에서 최초로 선 원근법의 원리를 발명한 이로 알려진 인물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이다. 당연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수록 작게 보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수학적으로 계산화해 체계화시킨 브루넬레스키는 사물의 수학적 축소과정과 함께 ‘소실점’을 최초로 확인하였다. 브루넬레스키는 평소 존경하던 어린 화가에게 이 기법을 전수하게 되는데 이를 최초로 회화에 적용한 작품이 마사초(Masaccio, 1401~1428)의 ‘삼위일체’이다. 후에 브루넬레스키가 창안한 이 원근법을 이론화한 사람이 다름 아닌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이다.
마사초 [성 삼위일체] 1426년 경, 산타마리아 노벨로 성당, 피렌체선 원근법의 일반적인 전제는 두 가지이다. 첫째, 하나의 소실점은 오직 단 하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3차원 세상은 소실점으로부터 떨어진 거리에 비례하여, 2차원 평면에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즉 3차원인 세상을 평면인 2차원으로 재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전제에 대해 살펴보자. 세상을 고정된 한 눈으로 봐야 한다는 전제는 어딘지 모르게 폭력적으로 들린다. 이 전제에 의하면 세상을 보는 눈은 하나의 이데올로기,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세상을 다르게 보면 안 된다. 이 전제는 모든 사람의 관점을 통일시키고 이 관점을 중심으로 그림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딘가 매우 독재적으로 들리지 않는가? 사람마다 다른 특징을 가지고 다양한 관점을 가진다고 배우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다소 폭력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빌렘 플루서에 따르면 ‘다양한 입장들을 세우는 데 어떤 기준도 없기 때문에 객관적 입장은 황당무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선 원근법은 우리에게 하나의 소실점을 부여하고 모든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보도록 하게 만든다.
두 번째, 3차원인 세상을 2차원으로 환원시키는 전제 또한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서 인간 눈의 망막은 구면이다. 때문에 매우 사실적으로 공간을 묘사한 듯이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인간은 같은 사물이라도 심리적으로 중요한 것은 더 크게 묘사하지만 르네상스의 선 원근법에서 이러한 개인의 심리적 요인인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렇듯 선 원근법이 설립해 놓은 인위적인 전제조건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하지만 과연 역사적으로, 미술사적으로 원근법의 한계를 발견하고 극복했다고 해서 우리들의 인식 또한 선 원근법에서 자유로울까?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그의 저서 ‘에디톨로지’에서 ‘객관성과 합리성은 원근법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세계의 구성 원리의 전제가 된다‘고 한다. 즉 선 원근법이 객관성이라는 사고의 확립에 큰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객관적 관점이란 각기 다른 인식의 주체들이 ’약속‘을 해야 가능한 것이다. 엄밀히 말해, 객관성이란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의 결과이며 반드시 특정 구성원들 간의 약속이 필요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민주주의적 소통이 중요한 요소로 대두되는 현재 사회에서 가끔 선 원근법의 오류를 그대로 계승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객관적 관점이라 믿고 이를 남에게 강요하거나 상호 합의 없이 독단적으로 객관적 관점을 수립하는 사람들이다. 선 원근법을 사용하는 화가처럼 자신이 세운 소실점에 모든 시선을 맞춰야 한다고 강요하는 행위는 대단히 권력적이고 독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이러한 태도로 소통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역사적, 미학적 접근을 통해 이러한 전제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고 ‘소통의 부재‘를 초래하는 사태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 1892-1968)에 따르면 서구의 원근법은 그저 하나의 ‘상징 형식‘이며 3차원 공간을 2차원 공간에 투사하는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하다. 제 아무리 장엄하고 아름다운 기법이라 하더라도 절대적인 방식이 아닌 단 한 가지 표현방식일 뿐이다. 원근법의 종류 또한 다양하고 큐비즘과 같이 현실 세계를 평면 캔버스에 옮기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사람들 또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양하며 이를 표현하는 방식 또한 다르다.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고 강요하는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보다는 다양한 관점을 인정하고 상호주관성(inter subjectivity)을 바탕으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이 오히려 더 현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피카소 [도라마르의 초상화] 1937년참고자료:
-김정운, 『에디톨로지』, 21세기북스(2015), pg.136~212
-진중권,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고전예술편』, Humanist(2014), pg115~136
-양정무, “원근법의 탄생”,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50&contents_id=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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