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디로도 향하지 않았는데 자꾸 어딘가에 당도하는, 시 [문학]

글 입력 2016.12.04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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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연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인 황인찬 시인. (사진 출처=한국일보)


  황인찬의 시집 「희지의 세계」를 읽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심보선의 시집을 사러 들른 서점에는 때마침 책이 다 팔린 상태였고, 나는 어쩔 수 없이 황인찬의 시집을 사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라는 이 표현은 시집을 고르던 그 짧은 찰나에만 쓸 수 있는 말이다. 책을 펼쳐들고 첫 시를 읽으며 이 시집을 내가 여러 번 읽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희지의 세계」는 내가 이제껏 읽은 시집들 중 귀퉁이를 가장 많이 접은 시집이다. 시집을 많이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시들을 읽으며 ‘너무 좋다’라는 감정이 들게 하는 시집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시집을 두 번 읽으며 느낀 점은, 황인찬의 시에 일정한 이미지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시적 배경과 어조는 다양하지만 시를 읽으며 머릿속에 떠올리게 되는 장면은 비슷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 덕분에 시집을 읽는 내내 좋아하는 영화를 한 편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손을 맞잡고 겨울을 거니는 연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는 김행숙의 〈다정함의 세계〉이다.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시이다. 내가 이 시를 사랑하게 된 것은 순전히 첫 문장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다정함을 언어로 표현하는 방식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이 시를 통해 ‘다, 정, 하, 다’라는 글자를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다정의 온도가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다정함의 세계〉에 대한 나의 애정을 가져가려고 하는 시가 황인찬의 〈종로사가〉와 〈너의 아침〉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말로 표현하기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다. ‘사랑한다’라는 단어로 담아냈을 때, 흘러넘칠 수밖에 없는 미묘한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인찬은 이러한 사랑을 ‘추운 겨울의 서울 밤거리를 걸으며 우리 자주 걸을까요, 라고 다정하게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손이 있으니 손을 잡고 어깨가 있으니 그것을 끌어안으며, 입에서 나오는 흰 김마저도 아름답다고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걸으며 밤거리가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던 밤, 그 순간을 섬세하게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는 분명 많은 사람들이 느껴본 적 있는 감정일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순간으로 끝나버릴 수 있는 그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시를 쓴 시인이 있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사랑이라는 감정을 잊은 사람이 있다면 〈종로사가〉를 보여주며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너의 아침〉은 더욱 낭만적이다. 홀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아침을 맞던 ‘너’가 사랑을 하며 새로운 아침을 경험한다는 내용이다. 특히나 아름답다고 느꼈던 부분이 있다.

너의 아침은 이제 창을 통해 내려오는 빛의 무늬가 잠든 이의 얼굴에 어른거리는 것을 
내려다보는 것 …(중략)… 그것은 이제 너의 아침으로부터 두 사람의 아침으로 천천히
이동하는 것

  더위를 많이 타는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햇빛에 비치는 잎사귀의 그림자가 가장 예쁜 계절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빛이 가장 ‘빛다워지는’ 순간이 여름이라고 생각한다. 그 아름다운 빛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내려오며 이파리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면 사랑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곁에 누운 이의 얼굴에 햇빛이 내리는 ‘가장 큰 기쁨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시는 말한다. 두 사람이 함께 맞는 아침이라는 찰나를 포착하여 섬세하게 적어낸 이 시를 읽으며 어쩐지 침대 시트 위로 따듯한 해가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또한 시인이 어떤 사랑을 겪었기에 이토록 낭만적인 시를 쓸 수 있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서정〉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오늘은 그 애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나온 것인데,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그 애는 말했는데, 그 애는 아무런 말도 해 주질 않고 그 애는 어째서 나를 이 깊은
산속으로 데려왔을까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알 수 없는 모든 것이
나쁘지 않다

  시인은 우리에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사랑한다 말하지 않는(〈너는 이제 시인처럼 보인다〉 中)’ 시를 읽으며 ‘나쁘지 않은’ 것 그 이상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황인찬의 시에는 ‘겨울’이라는 배경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두 사람이 거니는 〈종로오가〉는 겨울이며, 〈기록〉에서는 뽀얗게 김이 서린 겨울 창에 천사가 있다고 말한다. 〈영원한 친구〉에는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저녁이 오고 밤이 오고 겨울이 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시인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희지의 세계」에서 자주 닿게 되는 종착점은 겨울이다. 그리고 겨울에 대한 이미지는 내게 손을 맞잡고 추운 거리를 거니는 여인을 떠올리게 한다. 길을 걸으며 말없이 서로를 위로하는 연인, 황인찬의 시는 내게 그 연인들을 생각하게끔 했다. 그래서 시를 읽으며 더욱 열렬하게 사랑하고 싶어졌고 〈종로오가〉를 남자친구에게 보여주었다. 낭만적인 시라고, 남자친구는 대답했다. 





모두가 떠나고 텅 빈 학교


  시에는 연인에 대한 이미지 다음으로 ‘학교’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통상적인 학교의 분위기는 아니다. 시끌벅적하고 생기가 넘치기보다는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침묵에 잠긴 듯하다. 시 속의 학교는 ‘꺼지기 직전의 연약한 빛들이 코트 위에 고인 채 명멸하는(〈저녁의 게임〉中’) 공간이며, ‘어두운 운동장’과 ‘기울어진 시소와 빈 그네(〈은유〉中’)만이 존재한다. 어쩐지 텅 빈 공간을 떠올리게 하는 묘사들이다.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서〉를 읽으면서도 쓸쓸한 학교의 모습을 그려보게 되었다. 수업시간, 좋아하는 아이가 나에게 고백을 하고는 곧 사라져버린다. 이는 어른들의 시선에서는 세계의 끝도 아니며, 누군가의 죽음도 아닌 사소한 일이다. 하지만 시는 그 순간의 쓸쓸한 감정을 사소하지 않게 담아냈다. 따라서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감정을 시를 읽으며 ‘쓸쓸하다’고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시에 이렇게 ‘학교’라는 공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공간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서〉의 두 아이는 만날 수 없게 되었으며 이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학창시절과 공통점을 지닌다. 이렇게 되돌릴 수 없는 순간들을 기억하기 위해, 〈은유〉에서는 저녁과 겨울이 초등학교 구령대 아래에서 서로를 만진다. 이러한 행위가 과연 순간들을 붙잡아 둘 수 있을지는 쉽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시로 남기는 동안, 돌아갈 수 없는 공간으로 잠시나마 다녀올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 끝나면 우리는 법 앞에 서 있다〉에서는 사랑의 마지막을 ‘오후가 끝나고 수업이 끝나고 교문 밖으로 나오던 중학생들이 끝났다’라고 표현했다. 돌아갈 수 없는 쓸쓸하고 텅 빈 공간에 대한 이미지, 마치 사랑이 끝난 것만 같은 이미지가 황인찬의 시를 읽는 내내 맴돌았다.





시는 그냥 ‘읽는 것’


  시집을 다 읽고 나서는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해져서 인터뷰를 찾아봤다. 황인찬은 쉽게 읽히는 시를 쓰면서 동시에 그것에 내포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번 읽어야 하는 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시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읽는 사람의 자유에 맡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생각은 시의 내용에서도 드러났다.

  ‘잘할 수도 있지만 잘못하기로 했어요’라는 구절은 시집의 첫 시인 〈멍하면 멍〉에 등장한다. 시에서는 누가 죽고 누가 울기 때문에 모두 다 잘못했다며 반성하지만, 앞으로도 잘못하기로 했다고 시인은 말한다. 나는 이 구절이 ‘나의 시를 쓰겠다’는 다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했다. 게다가 시집의 맨 앞에 실린 시인만큼, 자신만의 ‘잘못하는’ 시를 쓸 테니 읽는 이들 또한 자유롭게 ‘잘못 읽으라’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시의 해석에 골몰하느라 어려웠던 순간들이 어쩐지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왜 나만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지, 내가 읽는 게 맞는 것인지 고민하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 때에는 그래서 시를 읽는 것이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시를 사랑이라고 정의한다면 사랑이고, 증오라고 정의한다면 증오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시는 그냥 ‘읽는 것’이며 내가 느끼는 것이기 시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어디로도 향하지 않았는데 자꾸 어딘가에 당도하는 것이 너무 무섭고 이상하다

  〈이것이 시라고 생각된다면〉의 한 구절이다. 시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아도 자꾸 어딘가에 도착하게 된다. 그 사실을 이제까지는 무섭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면, 「희지의 세계」를 통해 그 공포를 조금이나마 떨쳐낼 수 있게 되었다. 시를 대하는 ‘나의 세계’가 희미하게나마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영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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