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사진과 그림의 차이를 묻는다면 사진은 갇힌 것이고 그림은 담긴 것이라 하겠다.
사진은 찰나의 순간, 혹은 그 겹겹의 순간이 모여 하나의 초를 담았다면-물론 그렇지 않은 사진기법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림은 그 안에 영상, 시간, 그러니까 그들의 단락과 맥락이 담겨 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사진의 안에 들어가면 시간은 멈춰 있거나 변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림의 안에서는 영원히 그날, 화가가 되씹는 그날이 계속될 것 같다. 시간을 잡아 놓는 것이 아닌 시간을 잘라내어 보관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 그림이 완전히 실물과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것은 낭만주의에 있어 두드러진다.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아닌 상황과 느낌, 감정을 전달하는 것에 있어 다름을 두려워하지 않는 화가들이 있다.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몇 시간이고 떨어지는 촛농을 견디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 서서, 다 죽은 사람들이 그린 다 죽은 모델의 옷자락을 보며, 말 그대로 ‘백 년도 전의’ 그림을 보며 상상하는 것이다.
스웨덴의 숲을, 노르웨이의 바람을, 분홍색 황혼과 얼음장 같은 파도와 손등을 덮는 두꺼운 옷을, 그럼에도 이젤을 세우고 물감을 짜는 화가의 마음을, 그 개척자이자 예술가의 시선을 영원히 질투하면서.......
전시명 ‘새벽부터 황혼까지’는 “동이 튼 예술적 혁신이 예술적 성숙의 황혼기와 민족 낭만주의로 무르익을 때까지”라는 상징을 내포한다.
당대 스웨덴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예술가들이 직면했던 현실과 타국에서 연마한 새로운 표현법이 귀향 후 모국의 정체성과 조화를 이루어 마침내 북유럽 특유의 예술 확립으로 귀결된 여정을 보여주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잘 지은 전시명이라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훌륭한 전시였다.
특히 눈여겨본 점은 거의 모든 액자마다 작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액자에 음각으로 파인 그들의 이름을 보고 있으면 한참 전의 사람들이 사랑했던 순간을 훔쳐보는 듯한 부끄러움이 든다.
그러나 관음증적 상태를 유지할 새도 없이 어떤 작품들은 관객에게 어쩌면 생애 한번도 보지 못할 감정을 선사한다. 이를 엿보면서 새겨진 이름을 음미하다 보면 이 액자는 영원히 이 그림만을 걸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림의 쓸모가 다할 때 액자 또한 버려질 것이고, 그 밑에 새겨진 어떤 이름 또한 녹아 없어지리라는 생각을 하면 어쩐지 울적해진다.
내가 낭만주의 작가들의 그림을 사랑하는 이유는(사실 이것도 이번 전시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들의 색이 산란하기 때문이다.
산란하는 빛이 여러 색으로 퍼져 환상에 바람 냄새를 더해 주기 때문이다. 타오르는 모닥불, 떠드는 입들, 고요한 들판의 소리를 들려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운 이를 떠올리게 한다. 만난 적 없지만 삶 내내 그리워하는 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