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텍스트의 힘을 보여주는 영국 항공의 캠페인 [문화 전반]

텍스트는 자유롭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글 입력 2023.12.1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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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이 우세한 시대라지만 나는 여전히 텍스트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오직 텍스트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는다. 텍스트를 읽는 행위는 독자가 스스로 행하는 능동적인 행위이다.

 

독자가 글에 직접 개입하고 스스로 해석하면서 비주얼과 다른 어떠한 ‘깊이’가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텍스트를 읽으면서 독자는 글만이 주는 특유의 감각이나 글이 담아내는 사유를 느낄 수 있고, 또 글은 독자에게 말을 걸 수 있고 마음 깊숙이 울림을 전달할 수도 있다.


이러한 능력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 광고홍보학을 전공하고 텍스트를 좋아하는 탓에 나는 브랜드가 텍스트를 활용하는 방식에 관해 관심이 많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카피라이팅’이다. 광고는 궁극적으로 기업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다. 광고에서의 크리에이티브는 업과 브랜드의 가치를 발견하고 만들어주며,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장치로서 작용한다.


밀도 높고 잘 보살펴진 카피 한 줄은 커뮤니케이션 수단 너머로 나아간다. 활자는 자유롭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끝을 모르기에 영영 늙지 않는다. 인류와 오래도록 함께했지만 늘 같은 모양으로 우리 곁에 생동하고 있다. 시대에 발맞추어 새롭게 조합되거나 명언처럼 남아 길게 회자되며 불멸하지만 권태롭지도 않다. 텍스트는 인간의 마음을 꾸준히 울린다. 그 형용할 수 없는 크기와 잠재력을 나는 지치지도 않고 궁금해한다.


텍스트는 정녕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브랜드라는 영역에서는 어떤 모양으로 생동할까? 하나의 사례를 함께 살펴보자. 최근 인상 깊게 보았던 영국 항공의 캠페인을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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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항공은 2022년, ‘A British Original’이라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캠페인의 메인 메시지는 ‘Every Reason You Fly’, 즉 ‘여행을 떠나는 저마다의 이유’이다.


비주얼은 위와 같이 아주 단순하다. 카피 단 세 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형식은 입국신고서에서 따왔다. 방문 목적을 체크하는 란에 하나의 선택지를 더 추가한, 어찌 보면 단순한 크리에이티브 아이디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사업이나 휴가 같은 기본적이고 딱딱한 이유가 아닌, ‘인생은 짧으니까’ 같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섬세한 이유를 제시한다.


영상광고 버전으로도 제작되었다. 그중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이 해변을 거니는 장면을 짤막하게 보여준다. 이후 인쇄광고와 동일한 형식의 카피가 등장한다. ‘To be fun dad again’, 즉 다시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그러고는 캠페인 메시지와 캠페인 명이 심플하게 등장한 후 영상은 끝이 난다.


사랑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관해서도 방문 목적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청혼 반지가 주머니 속에 꽤 오래 있었다며, 프러포즈 여행을 떠나기도, 또 누군가는 권태가 찾아온 결혼생활에 숨을 불어넣으러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이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이별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는 아직 그녀를 사랑하기에 그녀가 있는 곳으로 떠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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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카피가 다양하다는 건 상황에 맞추어 집행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날씨, 장소, 시간대, 혹은 그날의 뉴스에 맞춰 그때그때 알맞은 카피로 적용할 수 있다.

 

늘 흐린 영국 날씨 환경에 맞추어 ‘여기 날씨가 구려서’, 그래서 여행을 떠난다는 카피를 비가 오는 옥외 환경에 집행하기도 했다. 또한 지하철에 옥외광고를 설치하여 ‘따뜻한 바람 맞으러, 지하철 들어올 때 부는 그런 바람 말고.’ 라는 카피를 띄워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좀 더 생생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단순한 비주얼이기에 오히려 무궁무진한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다. 수영하면서 마르가르타 한 잔 마시려고. 라는 카피를 위트 있게 수영 튜브에 적어 넣어 굿즈 형식으로도 제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캠페인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오래 지속된 팬데믹으로 인해 항공 산업 자체가 침체되고 항공사 브랜드 이미지도 소비자들에게 멀어졌을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항공사 시장 특성상 많은 소비자들이 주로 가격을 보고 브랜드를 결정하기에 제공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만으로는 차별화가 어렵다는 문제점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팬데믹이 끝나고 성장하게 될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선 새로운 포지셔닝의 필요성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영국 항공은 영국이라는 국가와 영국 항공이라는 브랜드의 유구한 역사와 특별한 상징성에서 'Original', 즉 '독창성'이라는 키워드를 도출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A British Original’이라는 새로운 포지셔닝을 만들어냈다. 또한 개개인마다 여행을 떠나는 구체적인 이유는 모두 다를 것이다. 모두가 개인적이고 독창적인 이유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Every Reason You Fly’라는 메시지를 뽑아내게 된다.


캠페인을 구현할 아이디어로 영국 항공은 카피를 선택했다. 무려 500가지의 맞춤형 카피를 제작했고, 영상광고도 32편을 제작했다. 이건 여행의 목적을 세심히 들여다보고 방대하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각자의 독창성을 존중하는 태도로 느껴진다. 그들의 새로운 포지셔닝을 소비자 눈높이에서 알리는 동시에 개인화되고 세심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고객 한 명 한 명과의 눈맞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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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례에서 나는 텍스트의 힘을 엿볼 수 있었다. ‘여행’ 하면 쉽게 떠오르는 표면적인 이유는 뻔하다. 우리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들추어내고 그 밑을 파고들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공감하지만 의식해 본 적 없던 생각을 발견해야 한다. 묵묵히 존재하던 가치를 발견하고 이용해야 한다. 크리에이티브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보단,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고 관계성을 새롭게 부여하는 일이다.


그리고 텍스트는 서정적이면서 강력한 표현 수단이 될 수 있다. 형체 없이 떠돌던 추상적인 가치에 텍스트라는 옷을 입히는 일은 가장 직접적이면서도 풍성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격을 비교하고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게 똑똑한 소비자라지만 좋은 카피는 계산식 너머의 세계로 한숨에 데려가고 머리보단 마음을 따르게 한다.

 

텍스트에는 측정 불가능한 저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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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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