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하늘에 있는 음악가들에게 바치는 연주 - 한수진과 브리티시 오리지널

글 입력 2024.02.12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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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라는 나라를 떠올렸을 때 클래식이 생각나는 일은 없었다. 나의 부족한 식견으로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음악가들이 내가 아는 클래식의 전부였다. 그러다 <이토록 클래식이 끌리는 순간>이라는 책에서  영국 클래식에 관한 이야기를 접하고 그제야 영국과 클래식을 느슨하게나마 연결 지을 수 있었다.

 

평소 클래식 공연을 향유할 땐 특정 음악가를 향한 기대로 향유하는 경우가 많다. 쇼팽, 드보르작, 슈만, 슈베르트, 바흐 등 친숙한 음악가들의 명곡을 화면 너머가 아닌 실제로 들을 수 있다는 게 클래식 공연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이번에는 그 기대가 달랐다. 영국의 분위기를 좋아하고 클래식도 좋아하는데 그 둘을 어떻게 이을 수 있을지 그 연결고리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기대 이상으로 그날의 공연은 내게 기존에 접해본 적 없었던 영국 고유의 클래식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주었다. 좁고 좁았던 나의 클래식 세계가 조금이나마 확장된 순간이었다.

 


포스터.jpg

 

 

공연을 기다리면서 팜플렛을 꼼꼼히 읽으며 세트리스트 순서와 연주할 곡에 관한 설명을 숙지했다. 역시 음악을 글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은 법. 글만 봐서는 어떤 음악이 펼쳐질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기다리던 공연이 시작되고, 황홀한 연주가 공연장을 가득 채우자 내가 읽었던 글이 음악을 정확하게 묘사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공연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하이든 – 교향곡 92번 “oxford 옥스퍼드”

 

에드워드 엘가 – 수수께끼 변주곡

 

본 윌리엄스 – 푸른 옷소매 주제에 의한 환상곡 / 종달새의 비상

 

막스 리히터 – 비발디 사계 리컴포즈드

 

에릭 코츠 – 런던 모음곡

   

 

팜플렛을 보고 곧바로 눈에 띈 건 ‘에드워드 엘가’라는 이름이었다. 내게 처음으로 영국 클래식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책 <이토록 클래식이 끌리는 순간>에서 언급한 영국 음악가가 바로 에드워드 엘가였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자클린 뒤 프레라는 첼리스트가 에드워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환상적으로 연주하면서 유명한 클래식 음악가가 없다는 영국의 국가적 열등감을 씻어주었다는 부분이 특히 흥미로웠다. 호기심에 뒤 프레가 연주한 엘가의 첼로협주곡을 한 번 듣고 난 뒤로 오랫동안 엘가의 이름은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 이번 공연을 통해 몇 개월 만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팜플렛에는 그의 수수께끼 변주곡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각 변주곡은 엘가의 지인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인물들을 음악적으로 묘사하고 있었으며 제8번주 ‘W.N.’은 소나기를 피해 들어간 저택의 여주인 위니프레드 노버리를 그렸다. (중략) 제9변주 ‘Nimrod 님로드’는 엘가와 가장 각별했던 친구로 알려진 아우구스투스 예거를 담았는데 느린 템포의 장중한 음악으로 숙연함을 자아내며 이 작품의 가장 감동적인 대목으로 인정받고 있다.


 

설명을 읽고 나서 연주를 들으니 엘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이미지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종종 너무 아름다워서 슬픔을 자아내는 예술 작품을 만날 때가 있는데, 내겐 그날 들은 에드워드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이 그랬다. 너무 아름다워서 다신 반복할 수 없을 것 같은 황홀한 순간, 분명 경험한 적이 없는데도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평화로움. 수수께끼 변주곡을 듣는 동안 황홀함과 슬픔이 동시에 차올라는 것을 느꼈다.

 

본 윌리엄스의 곡도 무척 인상 깊었다. 영국 국민주의 작곡가로서 민요의 선율을 사용했다는 설명이 있었는데, 평소 영국 민요를 들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잘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다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아, 이게 영국 민요구나!’라고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까지 영국과 관련된 모든 지역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음악을 통해 전해졌다.

 

팜플렛으로 막스 리히터가 재해석한 비발디 사계를 들을 수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기대를 품었었다. 팜플렛에는 ‘막스 리히터는 자신이 비발디 사계와 다시 사랑에 빠지기 위해 선택한 작업이라고 말한 바 있다’라는 문장이 있었는데, 정말 비발디 사계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묻어나는 재해석이었다. 최근 다른 클래식 공연을 통해 비발디의 사계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한 계절당 한 악장씩 간략하게 연주가 진행되었다. ‘한수진과 브리티시 오리지널’ 공연을 통해 내가 들은 사계가 무척 짧은 버전이었음을, 비발디가 얼마나 입체적이고 강렬한 필치로 사계절을 묘사했는지 깨달았다. 거기에 막스 리히터만의 현대적인 재해석이 더해져 한층 더 깊고 풍성한 사계를 들을 수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jpg

 

 

이번 공연의 큰 수확 중 하나로 바이올린의 매력을 알았다는 데 있다. 미리 접한 한수진 바이올리니스트의 정보에 따르면 어린 나이에 데뷔해 전 세계를 무대로 전무후무한 경력을 쌓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과연 직접 두 눈으로 본 한수진 바이올리니스트는 음악에 완전히 심취한 퍼포먼스로 단숨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랫동안 ‘클래식의 근간을 이루는 악기는 피아노’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바이올린으로 중심된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면서 내가 바이올린의 매력을 그동안 너무 과소평가했구나 반성이 되었다. 활을 어떻게 쥐고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이토록 다양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디니 신기하기만 했다. 기쁘다가도 슬프고, 비장하다가도 서정적인 그의 바이올린 연주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최근 2022년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의 3주간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크레센도>를 봤는데, 영화 덕분에 우승자 임윤찬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압도적인 재능은 영화를 보기 전에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무대 뒤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음악을 향한 순수한 애정이었다. 누군가를 이기겠다는 야심이나 독기 없이 순수하게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저렇게 황홀한 연주를 완성할 수 있다니, 음악 그 자체가 현신한 사람이 아닐까 싶어 보는 내내 감탄한 기억이 있다.

 

그날 한수진 바이올리니스트를 보면서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연주하는 내내 카리스마로 관중을 압도하던 그였는데, 연주가 끝나자마자 내가 방금까지 본 강렬한 연주를 펼치던 이가 맞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순수하게 연주가 재밌어서, 음악을 사랑해서 이 무대에 오른 사람 같았다. 공연 예술의 장점은 다른 기록 예술과 달리 아티스트가 일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한수진 바이올리니스트를 둘러싼 화려한 경력과 무관하게 순수하게 음악을 사랑하는 참된 직업인의 모습을 보았다.


공연을 들으면서 내가 원래 영국의 음악을 사랑한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했다.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브리티시 록을 접하고 롤링스톤스, 비틀스, 오아시스 등 시대를 넘나들면서 영국 특유의 음울한 느낌이 담긴 록 밴드의 음악을 들었다. 작년 갑작스럽게 시간적 여유가 주어졌을 때 충동적으로 영국 여행을 결심했다. 어느 나라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영국 본토에서 내가 좋아했던 영국 록 음악을 들으니 오랫동안 본능적으로 이 나라에 마음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차분하고 고요한 느낌. 북적북적한 도시에서도 들뜨지 않은 느낌. 대부분 날씨가 흐리지만, 그게 마냥 우울하지 않고 아련하게 가라앉는 느낌. 여행을 통해 내가 사랑했던 영국의 문화가 이런 환경 속에서 탄생했구나 알 수 있었다.

 

‘한수진과 브리티시 오리지널’ 공연을 보며 영국 음악에 대한 나의 사랑이 록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영국은 록의 명가일 뿐, 클래식과 록은 완전히 별개의 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장르에서도 내가 사랑했던 영국의 정취가 느껴진다는 점이 너무나 신기했다. 내가 영국을 여행했던 시간은 고작 일주일 남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에릭 코츠의 ‘런던 모음곡’을 듣는 동안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공간에 돌아온 듯한 반가움을 느꼈다.

   

영화 <크레센도>에서 하늘에 있는 음악가들을 위해 연주한다는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말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그날 한수진 바이올리니스트와 지휘자 아드리엘 김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의 황홀한 연주를 들으면서 불현듯 그 말이 떠올랐다. 클래식은 죽은 음악가들이 남긴 기록을 향유하는 예술이다. 갈수록 삭막해지는 이 세상에서 나같이 연약한 존재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이토록 아름다운 선율을 남긴 그들이 고마웠다. 연주자들의 아름다운 연주는 죽은 음악가들에게 바치는 보답 같았다. 그날 나는 너무나 황송하게도 하늘에 있는 음악가들과 지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음악가들의 교류를 지켜보았다. 그 교류에 이제는 클래식의 매력을 확실히 알게 된 나도 동참할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말이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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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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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
    • 에디터님 리뷰 잘 보았습니다 :-D 그날 뵈어 반가웠는데.. 말씀해주신 이야기들이 이런 내용이었군요. 저는 영국이나 영국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데, 리뷰를 보고 들었던 음악을 다시 떠올리니 설명해주신 것처럼 영국을 상상하게 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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