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음악, 그 영원한 찰나 – 세르게이 말로프 내한공연

글 입력 2024.04.30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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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재해석, 세르게이 말로프


 

요한 세바스찬 바흐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음악과 제목을 연관시키지는 못할지언정, 음악을 귀에 흘리면 “아, 그 노래!”하며 반기곤 한다. 17세기에 태어나 음악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바흐의 음악은 지구 반대편 이곳에서도 여전히 사랑받는다.

 

그의 음악은 누구나 알고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바흐와는 묘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음악의 거장’이라는 어마무시한 칭호에서부터 전달되는 카리스마는 클래식에 낯선 우리를 주눅들게 한다. 또한 ‘화성’이나 ‘평균율’과 같이 전문적인 음악 용어는 그러한 부담감을 배로 부풀린다.

 

그 결과 바흐는 시대를 초월하여 존경받는 음악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저 ‘과거의 음악 거장’으로 인식되며, 현대와는 단절된 ‘뒷방 늙은이’와 같은 이미지를 지니게 되었다. 새로운 악기와 전자 음악이 발명되고, 추구하는 음악의 기준이 달라지면서 클래식은 마냥 어렵고 케케묵은 옛날의 것으로 자리매김하고 말았다.

 

이때 세르게이 말로프Sergey Malov는 반기를 들며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린다. 한쪽 손에는 전자 바이올린, 다른 쪽 손에는 비올론첼로 다 스팔라Violoncello da spalla를 들고서. 그리고 그의 발 곁에는 루프 스테이션Loop Staion이 놓여있다. 이처럼 그는 고전과 현대를 마음껏 넘나들며 21세기 클래식의 신세계를 펼친다.

 

고전음악의 현대화를 이끄는 사람답게, 그는 클래식에 현대적인 악기 연주를 결합하는 과감한 무대를 선보인다. 바로 오늘날의 음악 작업에 빠질 수 없는 루프 스테이션(음악을 녹음하여 반복 재생함으로써 그 위에 다른 소리를 쌓아올릴 수 있게끔 하는 기계)을 이용하는 것이다. 루프 스테이션은 생김새부터 보통의 악기와는 차별화되며 스스로 소리를 내는 대신 여러 겹의 소리를 덧대어 더욱 풍성한 음악을 만들어준다. 이를 통해 말로프는 1인 연주가 지닌 ‘다양한 악기 사용의 제약’이라는 한계를 타파한다. 이러한 음악적 실험의 결과, 그는 기존 오케스트라와는 구분되는 풍성한 음악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말로프에 의해 새롭게 인식되는 바흐의 음악은 기존에 없던 유쾌한 소리와 자유로운 즉흥연주가 섞여 한층 풍성한 황홀감을 선사한다. 그의 연주는 뒷방 늙은이로 취급되던 바흐의 음악에 날개를 달아 새로운 도약의 순간을 만들었다. 그의 공연은 그야말로 클래식과의 2번째 첫 만남과 같다. 바흐의 진중함과 자유로운 즉흥연주가 어우러져 만드는 아름다운 하모니, ‘세르게이 말로프 내한공연’을 본다.

 

 

포스터-세르게이 말로프 (1).jpeg

 

 

 

말로프의 음악 공연


 

말로프를 사랑하는, 혹은 곧 사랑하게 될 사람들은 귀중한 저녁 시간의 황홀한 만찬을 거절하고 예술의전당으로 모여들었다. 말로프를 기다리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목소리, 그를 위한 꽃다발의 행진으로 공연장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이내 약속된 공연 시간이 되어 좌석을 비추던 조명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하얗게 번쩍이는 무대 위로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벽으로 보이던 구조물이 열리고 말쑥한 차림의 남자가 등장했다. 공연의 시작에서부터 예상을 벗어나는 등장이었다. 정중한 인사를 마친 그는 막을 올릴 준비가 되었다는 듯 자세를 잡았다. 기대로 가득한 마음과 함께 공연이 시작되었다.

 

본 공연의 프로그램은 총 3개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인상 깊었던 것은 마지막 곡과 추가로 연주한 2개의 앙코르곡이었다. 필자는 음악적 지식이라곤 전무한 수준이기에, 느꼈던 점을 중심으로 공연의 감상을 여러분과 공유해보도록 하겠다.

   

*

 

<(3번째 곡) 요한 세바스찬 바흐, 모음곡 6번 D장조, BWV1012>

 

지금까지의 두 곡에서 각각 다른 악기를 연주한 말로프였지만, 이번 악기는 지금껏 등장했던 것 중 가장 크기가 컸다. 비올론첼로 다 스팔라, 일명 ‘어깨첼로’였다. 끈을 이용해 크로스백을 메듯 악기를 둘러멘 그의 손가락에서부터 색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바닥과 수직이 되도록 악기와 활을 세워 잡고 위아래로 쓸듯이 연주했다. 앞의 곡보다 웅장한 소리가 악기를 타고 새어 나왔다. 동시에 그는 한쪽 발을 들어 올려 루프 스테이션의 버튼을 눌러 소리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음악의 베이스가 될 만한 소리를 쌓고 있는 것이었다. 일정한 주기가 있는 듯 반복적인 구간을 갖는 소리였다. 그는 얼마간 소리를 녹음하다가 다시 버튼을 눌러 방금 녹음한 것을 반복 재생했다. 그리고 또 다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배경이 되는 반복적인 소리 위로 즉흥적으로 전개되는 음악이 쌓이며 복합적인 사운드가 만들어졌다. 장엄하면서도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이었다. 마치 어느 모험 만화의 주인공이 되어 길을 떠나는 듯한 이미지가 그려졌다. 아주 중대한 사명을 지니고 물리쳐야 할 악당을 마주하러 가는 길.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긴장, 동시에 약간의 설렘을 껴안은 다부진 얼굴이 보였다.

 

때때로 활로 첼로를 두드리고, 손가락으로 줄을 튕기자 유쾌한 소리까지 겹쳐져 모험곡의 분위기가 한층 살아났다. 알 수 없는 설렘이 마음속에서 차올랐다. 분명 300년 전 바흐의 음악을 듣고 있을 터인데, 이렇게나 생뚱맞은 감상을 느끼다니. 교양이 넘치는 클래식과는 이질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자신이 있었다. 이것은 분명 말로프가 지닌 무한한 창의성과 자유로움이 열어주는 감상일 것이었다. 그가 지닌 현대적인 감각이 장엄하고 우아한 클래식과 어울리며 차별화된 분위기를 만들었다. 덕분에 관객들은 기존 클래식에서 느낄 수 있는 범위 이상의 감상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

 

<(앙코르곡 1) 디디에 락우드, Improvisation Hommage>

 

약속된 세 곡을 마치고 말로프가 정중히 인사한 뒤 무대를 떠났지만, 관객들의 환호는 멈출 줄 몰랐다. 박수가 끝없이 이어지자 결국 그는 다시 무대에 올랐다. 환호가 더욱 거세졌다.

 

이번 앙코르 곡에도 루프 스테이션이 한몫 단단히 거들었다. 루프 스테이션의 버튼을 누르자 정체 모를 자연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끼룩대는 갈매기의 울음소리, 뱃고동의 아우성이 하나씩 떠올라 겹쳐졌다.

 

회색빛 바닷가를 배경으로 말로프는 연주를 시작했다. 그는 기타를 치듯 손가락으로 줄을 튕기고, 뜯어내고, 악기를 통통 두드리기도 했다. 정석적인 연주 방법이 아님에도, 악기는 알겠다는 듯이 새로운 소리를 내어주었다. 클래식이 갖는 보수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악기의 소리를 끌어냈다. 말로프는 그야말로 음악적 실험의 대가일 것이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이란 돌 속에 갇혀있던 형상을 해방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로프는 악기 속에 갇혀있던 소리를 해방시켰다. 그는 온갖 악기를 다양한 기법으로 연주하며 필자가 품고 있던 음악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악기 내부를 공명하다 마침내 공연장을 가득 메우는 음악 소리가 무척이나 통쾌했다.

 

*

 

<(앙코르곡 2) 요한 세바스찬 바흐, 소나타 2번 A단조 BWV1003>

 

앙코르를 마치고 말로프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무대를 떠났다. 관객은 박수를 쳤다. 이제는 정말 끝난 거겠지, 하며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는데 말로프의 팬들은 아무래도 그를 보낼 수가 없었나 보다. 무대를 마친 음악가에 대한 예의라기에는 너무도 긴 박수와 환호성이 이어졌다. 소리가 거듭될수록 관객과 연주자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절정에 치달았다. 결국 말로프가 패를 내놓았다. 벽이 열리고 웃음기를 띈 얼굴의 연주자가 걸어 나왔다. 환호성이 공기를 찌르듯 터져 나왔다.

 

다섯 번째 무대에 오른 말로프는 입을 떼고 이렇게 말했다. “For the last time.” 관객석의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분위기를 가다듬은 뒤, 말로프는 정말로 마지막이 될 연주를 시작했다. 루프 스테이션 없는 정석적인 클래식이었다. 엄숙한 자세로 자신의 거장에게 마지막 곡을 바치는 말로프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러한 것이 바로 현장감이고, 또 클래식의 재미있는 점인 것 같다고.

 

클래식은 그 위상과 역사에 걸맞은 장엄함이 연상된다. 클래식을 연주하는 쪽과 관람하는 쪽 모두 클래식다운 품위를 지킬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한 규칙을 따르는 것이 음악에 대한 예의이고 존중이다. 필자도 그러한 규칙에 반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 프로그램이 끝나고 음악가와 관객 모두가 조금은 긴장을 내려놓은 채 인간적인 유연함을 되찾는 시간, 가만히 숨을 죽이던 관객이 환호성을 내지를 수 있는 시간, 아무런 사전 협의도 없이 단지 관객의 찬사에 보답하는 호의로서 즉흥적으로 공연이 연장될 수 있는 시간. 이러한 것들은 클래식이 지닌 의외의 모습이다. 음악가와 관객이 함께 만들어 나가는 인간적인 예외다. 이것은 공연 현장에서만 가능하다. 인터넷과 같은 가상의 공간에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귀중한 예외의 시간이다.

 

정규 프로그램은 오직 음악가만의 것이라면, 공연이 끝난 뒤의 박수갈채와 환호성, 앙코르를 청하는 목소리, 그리고 앙코르의 시간은 연주자와 관객이 함께 만들어가는 합주일 것이다. 귀중한 합주의 기회를 이곳에서 만나게 되어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순간의 예술, 음악에 대하여 


 

말로프의 연주를 보면서 느낀 것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그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말로프는 70분 내내 그야말로 온몸으로 연주했다. 악기에 전념하여 어깨와 팔, 상체를 모두 그쪽으로 기울인 채, 도약하듯 상체와 팔을 앞으로 뻗었다가 다시 바짝 세우기도 했다. 말 그대로 온몸을 다해서, 혼신을 다해서, 자신을 다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음악에 몰두했다.

 

이것이 바로 음악과 같은 순간적인 예술이 갖는 힘이다. 여러 차례 퇴고하여 말쑥한 형태로 출력되는 글과는 다르다. 음악가가 연주하는 찰나, 순간적으로 귀를 타고 흘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예술만의 특징이다. 녹음과 촬영, 그 무엇으로도 간직할 수 없는 현장의 예술이다. 음악가는 귀를 스쳐서 사라져 버릴 음악을 붙잡아 관객에게 전한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공기 중으로 상쇄되어 사라지는 그것이 지나고 나면 우리의 마음속에 무엇인가 남아있을 수 있도록, 혼신을 다해 순간의 예술을 펼친다. 무대 위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악기만 들고 맨몸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음악을 위해서. 누구도 간직하지 못할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순간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는 예술은 모순적이면서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것은 현장의 연주자와 관객 사이에서만 공유할 수 있는, 음악이라는 예술이 주는 모순된 감동일 것이다.

 

말로프는 그러한 예술을 했다. 70분간 혼신의 열정을 다한 그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무대를 떠났다. 무대는 암흑을 되찾았다. 관객의 위로 조명이 밝게 비추었다. 모두가 일어나 공연장을 떠났다.

 

그들을 떠나보내며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다. 순간적으로 공연장을 가득 채우고 우리를 휘어잡던 음악의 여운을 더듬으며. 무대와 공연장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연주자의 모든 열정을 그리며. 말로프가 남기고 떠난 그 무언가를 위해서. 음악가는 늘 무대 위에 놓고 내려올 수밖에 없는, 아무런 흔적도 없는 예술을 위해서.

 

음악의 모든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로프는 이러한 것을 알려 주었다.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내어놓아야 하는 예술이란 어떤 것인지. 그것은 영원할 수 없기에 아름답다는 것을. 어떤 예술은 일회성의 무대 위에 뿔뿔이 흩어져버린다는 것을. 공연이 끝나고 나면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그러나 거기에 음악의 가장 귀중한 것이 있다. 음악가와 관객이 함께 만들어간 70분의 시간, 음악가의 열연이 만들어낸 순간적인 환상, 앗아갈지언정 추억처럼 남는 음악의 잔상. 그것이 음악이고, 순간이고, 예술임을 알게 되었다.

 

 

 

서지원.jpg

 

 

[서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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