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 세월 : 라이프 고즈 온

글 입력 2024.03.26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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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세월이 진짜 약인가요?


세월호 참사로 딸 예은 씨를 잃은 유경근 씨가, 6월 민주항쟁 당시 아들 이한열 열사를 잃은 고(故) 배은심 여사에게 묻는다. 시간이 흐르면 다 괜찮아질 수 있는 걸까.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세월이 지나면 다 나아진다고. ‘시간이 약’이라고. 하지만 어떤 기억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은 채 우리를 덮친다. 또 세월이 흘러서 흐려지는 어떤 기억들은 그것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생각에, 종국에는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괴롭다. 그 기억은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해야만 하는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기억은 사라지지 않아서, 어떤 기억은 사라지는 것 같아서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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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근 씨는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을 통해 사회적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을 만나며 서로가 지닌 기억을 나눈다. 그 기억은 떨쳐버리고 싶은 기억이기도, 혹은 계속해서 남겨두어야 할 기억이기도 하다. 영화 <세월 : 라이프 고즈 온>은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을 기록하며, ‘그날’ 이후 유족들이 견뎌온 세월을 담아냈다. 세월호 참사로 딸 예은 씨를 잃은 유경근 씨와 1999년 씨랜드 수련원 화재 참사로 두 딸을 잃은 고석 씨, 그리고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로 딸을 잃은 황명애 씨가 주요 등장인물이며, 이들로 시작된 사회적 참사에 대한 이야기는 6월 민주항쟁 당시 아들을 잃은 고(故) 배은심 씨의 이야기로까지 확대된다.

 

영화는 참사 발생 시기를 기준으로 시간순으로 구성돼 각 사건과 인물의 변화를 짚기보다, 진행자인 유경근 씨와 이들의 대화, 이들 각각의 인터뷰를 통해 각기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그날’을 연결한다. 참사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의 기억, 비통함과 억울함, 부실한 사고 수습과 무책임한 당국의 모습, 가족을 구하기 위해 유족이 직접 나서야만 했던 상황들, 시간이 흐르며 냉담해지는 사람들의 모습, 참사를 기억하지 않길 원하는 공동체 앞에서 싸워야 했던 순간들. 모두 다른 참사였지만 그들이 겪어온, 견뎌낸 시간의 양상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기억들을 나누며 이들의 ‘그날’은 연결된다. 


또한 이들은 사회적 참사로 가족을 잃은 상실감과 상처에 서로 공감하며 연대한다. 팟캐스트 녹음실은 비슷한 상처를 지닌 이들이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따스한 공감과 연대의 장소가 된다.


어떻게 지내세요?


어릴 적에는 이 말이 지닌 애정과 따뜻함을 몰랐다. 어떻게 지내냐는 말은, 상대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그 상대를 따스하게 살피는 말이다. 단순해 보이는 이 말 안에는 상대에게 묻고 싶은 수많은 안부의 말과 함께, 상대가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꺼낼 때까지 상대를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주는 마음이 담겨 있다.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유 씨는 녹음실을 찾는 유족들에게 늘 묻는다. 어떻게 지내고 계시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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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 라이프 고즈 온> 역시 유족들이 참사 이후 어떤 세월을 보냈는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묻는다. 참사 자체보다, 그 이후의 삶을 이야기한다. 영화는 유족들이 가족을 잃은 상실과 상처를 안은 채, 앞을 향해 나아가며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지하철 참사 현장에서 매일 유골과 유품을 샅샅이 찾아다녔던 시간, 추모 공간 설립을 위해 투쟁한 시간,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발로 뛰었던 시간, 다른 사회적 참사의 유족들을 따뜻하게 안아줬던 시간, 사건 재발 방지와 더 안전한 사회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 등. 이들은 가족을 찾기 위해서, 가족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그리고 그 가족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살아왔다. 어디에서도 들어볼 수 없었던 그날 이후의 그들의 삶은 결코 무력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과 같은 아픔이 있는 이들과 연대했고, 더 나은 미래와 사회를 고민했다. 

 

대구 지하철 참사 현장에서 고아나 불법체류자와 같이 찾아줄 사람이 없어 신원미상으로 묻힌 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는 황명애 씨에게서, 어린이 안전을 위한 재단을 운영하는 고석 씨에게서, ‘내 아이가 안전하기 위해선 내 옆집 아이가 안전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유경근 씨에게서 자신의 상처를 통해 타인의 아픔을 보는 따스함과, 병든 공동체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본다. 이들은 거대한 상실 앞에서도 변화를 말했다. 사회적 참사로 희생된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영화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을 발견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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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특정 시간대에 머물지 않는다. 시간대를 반복적으로 옮겨가며 우리가 마주해야 할 한국 사회의 민낯을 보게 하고, 무엇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상실 앞에서 변화를 말하는 유족들처럼, 영화도 결국 변화를, 더 좋은 미래와 사회를 고민하게 한다. 


영화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재난과 참사가 ‘생명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거대한 사회 시스템의 결과로써 일어난다는 사실을 짚는다. 매번 반복되는 미흡한 참사 대처와 시신 수습, 참사를 지우려는 시도, 그리고 유족들을 향한 사회적 혐오와 정치적 낙인을 보여준다. 이렇게나 많은 사회적 재난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도 좀처럼 변화하지 못하는 사회와, 사회적 재난을 대하는 미숙하고 잔인한 공동체의 태도, 그리고 동료 시민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부끄럽고도 답답한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 유족들의 덤덤한 목소리를 통해 전달된다. 그들이 덤덤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슬픔과 분노와 절망의 시간을 견뎌왔을지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왜 이렇게까지 변화하지 못해왔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변화할 수 있을지 영화는 제시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세월 : 라이프 고즈 온>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제시하는 방향성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유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그리고 사회적 참사를 기억함으로써 상처받은 공동체를 치유하는 것이다. 유족들의 삶의 궤적을 그리며 사회적 참사를 재조명하는 이 영화는 우리가 받았던 상처를 피하기보다 직면하고, 잊기보다 기억하면서 함께 앞으로 나아가자고 이야기한다. 


고(故) 배은심 씨는 ‘세월이 약’이냐는 유경근 씨의 질문에 약이 어딨겠냐며, 그저 안고 살아가는 것이 약이라고 답한다. 아들을 잃은 후, 아들을 죽음으로 몰게 한 독재 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 운동에 힘썼던 그의 삶을 미루어보아, ‘그저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아픔과 상처를 떨치기보다 직면하고 인정하며,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묵묵히 버티고 견디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삶일 것이다. 영화 제목이 시사하듯, 삶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크나큰 상실과 고통 이후에도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픔을 안고, 견디고 하루하루를 버텨가면서도 앞을 향해 나아가는 법을 배운다. 유경근 씨는 말한다. 예은이가 없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하루하루 배워가고 있다고.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유족들의 삶은 사랑하는 이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이 세상에서, 어떻게 견디고 버티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운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참사 이후 이어져 온 그들의 삶의 시간을 함께 걷다 보면,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이 잔인하고 절망적이면서도, 동시에 희망일 수 있다는, 삶의 아이러니를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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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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