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젊은 느티나무를 끌어안은 쥬드에게 - 쥬드 [영화]

글 입력 2024.06.2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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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에서 <사랑의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두 차례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영화 <블루 발렌타인>와 <500일의 썸머>를 다루었던 두 글 모두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제시되는 등장인물들이 사랑을 대하는 양가적 태도를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 나름대로 특정한 사랑의 양상을 조명하고자 했던 나의 바람을 담고 있다. 당시 나는 <500일의 썸머>에 관한 글을 작성하면서 당분간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글을 더는 작성하지 않겠다고 적었고, 그럼에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다시 적으리라는 의지 혹은 적게 될 것만 같다는 일종의 예감을 함께 밝혔다.

 

에디터 활동의 마지막 글을 영화 <쥬드>와 소설 <젊은 느티나무>를 통해 바라본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치겠다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그처럼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켜켜이 중첩된 의지나 예감 따위의 것들이 내게 영향을 미쳐왔던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무엇으로 어떻게 갈무리하면 좋을지 고민을 거듭하면서도 어쩌면 처음부터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듯 내 손목을 잡아 끌었던 것은 사랑이었다.

 

우선 영화 <쥬드>는 토마스 하디의 소설 <비운의 주드>를 원작으로 하고, 소설 <젊은 느티나무> 또한 동명으로 영화화, 드라마화되었다. 그만큼 당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들이다. 한편 두 작품은 세간으로부터 인기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둘 모두 금기된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같다. <쥬드>는 사촌과의 사랑을, <젊은 느티나무>는 의붓남매 간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매체에서 흔히 불륜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금기된 사랑'이라는 테마는 언제나 사회적인 인식으로부터 일정 부분 논란의 여지를 수반하고 때로는 법적 논의로 이어진다. 실제로 1991년 이후 법적으로 의붓남매 간의 결혼이 가능하게끔 법이 개정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젊은 느티나무>의 작중 시대상과 현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당시 사회가 결코 용인할 수 없었던 사랑을 끝까지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들의 모습은 현대에서도 자주 보여지고 그만큼 인기있는 소재이다.

 

세상에 100명의 사람이 존재한다면 분명 100가지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말처럼 사랑이라는 것은 저마다 다양하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때로는 무의미한 일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든 정의된다. <로미오와 줄리엣>부터 앞으로 무한히 등장할 사랑 이야기까지 그러한 과정은 반복될 것이다.

 

법적으로 금기된 사랑이었다는 점을 차치한다면 쥬드와 수 사이의 사랑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까. 쥬드의 대사처럼 둘 사이의 사랑은 완벽해질 수 있는 것이었을까. 스스로에게 자문해봐도 답할 수 없다. 금기된 사랑을 다룬 작품들은 그러한 답을 요구하기 위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전에 작성했던 두 편의 글에서 주목했던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성질을 언급하는 대신 <쥬드>와 <젊은 느티나무>룰 감상하고 천천히 둘을 비교하며 적어두었던 짧은 술회로 그것을 갈음하고자 한다. 어차피 내가 그들의 사랑을 무엇이라 정의하지 않아도 이미 수많은 평론가들과 독자들이 남겨놓은 정의로도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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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이상과 현실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가장 생생하고 극적이다. 당시 영국의 시대적 배경을 걷어내고 보면 쥬드가 직면하게 되는 사랑의 근원적인 문제는 현대인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쥬드가 아라벨라와 했던 사랑은 그 사랑이 치기 어린 마음에서 비롯되었더라도, 너무나 충동적이었더라도, 처음부터 서로가 서로의 불행을 수차례 암시했던 관계라고 하더라도 결코 사랑이라는 이름외에 다른 무엇을 찾아 붙일 수 없다.

 

쥬드는 수와의 사랑을 자신에 인생에 찾아온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수가 자신의 스승인 필로슨과 결혼을 하겠다는 선택을 내렸던 때에도 그 결혼이 진정한 사랑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믿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수는 주드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나는 쥬드와 아라벨라 간의 사랑도, 수와 필로슨 간의 사랑도 전부 사랑이라고 인정했다.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때는 그 선택이 이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니 그것이 현실과의 타협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면, 이상이 더는 이상이 아니게 되는 것일까? 사랑이 더는 사랑이 아니게 되는 것일까? 그때의 사랑도 사랑이고 지금의 사랑도 사랑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태어나는 죄의식. <젊은 느티나무>에 등장하는 윤숙희와 이현규, 두 인물 또한 쥬드와 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바로 이 죄의식을 함께 공유한다.

 

"그때 숲속에서의 일은 우리에게는 어찌할 수도 없는 진실이었다. 우리는 이 일은 부정하고는 살아가지도 못할 게다. 우리는 만나기 위해서 헤어지는 것이야."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느티나무를 안고 떨고 있는 윤숙희에게 진심을 전하기 위해 한 이현규의 말은 <쥬드>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어찌할 수 없는 진실을 안고 살아가는 그들은 통제할 수 없는 현실로 인해 괴로워하지만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이상 속에서 사랑을 느낀다. 물론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사랑 뿐만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좋다. 사랑은 만나기 위해서 헤어지는 것이니까.

 

영화의 결말은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이다. 나는 이토록 비극적인 결말을 선사하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아이들이 사망함으로써 둘의 사랑이 남긴 흔적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어딘가에서 둘의 사랑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 소설 <비운의 주드>에서는 쥬드와 수의 재회가 이루어지지 않고 쥬드가 세상을 떠나게 되는 비극적 결말이 나타나지만, 그리고 분명 영화에서도 그들의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게 될 것이라 예상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럼에도 사랑은 사랑이니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쥬드와 수의 재회를 꿈꾼다. 그들이 다시 만나든 만나지 못하든, 그들이 사랑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지만 내가 아는 사랑은 그들의 만남 속에 있다. 모든 것을 이루고자 했지만 무엇도 이루지 못한 쥬드가 아직도 사랑을 위해 느티나무를 안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누구나 저마다의 금기된 사랑이 있다. 그것이 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상상할 수 없었던 여러 제약들에 의해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랑을 사랑이라고 발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느티나무 한 그루였음을.

 

나는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기 위해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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