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수히 많은 이들이 그리워지는 이야기 - 소설 '쇼코의 미소' [도서/문학]

글 입력 2024.03.13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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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계속해서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그건 작품도 마찬가지다. 읽을 때는 재미있을지 몰라도 이내 휘발돼 버리는 작품도 있고, 읽으면서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지만 쉬이 잊히지 않고 삶의 순간순간마다 떠오르는 작품도 있다. 그런데 아주 가끔은 너무 강렬해서, 읽는 중에도, 읽고 나서도 그 여운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작품도 만난다.


최은영 작가의 단편소설집 <쇼코의 미소>는 내용도, 문장도, 그걸 읽었던 나의 경험도 모두 강렬해서 쉽게 잊을 수 없다. 모든 문장들이 나를 쿡쿡 찌르는데, 소설의 한 대목도 아니고 소설이 전개되는 모든 순간에 서럽게 눈물을 흘려본 건 처음이었다. 어찌나 울었던지, 책을 덮을 때마다 진이 빠질 정도였다.


이 소설은 슬픈데 따뜻하다. 사실 슬프다기보다 아프다. 누구나 겪어봤을 이별과 상실,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는 슬프다기보다, 무언가에 스쳐 상처가 난 것처럼 쓰라리고 아프다. 그런데 그 쓰라림 속에서 이상하게도 따뜻함이 빛을 발한다. 평생 잊지 못할 그리운 한 사람과,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들, 그리고 함께 공감하고 연대했던 순간들의 이야기가, 서로를 위하는 따스한 마음들이 너무나 아름답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와, 그것의 무상함을 자주 생각하게 된다. 어릴 적에는 관계가 영원할 줄 알았다. 그것이 언젠가 나도 모르는 새 사라지고, 또 시간이 흘러 그 관계를 그리워하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관계가 끊어진다면 그 시점은 명확하고, 누군가의 일방적 잘못으로 관계가 끝나는 줄 알았다. 관계에서 누군가를 버리고, 또 버림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릴 적 생각과 달리, 관계라는 건 내가 예상하지도 못하도록 정해진 방향 없이 그저 흘러가는 것이었다. 싸우지도, 서로 마음이 상할 일도 없었지만 멀어지고 사라지는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소원해지고 사라지는 시점은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과 단순히 너무나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았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나와 상대 모두 관계를 버릴 때도, 또 두 사람 모두 버림받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멀어지고 사라지고 종국에는 그리워지는 어떤 관계들은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인생에 그리운 사람 한 명쯤은 있지 않은가. <쇼코의 미소>는 바로 그 사람, 내가 가장 그리운 사람,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만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이별과 상실, 그리움을 담고 있다. 그 사람은 죽었을 수도, 서로가 남긴 상처 때문에 차마 다시 볼 수 없을 수도, 혹은 서로 행복했던 그때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을 알기에 보지 않아야 하는, 그저 그리워해야만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게 너무나 아팠다. 서로가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그때 그 사람과 예전처럼 지내기 위해 억지를 부릴수록 밝게 반짝였던 과거의 관계와 기억마저 훼손돼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그리워할 뿐, 무엇도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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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 화자의 어머니는 어릴 적 만난 순애 언니를 그리워한다. 화자의 어머니 해옥은 ‘언니’라는 말이 주는 다정함과 따스함을 사랑했고, 학교를 마치고 오면 가장 먼저 순애 언니를 찾아 그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두 사람은 각자의 처지가 너무 달랐기에, 서로 괴롭지 않기 위해 서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순애 언니의 남편은 간첩으로 몰려 유죄판결을 받았고 심한 고문을 당했다. 순애 언니의 남편이 출소한 이후 해옥은 통닭 한 마리를 사 들고 순애 언니의 집에 가지만, 거동이 불편하며 공허해 보이는 순애 언니의 남편과 사 온 통닭을 게걸스럽게 먹는 순애 언니,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한 순애 언니의 딸의 모습을 보고 괴로움을 느낀다. 이후 순애 언니의 남편은 실수로 오줌을 지려버리고, 그의 오줌으로 바닥이 흥건해져 해옥의 원피스가 젖는다. 해옥은 순애 언니의 모든 것이 싫고, 도저히 이 광경을 참아낼 수가 없다. 그는 따뜻하고 쾌적한 본인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며 떠나는데, 순애 언니가 떠나는 해옥의 뒤통수에 대고 말한다. “나, 항상 이렇게 사는 건 아니야.” 그리고 덧붙인다. “해옥아, 잘 살아.”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었다. 둘은 서로를 예전처럼 볼 수 없다. 서로가 열여섯 살, 열한 살이던 그 시절, 해옥이 순애 언니를 ‘언니, 언니’하고 부르며 함께 웃고 떠들고 의지했던 그 시절은 이제 영영 사라져 버렸으니. 그 시절의 맑고 따뜻했던 순애 언니가 아니라, 잔인하리만치 괴롭고 버거운 현실을 억척같이 살아내는 순애 언니를 보는 건, 자신과 다르게 중산층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해옥에게 자신의 비참함을 보이는 건, 해옥과 순애에게 너무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해옥은 순애를 문득문득 그리워한다. 이제는 되찾을 수 없는, 그 시절 순애 언니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그리고 그 시절의 자신과 순애 언니를. 나이가 든 해옥이 병으로 병상에 누웠을 때, 해옥은 점점 작아지는 순애 언니의 환상을 본다. 그가 삶에서 가장 그리워한 사람은 ‘나의 작은, 순애 언니’였을 것이다.


독일에 살고 있는 한국인 가족과 베트남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씬짜오, 씬짜오>도 이와 비슷한 이별과 그리움을 그린다. 베트남전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삼촌, 심지어 태어난 지 일주일 된 아기였던 이모까지 한국군의 학살로 잃은 베트남 가족과, 군인으로 참전했던 삼촌을 잃은 한국인 가족은 모두 연고 없는 땅 독일에서 서로에게 큰 의지가 되어주지만, 서로가 남겼다고 말할 수 없는 각자의 상처를 의도치 않게 덧내며 이별을 겪는다.


“태어난 지 고작 일주일 된 아기도 베트콩으로 보였을까요. 거동도 못하는 노인도 베트콩으로 보였을까요.”

“그건 그저 구역질나는 학살일 뿐이었어요.”

“우리가 잘못했다고 말해야 돼?”

“저희 형도 그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그때 형 나이 스물이었죠. 용병일 뿐이었어요.”(p.80-81)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모두가 피해자였다. 하지만 서로의 상처를 덧냈던 그 대화를 계기로 두 가족은 서로를 예전처럼 마주할 수가 없다. 주인공은, 특히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자신의 예민함을 따스하게 바라봐 주었던 응웬 아줌마를 사랑했던 주인공의 엄마는 서로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한 자리에 모여 음식을 나눠 먹으며 대화를 나눴던 그 시간을 영영 그리워한다.


우리 삶에는 분명 갑작스럽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별도 있다. 한국의 대학원생 영주와 케냐의 수의사 한지가 프랑스 수도원에서 자원봉사자로 만난 이야기를 그린 <한지와 영주>는 그러한 이별을 그린다. 프랑스 수도원에서 만나 서로이기에 할 수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고, 추억을 쌓았던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했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둘은 맺어지지 못한 채 서로를 미워하는 것처럼 이별한다. 영주가 화자로 설정된 소설에선 한지가 일방적이고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한 것처럼 보인다. 소설에선 한지의 결심과 행동에 대한 이유를 알려주지 않고, 독자는 그 이유를 추측하기도 어렵다. 


생각해 보면 그런 이별의 기억도 누구나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다. 어떤 이별은 서서히 다가오지만 어떤 이별은 당황스러울 만큼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돌변한 상대의 마음과 태도에 우리는 어떤 대항도 하지 못한 채 버림받는다. 하지만 영주가 자신의 무심함이 한지를 아프게 했는지 돌아보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러한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버림받은 사람은 아니었을 수 있다. 상대가 나를 버린 것처럼, 나 역시 상대를 버렸을 수도 있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관계가 이토록이나 어렵고 복잡함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맺어온 수많은 관계들, 나누었던 우정과 사랑, 상실과 이별, 그리고 그리움이 우리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쇼코의 미소>는 서로를 위했던 따스한 시간도 전한다. 이 소설이 그리움과 상실로만 점철돼 있었다면 나는 그저 무한한 공허함과 무상함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단편의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위해 공감하고, 연대한다.


<먼 곳에서 온 노래>는 노래패 동아리 선배들의 폭력적인 말들을 무력하게 받아내야 했던 주인공 한 사람만을 위해 그것이 ‘잘못됐다’고 당당히 외쳤던 미진 선배를 그린다. 주인공은 세상을 일찍 떠난 그를 만날 수 없지만, 그와 함께했던 기억을 지니고 있는 이를 만나 미진 선배를 추억한다. 자기 편 들어줄 사람 하나 없는 회식 자리에서 선배들에게 따지고, 소리치던 당찬 선배였지만 주인공은 미진 선배가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횡단보도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집불통에 독한 인간이라는 소리를 듣던 선배도 고작 이십대 초반이었을 뿐이다. 여러 사람의 미움을 견디기로 마음먹었다고 하더라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겠지. 자신을 지지하고 인정해주는 동료가 없는 내부에서의 투쟁이란 대체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까. 그날 로터리 횡단보도 앞에서 스물다섯 선배가 흘렸던 눈물은 분노가 아니라 그때까지 누적된 외로움이었는지도 모른다. (p.200)


한국을 찾은 교황의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엄마의 이야기를 그린 <미카엘라>도 잊을 수 없다. 그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신실한 가톨릭 신자다. 그의 딸의 세례명은 ‘미카엘라’로, 그는 늘 딸을 그렇게 불렀다. 서울로 올라온 엄마는 목욕탕에서 만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다. 할머니의 유일한 친구는 세월호 참사로 아끼던 손녀를 잃었다. ‘자기 딸이 왜 죽었는지는 알아야 하는’ 할머니의 친구와 그녀의 딸은 하던 일도 다 내팽개치고 광화문으로, 시청으로, 여의도로 향했다. 목욕탕에서 만난 할머니는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를 보기 위해 광화문으로 간다고 했고, 엄마 역시 그를 따라 광화문으로 향한다. 그리고 딸도 엄마를 찾기 위해 광화문으로 간다. 엄마는 할머니 친구의 손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됐던 소녀의 세례명이 자기 딸과 똑같은 ‘미카엘라’임을, 희생됐던 소녀의 할머니도 그를 ‘미카엘라’라 불렀음을 알게 된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미카엘라’와 그의 가족들을 위해 엄마와 딸은 광화문으로 향한다. 엄마는 또 다른 ‘미카엘라’, 세월호 참사로 생을 마감한 그 미카엘라를 생각하며 본인의 딸을 떠올리고, 딸 역시 광화문 농성 텐트에 있던 유가족을 보며 자신의 엄마를 떠올린다.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이별, 그리움과 상실이 이 소설을 이루고 있다 하더라도, 등장인물들의 공감과 연대는 이들을 한 곳에, 광화문이라는 장소에 모이게 한다.


소설만큼 촘촘한 예술이 있을까, 생각한다. 심리, 관계, 삶의 무수히 많은 장면들, 지금까지 세상에서 말해질 수 없었던 것들, 말해지지 않았던 것들을 소설은 그 어떤 예술 장르보다 구체적이고, 촘촘하게 드러낸다. 그 촘촘함이 아름답지만 괴롭게 느껴질 때도 있다. <쇼코의 미소>도 그랬다. 그 촘촘함을 곱씹을수록 왜인지 괴로움과 우울함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많이도 웃었다. 상실과 그리움, 이별이 감싸고 있는 이야기에 서로를 향한 사랑과 따스함이 보석처럼 박혀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 그리운 사람 한 명쯤은 품고 살아가겠지. 문득문득 떠오르는 사람,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한 사람, 보고 싶지만 다시는 볼 수 없는 그 사람이 그리워지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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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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