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굶어 죽은 개'를 전시한 예술가 Guillermo Vargas [시각예술]

글 입력 2015.10.30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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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벨수프 복제로 유명세를 떨친 팝아트의 대가 앤디워홀, 레디메이드에 예술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부여한 뒤샹의 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로 이루어진 전위예술운동 플럭서스 등 당시에는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수많은 논쟁 끝에 혁신적인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제 이런 예술 활동들은 메마른 대중들의 감성을 더 이상 자극하지 못할 정도로 일상적인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오히려 예술이라는 명목 하에 무분별하게 제작되는 갖가지 독특한 형태의 작품들은 동시대 예술(contemporary art)이란 난해하고 거부감이 드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추세이다.
 

뜨거운 감자로 대두되고 있는 Guillermo Vargas의  ‘굶어죽은 개’라는 전시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기예르모 베르가스(Guillermo Vargas)는 지난 2007년 'Codice Gallery'에서 병든 유기견을 데려다가 전시회장 한 구석에 묶어놓고 죽을 때까지 물과 먹이를 주지 않은 채 닿을 수 없는 곳에다가 사료로 메시지를 적어놓은 '작품'을 전시했다. 논란이 일자 베르가스는 니카라과 출신의 가난한 부랑자가 자동차 수리점에서 도둑질을 하다 개 두 마리에게 물려죽은 사건을 두고, "이 작품은 그 부랑자에 대한 헌정물이다"라고 밝혔다. "거리에서 굶어 죽어가는 부랑자에게는 관심 없는 사람들이 깨끗한 전시회장의 개를 보고서는 관심과 동정을 던지는 위선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는 것"이다. 결국 전시회장의 개는 다음날 죽었고, 베르가스는 이를 '굶어 죽은 개'로 명명했으며 2008년 중앙아메리카 비엔날레에서 이와 같은 전시를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이 전시를 반대하는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가스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관심을 받았던 개는 그날 가장 살아있었다"고 말하며 "'굶어 죽은 개'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한 예술의 준비 단계일 뿐"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베르가스의 블로그에 무차별 사이버테러가 가해지고 자택에도 베르가스의 작품에 반대하는 무리가 찾아오는 등 '굶어 죽은 개' 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자 그는 "다음 전시회부터는 보건소에서 도살당할 개를 사용하겠다. 돕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데려가도 좋다"고 전했다. 예고한 대로 미술관에는 '굶어 죽는 개'가 전시되었고 많은 인파가 몰렸다. 하지만 '굶어 죽은 개' 앞에 세워진 팻말에는 지난번과 달리 "돕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데려가세요."라고 적혀있었다. 팻말을 본 사람들 중 한 노부인이 개를 데려간다고 말하자, 베르가스가 목줄을 풀어 노부인에게 건네줬다. 이에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자 베르가스는 "오늘은 열 마리 데려왔으니까 이제 아홉 마리 남았다"라며 또 다른 개를 '굶어 죽은 개' 자리에 앉혔다. 이에 사람들은 앞 다퉈 서로 데려가려고 손을 들었고, 베르가스는 결국 준비한 열 마리의 개를 모두 나누어주고 전시회를 마쳤다. 이후 몇 번의 같은 전시회를 개최했으나, 관람객들이 모두 개를 데려가는 바람에 '굶어 죽은 개'는 완성되지 않았다. 전시회가 매스컴 보도와 더불어 점차 유명해질 무렵 베르가스는 "이제부터 일어날 사건을 기대하라"는 말을 남긴 채 돌연 전시회를 그만두었다. 베르가스의 이러한 기행은 일시적으로 회자됐으나 곧 잊혀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개월 후 각지의 공원에 야위고 쇠약해진 개들이 나타났고 개들의 앞에는 "돕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데려가세요."라는 팻말이 세워졌다. 베르가스의 '굶어 죽은 개' 전시회 당시 유행을 따르거나 분위기를 타서 착한 척 했던 사람들이 개를 기르는 데에 싫증이 나자 베르가스의 방법을 따서 그대로 내 놓은 것이다. 결국, 전시회 당시 한 번도 완성되지 않았던 '굶어 죽은 개'는 수개월 후 여러 사람의 손에 의해 완성되고 말았다.
 
  처음에 이 전시에 대한 기사를 보고 개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나로서는 단순히 생명체인 개를 전시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에 굉장히 화가 났었다. 그러나 예술가의 작업의도를 이해한 후에는 이러한 위대한 퍼포먼스를 계획한 작가에 대한 경이로움과 충격으로 한참을 인간의 이중적인 면모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나와 같이 이 전시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 또한 분분했고 양측의 주장과 근거 또한 단순 감정적인 비판이 아니라 가히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논리적이었다. 후에 갤러리 관장이 개에게 음식을 주었으며, 개가 도망가기 전 까지 3시간 동안 굶겼으며 결국 개는 전시로 인후 죽은 게 아니었고 다시 거리로 돌아갔을 뿐이라고 밝혔다. 또한 전시 이후 이 전시를 반대하는 서명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작가 본인도 이 서명에 참여하였지만 약 8년 전의 사건이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이유는 납득이 되는 바이다.
  서론에서도 밝혔듯이 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들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존경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어찌 되었든 가장 먼저 시도를 했다는 점이다. 누구나 생각했을 수 있던 것일지라도 그것을 몸소 실천하여 온갖 비난들을 감수했기 때문에 박수 받아야 마땅하다고 본다. 설사 손가락질 당하고 욕을 먹을지라도 예술적으로 인정이 되면 그 이후의 효과는 엄청나다. 따라서 나는 다소 마케팅적인 냄새를 풍기는 선점효과라는 단어를 이용하여 그 자체만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굶어 죽은 개’ 전시를 선보인 Guillermo Vargas 또한 같은 선로를 밟았다고 보는 바이다.
  예술의 자유는 우리 헌법에서도 표현의 자유와는 다른 독자적인 기본권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는 그만큼 표현의 자유와는 구분되는 기본권이며 오히려 표현의 자유보다 더 강하게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권임을 표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술의 자유는 무제한적인 기본권은 아니며 타인의 인격권과 충돌할 수 있고, 따라서 인격원에 의해 제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격권에 의해 예술의 자유가 후퇴하기 위해서는 인격권 침해의 중대성이 증명되어야 하고 이는 개별적인 사건에 따라 구체적으로 심사할 수밖에 없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삶의 현실로부터 나오는 소재들을 가공함으로써 표현하므로 현실이나 현실의 인물을 예술작품의 소재로 사용할 수 있는 창작자의 권리를 포함한다. 하지만 예술형식이 타인의 인격이나 명예를 훼손할 목적으로 남용되거나, 작품의 내용과 묘사가 객관적인 평가나 작가의 동기에 비추어 볼 때 예술 외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면 이는 예술의 자유의 보호대상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여기서 사실을 전제로 하는 표현의 자유와는 달리 허구를 전제로 하는 예술의 특수성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필자는 “예술을 위한 예술” 이론에 입각하여 나의 의견을 뒷받침해보고자 한다. 예술 외적인 변수도 고려해야 한다는 ‘예술의 사회성’ 주장에 의해 고전적 이데올로기로 치부되고 있는데 이에 반론을 제기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예술지상주의라고도 불리는 개념으로 예술 작품은 순수하게 미 그 자체만을 추구,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 이외의 영역에 속하는 가치(종교적 선, 도덕적인 선, 역사적 이상, 사회적 진실 등)와는 관계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하는 주장을 말한다. 이는 현재에는 끊임없이 뜨거운 감자로 대두되고 있는 예술과 윤리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예술뿐만 아니라 안락사, 낙태, 동물실험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는 사회의 법과 윤리적인 차원에서 검토 받아야 마땅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정도의 선을 벗어나지 않는 한 윤리적인 문제로 예술에 제재를 가하는 것은 향후 예술의 발전을 차단하는 방해적인 요소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에 ‘어느 정도의 선’은 개개인마다 다르며 어디까지 정의해야 하는 지에 대한 논란이 있을 것이다. 이에 앞서 나는 개인적으로 전공 수업에서 배운 문학작품을 예로 들고자 한다. 한강 <몽고반점>, 김동인 <광화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옥변> 이라는 소설로 예술과 윤리에 대한 열띤 토론을 한 적이 있다. 탐미주의적 관점에서 미 즉, 아름다움이란 추와 고통, 지옥과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라 같은 선상에 있으며 이는 비극적 모순으로 그 아름다움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승화시킨 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마치 아름다운 천국을 그리려면 지옥을 함께 그려야 하며, 선이 있다면 악도 존재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이 공리적인 차원에서 예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진다면 예술에 있어서 더 이상은 발전이 없다고 본다.
  예술의 묘미는 작품 감상 후 느끼는 여운이 가장 크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스릴 넘치는 추리소설 책을 읽은 후, 마음을 울리는 감성적인 시어로 가득한 시 한편을 낭독한 후,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을 자아내는 압도적인 크기의 유화 그림을 감상한 후, 신들린 것 같은 연기로 관객들의 박수를 한 몸에 받는 배우들로 이루어진 연극을 관람한 후, 너무나도 공감이 되는 가사와 함께 어우러지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무한 반복 버튼을 누르게 만드는 음악... 미술, 음악, 연극, 문학 등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예술은 그 가치나 평판이 어떠하든 간에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한다. 좋든 나쁘든 그 예술 작품을 접하기 전과 후가 어떻게든 변화한다는 것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표현의 자유가 더욱 옹호되어야 하며, Guillermo Vargas와 같이 사회적인 변화를 꾀하는 혁신적인 예술 작품이 자주 선보여 대중들에게 다양한 시선들을 심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정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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