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개봉한 <가능한 사랑>. <버닝> 이후 8년 만에 돌아온 이창동 감독의 장편 영화이며, 전도연, 설경구, 조인성, 조여정이라는 탄탄한 주연 배우 라인업과 2주가량의 짧은 극장 상영 기간으로 인해 근래 개봉한 한국 영화 중에서도 상당히 화제성이 높은 영화였다. 특히 제83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 수상을 기념하여 메가박스는 10월 28일부터 11월 17일까지 돌비 시네마에서 ‘이창동 감독전’을 진행한다. 3주간 2편씩, <가능한 사랑> 이전에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장편 연출작 6편을 모두 선보일 예정이다.
기획전 첫 주 차에는 <버닝>과 <시>가 상영되었으며, 나는 그중 <시>를 관람하고 왔다.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 등, 영화의 명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그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 채로 보러 갔다. 다만 시를 좋아하고, 또 시를 나름대로 계속 써나가는 사람으로서 ‘시’라는 제목은 단순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면서도, 아주 강력한 힘을 지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가능한 사랑>을 보면서 느꼈던 예술과 창작에 대한 감독의 고민과 고백을 떠올려보면, 내가 사랑하는 ‘시’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했을지 궁금하고 기대되는 마음이기도 했다.
<시>는 시에 대한 영화임과 동시에 ‘미자’라는 인물의 삶이기도 하다.
미자가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까지의 여정을 찬찬히 되짚어보고 싶다.
1. 미자, 아름다운 사람
미자는 경기도 작은 도시에서 중학생 손자와 함께 살고 있는 예순여섯의 노인이다. 딸은 부산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으며, 미자가 대신 손자 ‘종욱’을 돌보고 있다. 미자가 돌보는 건 손자뿐만이 아니다. 동네 슈퍼 위층에는 중풍에 걸려 거동이 어려운 ‘강 노인’이 사는데, 미자는 그를 씻기고 돌보는 간병인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미자는 녹록지 않은 현실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의 초반부, 미자에게 더 큰 불행 혹은 고난이 다가오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저린 팔 때문에 동네 병원에 방문하는데, 의사는 오히려 몇몇 단어를 기억하지 못하는 미자의 상태를 치매 신호라고 여기고 큰 병원에 가보길 권유한다.
미자라는 캐릭터가 생기 넘치고, 긴 러닝타임을 끌고 갈 수 있는, 힘 있고 입체적인 인물이라고 느낀 것은 그녀의 순수함과 주체성 때문이었다. 그녀는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형편은 아니지만 늘 예쁜 모자를 쓰고, 레이스 스카프를 두르고, 알록달록한 자켓과 치마를 입고 다닌다. 동네 사람들은 미자를 ‘멋쟁이 할머니’라고 부른다. 또 미자는 자연스러운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길에서 본 문학 강좌 포스터를 보고 50년 전 초등학교 선생님이 해줬던 칭찬이 떠올라 문화원에서 ‘김용탁 시인’에게 시 쓰기 강좌를 듣게 된다. 심지어 해당 강좌는 이미 신청을 마감한 상태였으나, 미자는 이를 알고도 꼭 듣고 싶어서 그런다며 직원들에게 부탁하고 수업을 듣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 이후 미자는 시상을 찾기 위해 사과를, 설거지통을, 집 앞의 나무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자신에게 어떤 말이 찾아오길 기다린다. 하지만 아무리 바라보고 기다려도 시상은 생각보다 쉽게 찾아오지 않고, 미자는 “사과는 역시 보는 거보다 깎아 먹는 거”라고 중얼거린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소녀처럼 순수함을 잃지 않으며, 꽃을 좋아하고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는, 말 그대로 “시인 기질”을 지닌 미자를 보면 스테레오타입의 여자 주인공이 어렴풋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가난하지만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현실을 극복해 보고자 하는 굳건한 소녀들, 좌절이 계속 반복되더라도 정의나 윤리와 같은 가치들을 저버리지 않는 밝고 활기찬 소녀들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미자는 그렇게 단편적으로 포장된, 아름다운 인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는 미자의 목표가 ‘시인이 되는 것’이 아닌, 그저 ‘시 한 편을 쓰는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노화와 질병으로 인해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으며 미자 자신 또한 이를 알면서도 계속해서 안으로 삼켜내는 듯한 모습이 서글프게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함이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으로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닌, 그 모든 현실을 수용하면서도 아름다운 옷을 입고 무용한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아이러니함이 진실되게 느껴졌던 것 같다.
2. 희진의 흔적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 이 영화는 사실 미자가 아닌 ‘희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강가를 따라 고요하고 느릿느릿하게 떠내려오는 희진의 시신. 미자는 팔이 저려 병원에 갔던 날, 응급실 앞에서 혼이 나간 듯 울고 있는 희진의 엄마를 보게 된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손자 종욱에게 다리에서 뛰어내린 여자애에 대해 물어보지만, 종욱은 잘 모른다고만 답할 뿐이다.
미자는 기범의 아빠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기범은 손자 종욱이 함께 어울려 다니는 아이들 중 한 명으로, 미자는 종욱의 부모를 대신하여 학부형들이 모인 점심 식사 자리에 불려가게 된다. 이 자리는 그냥 식사 자리가 아니었다. 며칠 전 종욱은 희진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했으나, 사실 희진은 같은 학교 남학생 6명으로부터 몇 달간 집단 성폭행을 당했고, 종욱 또한 여기에 가담했음을 미자는 알게 된다.
부모들은 피해자를 애도하고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자식들의 앞길을 위해 위자료를 마련하고 상황을 무마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따라서 미자 또한 하루빨리 500만 원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미자는 차마 자리에 더 앉아 있지 못하고 식당 밖에 있는 꽃을 보며 시상 노트를 적는다. 다음 날, 학부형들과 학교 교감 선생님, 학생 주임 선생님까지 모이는 자리에 미자는 다시 한번 불려가게 된다. 교사들 또한 이 사건에 쉬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저 소문이 새어나가 학교 이미지가 안 좋아질 걱정만 할 뿐이지 아무도 희진의 죽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다.
오직 미자만이 희진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녀의 흔적을 따라다닐 뿐이다. 희진의 위령미사가 열리는 성당에 몰래 들어가 앉아 있으며, 나올 때는 희진의 사진 액자를 가방에 넣어 가져간다. 다음엔 학교에 찾아가 희진이 폭행을 당한 과학실을 창 너머로 들여다 보고, 희진이 뛰어내린 다리와 강가에 찾아간다. 죽은 희진이 다시 살아돌아올 수는 없는 노릇이며, 어쩌면 학부형들의 논리대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살 궁리를 해야 하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세상에는 무엇보다 미자의 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는 미자 한 사람의 시선으로 그려지지만 영화나 시와 같은 예술이, 지나간 것들과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의 흔적을 쫓고 사라져가는 목소리를 기록하는 일에 결코 소홀해지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3.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
죄책감과 괴로움 속에서도 미자는 계속해서 시를 쓴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에서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여는 시 낭송회에도 찾아간다. 그곳에는 미자처럼 진심으로 시를 사랑하고 시를 쓰는 사람도 있지만, 시 낭송을 핑계로 음담패설을 일삼는 ‘박 형사’ 같은 사람도 있다. 낭송회에서 만난 한 회원에게 미자는 시를 어떻게 썼느냐고 물어보고, 그저 느끼는 대로 솔직하게 메모하듯 적어내려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답을 듣게 된다.
시상을 늘 찾아다니던 미자는 희진의 시신이 떠내려온 강가에 가서도 바위에 앉아 노트와 펜을 꺼내든다. 노트 위에는 글자 대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미자는 강 노인의 집으로 향한다. 지난번 강 노인이 비아그라를 먹고 죽기 전에 남자구실을 한 번만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하며 미자를 추행하고자 했던 사건 때문에 미자는 간병인 일을 그만둔 상태였다. 하지만 다시 그 집으로 찾아가 강 노인에게 알약을 먹이고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상 노트를 꺼내들어 시적 영감을 붙잡아보고자 하는 미자의 모습은 기만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시 쓰기’와 같은 창작 행위는 그 내용이나 형식과는 무관하게 늘 창작자 자기 자신의 치유와 승화를 일 순위에 두고 이행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단어와 기억을 점점 잃어가는 미자가 희진의 엄마를 알아보지 못한 채, 땅에 떨어진 살구의 고통과 숭고한 희생의 아름다움에 대해 노래하는 모습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 또한 그 때문일 것이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 현실과 유리될 수밖에 없으며, 그 거리감을 방패 삼아 삶의 고통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작업은 되려 상처가 되어 돌아올 때가 있다.
미자가 강 노인의 부탁을 들어준 것은 그 경계를 허물고 희진과의 거리를 좁혀보기 위한 시도이자, 시상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시상을 찾아가라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실천해낸 것이라 해석해볼 수 있다. 그러니 나는 미자의 선택이 온전한 ‘희생’으로 읽히지 않았고, 그렇게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기도 하다. 시상을 찾아내서 시를 쓰고 싶다는 창작자로서의 이기적인 열망과 어쩌면 이 선택이 이후 손자 종욱의 합의금을 마련하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희진을 연민하고 애도하는 마음보다 앞서서 일어난 것 아닐까. 적어도 내가 지켜보고 이해한 미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4. 사랑의 모순
경제적 형편 때문에 돈을 구하기도 힘들었거니와, 돈을 건네고 합의를 함으로써 희진의 죽음을 없던 일로 만들어버리고자 하는 학부형들의 태도에 죄책감을 느끼던 미자는 끝내 돈을 구하지 못했다고 말하기 위해 공인중개사에 찾아가지만, 그곳에서 희진의 엄마를 다시 만나게 된다. 이날 미자는 강 노인을 찾아가 전에 있었던 일을 가족들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하며 현금 오백만 원을 받아낸다. 미자 몫까지 합의금을 전부 마련하게 되며 사건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미자는 오락실에서 놀던 손자를 끌고 나와 피자를 먹이고, 직접 그의 손발톱을 깎이며 단장을 시킨다. “사람은 언제나 몸을 깨끗이 해야” 한다고 말해주면서. 미자가 팔이 저려 운동을 하고자 했을 때처럼, 이날 저녁 두 사람은 집 앞에서 배드민턴을 친다. 승용차 한 대가 다가오고, 차에서는 시 낭송회에서 음담패설을 하던 박 형사와 경찰 한 명이 내린다. 경찰은 자연스럽게 종욱을 차에 태우지만 미자는 놀라거나 그런 종욱에게 인사를 건네지도 않는다. 그저 박 형사와 함께 남아 계속해서 배드민턴을 칠 뿐이다.
미자가 경찰에 신고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종욱의 몸단장을 시켰던 것과 박 형사의 등장에 놀라지 않았던 것을 보아 이 또한 미자의 선택임을 추측해볼 수 있다. 나는 미자가 더 이상 ‘종욱의 몫’이 아닌 ‘자신의 몫’이라 느끼는 오백만 원을 구해다 줬으면서도 끝내 경찰에 고발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랑의 모순이 좋았다. 종욱의 입에 밥 들어갈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느낄 만큼 손자를 사랑하지만, 평소 싫어하고 저급하다고 느꼈던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또한 미자의 모습이자 그녀의 사랑이다. 한밤중 자는 손자를 깨워 이불을 붙들고 왜 그랬냐고 울부짖은 다음, 다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불을 꺼줬을 때처럼 말이다.
5. 비워낸 자리
문화원 수업 마지막 날, 교탁에는 꽃과 ‘아녜스의 노래’라는 시 한 편이 놓여있다. 그동안 시 한 편을 완성한 건 미자 한 명뿐이지만 정작 미자는 수업에 오지 않았다. ‘아녜스’는 희진의 세례명으로, 미자의 목소리로 읽히던 시는 점차 희진의 목소리로 읽히기 시작한다. 다리 위에 선 희진의 모습이 보이고, 그녀는 뒤를 돌아 카메라를 응시한다. 희진의 시신과 미자의 모자가 떠내려가던 강의 물살을 비추며 영화는 끝난다.
그저 자신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들로부터 시상을 얻고자 헤매던 미자는 끝내 자신의 모든 자리를 비워내고 내어줌으로써 한 편의 시를 완성할 수 있게 된다. 미자가 사과를 들여다보던 식탁에는 그녀의 딸이, 하염없이 올려다보던 집 앞 나무 밑에는 동네 할머니가, 미자의 목소리로 꽃과 새들을 노래하던 시 속에는 희진의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결국 나의 것이 아닌, 타인의 목소리에 온전히 귀 기울이는 순간에 시가 시작되는 듯하다.
시를 완성하고 사라짐으로써 미자와 희진이 하나가 된 것처럼 느껴지는 마지막 장면은 미자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미자가 시를 써냈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았다고 보고 싶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자를 가장 강력하게 끌고 간 욕망은 ‘시를 쓰는 것’이지, ‘희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시를 포함한 문학은 오히려 타자에 대한 불가해성을 전제로 한다. 아무리 희진의 흔적을 따라다니고 죄책감과 고통 속에 살아도 희진과 미자는 오직 시를 통해서만, 그 안에서만 아주 잠시 희미하게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이라고 해서 두 사람을 완전히 같은 위치에 둘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앞으로 남은 미자의 삶에서 죄와 죄책감, 속죄와 시 쓰기, 필연적인 거리감과 불가해성으로 인한 고통이 끊임없이 반복될지언정, 그리고 그녀가 그 현실을 수용하기까지 다시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닐지언정,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희진과 하나가 되고자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시>뿐만 아니라, 이창동 감독의 최신작 <가능한 사랑>을 11월 6일 오늘부터 넷플릭스에서 감상할 수 있다. 삶의 아름다움과 추함, 예술의 가치와 모순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표현하는 그의 영화를 꼭 한 번쯤 감상해 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