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연극 <키리에>를 관람했다.
<키리에>는 제60회 동아연극상 3관왕에 빛나는 연극으로, ‘죽어서 집이 되어버린 사람, 그 안으로 찾아온 기적같은 사랑의 이야기’이다.
연극은 언뜻 보면 ‘죽음’을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사랑’을 다루고 있다. 연극에는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중 한 명은 죽어서 집이 된 천재 건축가이다. 인물이 인물로 등장하지 않고 하나의 공간인 ‘집’이 되어 등장한다는 게 무척 흥미로웠다.
그 ‘집’은 천재 건축가가 기존 집을 허물어 다시 설계하고 지은 건축물이다. 건축가는 30대 이른 나이에 과로사하고 그의 영혼은 집에 깃든다. 그 영혼은 집에 갇혀 몇 십 년간 홀로 세월을 보낸다.
그 세월을 동안 집은 무척 고독해진다. 자신의 과거를 곱씹고 후회하고 절망에 이른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흐르고 우연히 ‘엠마’가 아픈 남편과 함께 집에 들어오면서 그 영혼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엠마’는 전직 무용수로, 아픈 남편을 돌보고 있다. 집은 살아있을 적, 엠마를 본 적이 있다. 춤추고 무대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엠마를 떠올리며 홀로 엠마와 가까워진다. 엠마가 자신의 존재를 모르더라도 엠마를 위해 아낌없이 주려 하고 어쩌면 사랑을 했는지도 모른다.
집은 그렇게 엠마와 함께 하며 여관으로 뒤바뀐 이 공간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연극은 이렇게 전개된다.
여관에 들르는 이들은 모두 죽음을 결심한 사람들이다. 여관이 있는 검은 숲은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숲이고 이들은 저마다의 고통에 빠진 채 마지막 밤을 여관에서 지낸다. 죽은 반려견의 고향을 찾아 떠난 소설가 ‘관수’, 스스로를 학대하는 교직원 ‘목련’, 종교적 집안에서 태어나 희생만을 배운 성직자 ‘분재’가 그러하다.
이들은 집(여관)에 들어와서도 자신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어쩌면 죽기 전까지 스스로 이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리라 여긴다.
여기서 연극은 어떻게 ‘사랑’을 보여주었을까?
집은 그들에게 있어 여관의 장소로 인식된다.
여관은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곳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이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을 돌아보고 쉴 틈을 얻는다. 집은 쉬었다 떠다는 곳이다. 집을 쉴 수 있는 곳이다. 집은 세 명의 사람들에게 쉴 틈을 마련하며 사람들이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때 사람들은 지금껏 살아왔던 ‘나’에게서 벗어나 나 자신을 타자화하고 세상을 둘러본다. 유체이탈을 겪고 잠을 자고 엠마가 준 음식을 먹는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사람들은 이미 변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여관을 떠나기 전, 엠마는 이들에게 자신이 만든 초콜릿을 건넨다. 여관을 떠나 죽음으로 향하던 사람들은 죽기 전 초콜릿을 먹는다. 초콜릿을 먹은 후 그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 삶 속에서 자신이 잊어왔던 사랑을 떠올린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다. 그토록 바라던 죽음 앞에서, 당연하다 여겼던 고통 속에서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린다. 그 일들은 일상적이다. 그 일을 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리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죽는다면 그 일을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세 명의 인물들은 검은 숲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린 후 그 일을 하러 일상으로 돌아간다.
연극이 결말로 향해갈 때 집은 사랑하는 엠마를 위해 죽음을 결심한다. 그 죽음의 이유는 사랑이다. 이미 죽은 몸이지만 과거와 현재의 ‘죽음’은 다르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과거와 달리 집은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결심한다.
연극 <키리에>는 사랑과 죽음, 죽음과 사랑을 보여주는 연극이라 생각한다. 죽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다시 한번 삶을 택하는 과정은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연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