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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누군가의 일기를 읽으면 그 사람을 완전히 미워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 문보영, 『일기시대』 中

 

     

문보영 작가는 에세이 『일기시대』에서 일기가 가지는 유익함과 가치에 대해 솔직하게 풀어놓으며, “누군가의 일기를 읽으면 그 사람을 완전히 미워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구절을 쓴다.


일기를 쓰는 사람은 일기를 쓰는 그 행위만으로 스스로와 멀어지며 타인의 관점과 자신의 관점을 섞어 기술할 수 있게 되고, 이는 일기의 내용을 선하고 인간적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누군가의 일기를 읽게 된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의 경계가 흐릿해진 그 글에서 그 사람의 선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게 되며,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어떤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발견한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비추어 보자면, 이 구절을 조금은 뒤집어 읽어보고 싶다. 누군가에게 일기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조금은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이더라도 진심을 다해온 발자국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뮤지션 ‘박소은’이 그동안 들려주었던 음악 역시 이러한 ‘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들리는 마음과 고민들을, 사랑과 일상에 대한 솔직하고 소중한 감정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그의 음악들을 들을 때면, ‘나’와 ‘너’가 뒤섞인 일기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고, 다음 장이 궁금해진다.


이번 8월 7일 발매된 박소은의 세 번째 EP [B급 미디어]도 지금껏 그가 그랬듯, 자신의 삶과 사랑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일기처럼,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B급 미디어’라는 이름으로 묶인 6개의 곡 속에서 그는 여지없이 이번에도 솔직한 스스로를 ‘재생’한다.


그 속에서 그는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자라기 싫은 ‘어른이’이자, 여전히 꿈과 사랑을 믿는 몽상가였고, 소중한 사람을 생각하며 ‘지금’을 살아가는 ‘나’와 ‘너’가 된다.

 

 

 

Track 1. 내가 되게 유치한 미디어 속에 갇힌 주인공이면 좋겠어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적나라하게 재생되는 현실과 달리, 미디어 속 주인공들의 모습은 과감히 편집되고 그 주변의 이야기들은 과감히 생략된다. 그렇게 말도 안되는 클리셰의 도움을 받는 ‘주인공’들의 공간은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른들의 도피처가 된다.


곡 속에서 언급되는 ‘유치한 미디어’, ‘오래된 만화책’, ‘진부한 드라마’는 모두 누구나 한 번쯤은 현실도피를 위한 정거장으로 머물렀던 미디어들이다. 이러한 미디어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거듭되는 역경을 온몸으로 마주하며 결국 그것을 극복해내고, ‘성장’을 위한 과제를 멋지게 수행해 나간다.


그러나 여전히 지난한 ‘과정’ 속에 있는 우리는 가끔씩 스스로가 다른 존재였으면 어땠을까 상상하며, 끊임없이 밀려드는 ‘지금’을 잠시 위로할 수 있을 뿐이다.


로드무비에 어울릴 것 같은 컨트리 장르 스타일의 멜로디와 풍부한 악기 사운드가 합쳐진 이 곡을 듣다 보면, 정말로 그러한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상상을 함께 하게 된다.


그럼에도 박소은은 실망도, 슬픔도, 실패도, ‘할 리 없는’ 주인공들을 미디어 안에 ‘갇혔다’고 표현한다. 결국 편집된 멋진 모습만 보여주는 주인공들의 이미지는 미디어 안에 박제되어 있을 뿐,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며 재생된다.


결국 우리도 알고 있다, 현실도피 속에서 잠시 몸을 피할 수는 있지만, 평생 머무를 수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박제된 이미지 사이사이 모습을 숨긴 실망도, 슬픔도, 실패도 모두 지금의 ‘나’를 이루는 이야기 속에 함께 재생되고 있음을.


“사실 알고 있지만

다시 할 순 없는 거잖아

모르는 척하지만

이젠 너무 멀리 왔잖아”

 

 

 

Track 2. 레고월드


 

 

 

타이틀 곡 ‘레고월드’는 아직 어른이 되는 법을 모른 채로 어른이 되어 버린 모두의 맘에 와닿을 솔직한 고백에서부터 시작한다.


“사실 나는 하나도 자라지 못했어”


‘사실 하나도 자라지 못한’ 채로 무작정 어른이 되어 버린 이들은 여전히 어른의 세계에 속하지 못한 채 ‘레고월드’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국 진짜는 아닌 것이 가득한 ‘레고월드’처럼, 우리도 아무렇지 않은 척 어른스러움을 연기하고, 괜찮은 척하며 아픔을 숨긴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이 세계 안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하며 존재하는 것은 녹록치 않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의 문제와 경쟁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할 것을 요구 받는다. 계속해서 나아가고 성장하는 것으로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정체되어 있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박소은은 그런 스스로에게, 그리고 많은 ‘어른이’들에게 ‘넌 어떻게든 버텨내 가는 중이야’라며 공감과 위로를 건넨다.


자라지 못하고 멈춰 있는 듯하더라도, 그저 그런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우린 충분히 애쓰고 있다. 매일매일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하진 못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지켜내는 일 그 자체라고, 이 곡에 공감하는 우리에게 이야기해보고 싶다. 결국 제자리걸음도 걸음이다.

 

 

 

Track 3. 자율주행


 

 

 

모든 것을 ‘내 맘대로’ 할 수는 없겠지만, 가고 싶은 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믿음을 갖지 못할 때 우리는 ‘움직일 수 없는’ 무력함을 느끼며 ‘볼품없게 무너’진다.


‘자율주행’은 이러한 무력감과 답답함을 리드미컬한 멜로디와 악기의 개성이 살아 있는 밴드 사운드로 풀어낸다.


가고 싶은 곳과는 정반대로 빙빙 돌고 있는 것만 같은 답답함은 스스로에 대한 의문과 의심으로 연결된다. 갖고 있다고 믿있던 자율성과 주도권이 환상처럼 느껴지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견디는 힘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어차피 모두 정해져 있다면 차라리 쉽게 쉽게 가고 싶지만

난 그런 사람은 될 수 없겠지.

가득한 미련을 병에 넣고서

몇 번이고 뱉었을 감정들을 섞어 마시고 취해버리겠지 뭐”


결국 돌아가게 되더라도 ‘나다운’ 선택을 이어가는 것이,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발을 내딛을 수 있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다른 무엇에 끌려다닐 바에는 ‘나에게 끌려다니는 것’이 어쩌면 더 낫지 않을까, 세 번째 트랙 ‘자율주행’은 공감되는 이야기 속에서 ‘나다움’을 생각해보는 힘을 준다.


 

 

Track 4. 나는 변하지 않아


 

 

 

박소은 특유의 포근한 음색이 돋보이는 선공개곡 ‘나는 변하지 않아’는 미디어 속에서 표현되는 ‘여름’처럼 반짝이는 사랑을 그려낸다.


모든 것이 변해가는 와중에도 ‘나’만은 ‘너’의 곁에 변하지 않고 있겠다는 약속과 믿음이 담긴 가사가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다.


언젠가는 끝날 것을 알면서도 영원을 믿는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어리석은 믿음으로, 겉으로만 그럴싸한 반짝거림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믿음이야말로 여름과 사랑이 가지는 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확신’은 어느새 너무나 어렵고 위험한 것이 되어 버렸지만, 박소은의 ‘나는 변하지 않아’는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마음을 이야기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도 언젠가는 반드시 끝나겠지만 각각의 여름이 매년 다르게 기억되듯, 결국 영원하지 않을지라도 확신만이 만들어낼 수 반짝이는 풍경과, 그것만이 전할 수 있는 마음도 있다. 어쩌면 그것은 그저 허울 뿐인 반짝임이 아니라, 지금의 사랑을 온전히 전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일 것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시간은 어지러울만큼 빠르게 지나가'지만, '그 위에 칠해질 우리 영원들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앨범이 발매되었던 여름의 공기가 시원한 바람과 함께 바뀌어 가듯, 이번 여름도 결국 끝이 나고 내년에는 새로운 여름이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이 곡과 함께 이번 여름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기를. 좀 더 반짝이고, 좀 더 강렬하고, 좀 더 특별한 계절로 영원히 남기를 바라본다.

 

 

 

Track 5. 너에게만 계속 지고 싶어요


 

 

 

흔히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진다’고 한다. 하지만, ‘온 마음을 다해서 열심히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큰 행운이자 행복인 것 같다.


이기고 지는 것을 따지지 않고 온 마음을 다 쏟을 때, 오히려 승패를 넘어서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연인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마음의 무게를 재게 되는 모든 관계와 도전에도 해당되는 아이러니다.


결국 ‘과거의 한 장면’이 되더라도, ‘잊혀지는 기억’이 되더라도, 끝없이 지고 싶은 ‘지금’의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이는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고, 온 마음을 다하는 순간을 담아내는 박소은의 음악들과 여지없이 맞닿아 있다.


그의 음악들이 그렇듯, 무언가에 진심을 다하는 사람들이 마주하는 실패는 왠지 모르게 반짝인다. 어쩌면 당사자의 입장이 아니라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솔직한 마음이 가진 그 고유한 반짝거림은 왠지 모르게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렇기에 어쩌면 내맘같지 않은 순간들이,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쏟게 되는 그 순간들이 사실은 스스로가 정말로 반짝이는 순간일 수 있다.


안타깝게도 누군가가 가지는 반짝거림은 그 스스로에게는 발견되기 어려우니, 이 곡이 그렇게 무언가에, 누군가에게 온 마음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의 위로와 응원이 되어주길 바라며, 가사 속 한마디를 내가 아끼는 그들에게도 조심스레 전해주고 싶다.


그러니까, "난 너에게만 계속 지고 싶어요"

 

 

 

Track 6. 잠에 들어야지


 

 

 

잠은 오늘과 내일을 이어준다. 잠이 주는 온전한 휴식은 내일을 맞이할 힘과 용기를 더한다. 그래서인지 오늘에 남긴 아쉬움과 내일을 향한 두려움을 붙들고 있는 밤에는 유독 잠에 들기 어렵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쉼을 허락해주는 일은 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박소은의 ‘잠에 들어야지’ 가사 속에서도 주문처럼, 다짐처럼 혹은 자포자기한 마음에 나오는 한숨처럼 ‘잠에 들어야지’라는 가사가 반복된다.


“잠에 들어야지 좋은 꿈을 꿔야지

꿈속에서는 누구든 내 옆에 있겠지


잠에 들어야지 깊은 숨을 쉬어야지

꿈속에서는 누구든 내 옆에 있겠지”


있어야 할 곳을 잘못 찾은 듯한,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아버린 듯한, 어색함과 불편함 속에서 눈을 감고 잠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현실과 마주할 힘을 모으기 위한 과정이도 하다.


그렇기에 마음 가장 밑바닥에 있는 깊은 감정들을 꺼내 놓는 이 곡이 잠에 드는 시간을 단순히 꿈속으로 침잠하기만 하는 시간으로 다루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오히려 현실에서 차마 내려놓지 못했던 감정들을 하나하나 다시 꺼내 놓고 오롯이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그 시간이, 회복을 모색하는 시간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해보게 한다.


이 곡을 들으며, 그러한 시간을 거쳐 잠에 든 모두가 내일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을 때 천천히 눈을 뜰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그리고 잔잔한 멜로디 속에 나름의 공감과 위로를 건네는 이 곡이 내게 그랬듯, 불면의 밤을 보내는 이들에게 조금은 더 편안한 밤을 떠올릴 수 있는 힘과 용기로 닿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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