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사람-사랑.
세 단어는 무척 닮았다. 이렇게 직관적으로 관계성을 보여주는 자모음의 조합이 흔치는 않은데. 사랑이라는 단어의 기원에 많은 설이 있지만 나는 세 단어의 속성이 비슷하기 때문에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라 믿고 싶다.
사람은 살아있는 한, 무엇이든 사랑한다. 대상에 마음을 주고, 그 마음에 자신을 비추어보며 활력을 얻고, 존재의 이유를 확인받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삶이 아니겠냐며 미소 띤 얼굴로 책을 덮고 싶지만 아니, 사랑은 죽었다 부르짖는 안헬리카를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사랑을 안다면, 사랑을 한다면 그런 유쾌함보다 살갗을 찢는 고통이 먼저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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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의식과 신랄한 독백의 교차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는 잔혹하고 아름다운 영혼의 투쟁
스페인 출신의 전방위 예술가 안헬리카 리델의 연극 <사랑의 죽음.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 후안 벨몬테(Liebestod. El olor a sangre no se me quita de los ojos. Juan Belmonte)>는 스페인의 전설적인 투우사 후안 벨몬테와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의 죽음(Liebestod)’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작품이다. 독창적인 연극 언어로 현대 연극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안헬리카 리델은 인간의 실존적 고통 과 사회적 문제 등을 탐구하며, 카톨릭 신비주의와 결합된 자기희생적 퍼포먼스를 통해 예술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작품은 사랑과 죽음, 예술과 영성의 경계를 탐구하며 관객에게 강렬한 몰입과 철학적 사색의 순간 을 선사한다. 제목의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는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대담집의 제목 을 인용한 것으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작품에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아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더불어 루마니아의 철학자 에밀 치오란, 프랑스 시인 아르 튀르 랭보 등 다양한 인물과 소재를 무대로 소환해, 비극적인 아름다움과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영적인 여정을 그린다. 정제된 미장센과 광기에 서린 퍼포먼스가 결합된 안헬리카 리델의 무대는 영성과 초월성을 상실한 연극계에 던지는 절박한 외침이자, 관객을 존재의 근원적 질문 앞에 세우는 강렬한 체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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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색채와 포징을 취하고 있는 포스터를 맞닥뜨렸을 때, 오랜만에 다가온 압도감은 상당했다. 경험해보지 못한 형태의 공연일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의 과감함과 놀라움이라니, 공연장을 나서다 다리가 풀릴 정도였다.
샛노란 무대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 저벅저벅 걸어나와 와인을 마시다 자신의 피로 몸을 적시는 한 여성이 있다. 난데없이 자신은 죽고 싶다, 사실은 살고 싶어 죽음을 갈망한다는 역설을 쏟아낸다. 바닥에 드러눕고 성적 행위를 취하기도 한다. 관객들은 놀라고 더욱 말을 잃어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일제히 극장을 메운다. 알 수 없는 공기가 공간을 채우는 동안 안헬리카의 행동은 더욱 대담해진다. 서사를 풀어가는 관습적 연극이 아님을 깨닫던 중, 내 이해의 속도는 상관없다는 듯 저만치 달려나가는 말의 파편들이 머릿속을 무참히 헤집고 나를 채근한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행각들에 사고는 서서히 멈추고 시각만 남아 이미지를 바쁘게 좇은 몇몇의 순간들이 드문드문. 무대 위에 비추는 우리말 자막은 의미를 갖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역설적이며 논리를 잃어가 형상으로만 남는 경험. 살아있음을 아프게 비집으며 죽음으로 영원해지고 싶다는 그녀의 독백은 에밀 치오란에게서 일부 기원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는 일이란, 스스로를 버티는 것. 삶의 가치를 현실에 두지 않았던 걸까. 태어남 이전과 죽음 이후에라야 생은 가치를 더 발하게 된다는 에밀 치오란의 말 - 육체를 이탈하여 고통에서 자유로워진 고결한 영혼은 비싼 값을 치뤄야 마침내 조우할 수 있다. 힘든 삶을 택하지 않는 것 또한 큰 값의 기회비용일 테니까. 도시의 화려함과 복잡함 속에서 진공되다 보이지 않는 영원을 좇아 염세주의를 외치는 에밀 치오란처럼, 안헬리카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향하고 싶었던 걸까.
막이 내리고 호흡을 되찾는 사이 서서히 코끝을 자극하는 향. 지각 아래 핵을 향하듯 심연의 끝으로 관객들의 혼을 그녀는 끌어내린다, 혹은 고양시킨다. 제를 지내듯 황소 앞에 서서 당장 그를 무찌르기라도 할 것처럼 뻗어내는 손발이 바쁘다. 투우사 후안 벨몬테를 소환하는 그녀.
후안 벨몬테는 투우를 예술의 경지로 재탄생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무대 위에서 소의 급소를 찌르는데 집중하지 않고 굳건하게 땅을 발에 붙이고 서서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죽음을 바라보았다는 벨몬테. 성난 소와 투우사 사이에 맴도는 긴장감에 오히려 평온한 리듬을 되찾았을 역설적인 쾌감. 소와 인간, 죽임 당하는 대상과 죽음을 집행하는 사자라는 관계성을 초월해 대등한 두 영혼이 존재하는 시공간. 투우에 대해 이런 저런 상상을 하고 있을 무렵, 안헬리카는 도륙을 시작한다.
사랑, 죽음, 예술, 욕망 - 갈망하던 모든 것을 종결하고 싶어.
육체를 채우는 70%의 성분이 물이라면, 정신을 구성하는 100%는 말, 말, 끝없는 말인 것처럼. 게워내듯이 쏟아버리는 그녀의 말에는 철학자, 시인, 비평가, 애호가들이 따라붙는다. 무대를, 관객을, 작금의 예술을 갈가리 찢어내고야 만다. 국가와 사회, 민주주의를 위한 예술만 환영받는다. 배우와 창녀를 택하라면 고민 않고 창녀가 되어 고고함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이 마음껏 슬프고 비웃겠다 말한다. 영혼이 있는 건 후자일 테니까.
영원한 것은 영혼에만 남는다. 그 혼을 위해 살다가도 죽을 수 있고, 죽다가도 살아날 수 있다.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하고 현실의 한계를 초월하려던 트리스탄과 이졸데처럼, 스스로 제물대의 예리한 칼날 위에 올라 삶과 죽음을 맞대어보는 안헬리카.
영감을 받은 작품과 인물들이 교차되며 여러 상징으로 나타나기에, 그들이 잔뜩 펼쳐진 무대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아주 조금씩 이치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머릿속에 물음표와 느낌표가 번갈아 떠오르며 혼란을 헤매던 시간, 그 과감한 몸짓과 괴성으로 안헬리카가 말하려던 것은 무결한 순수였을까?
어떤 말로도 극을 영락없이 납작하게 만드는 것 같다. 온전히 글로 전하지 못하는 그날의 쾌감과 공포가 등줄기에 서늘히 남는다. 영혼을 지키는 것, 그것 외에 구원은 없다는 말이 뇌리에 긴긴 꼬리를 문다. 모두를 이해시킬 마음은 없었을 테지만, 자신의 내장을 내보이며 순수를 갈구하는 영혼은 쉽게 볼 수 없다.
광기 어린 세상을 장막 사이로 슥 열어둔 채 잠시 눈을 감는다.
결론은 알 수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