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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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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가면, 인적이 드문 마당 안쪽으로 깨끗한 건물 하나가 서 있다. 예술의전당은 자주 가는 편이지만, 국립국악원은 이번에 처음 가보았다. 오늘 본 ‘아리아리랑’은 정선에서 발원해 해마다 열리는 정기 공연인데, 이번엔 국립국악원 예악당을 찾았다.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민요 아리랑을 넘버로 활용한 뮤지컬 구성의 공연인데,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1층 로비를 둘러보니 나이대가 단번에 눈에 띄었다. 어르신 관객이 대부분이었다.


안 그래도 친구 하나가 어쩌다 ‘아리랑’ 공연을 다 보러 가느냐고 물어주었다. 그야 나는 아리랑을 좋아하기 때문이라 답했지만, 왠지 덥석 믿질 않는 눈치였다. 아리랑이라 하면 다들 맨 처음 떠올리는 것이 경기 아리랑이라 그게 아무래도 가장 유명하기 때문이겠지마는, 개인적으로는 경기 아리랑보단 진도와 밀양 아리랑을, 개중에서도 송소희 양이 열린 음악회에서 가창한 밀양 아리랑을 제일로 좋아한다. 플레이리스트에 담어 놓고 몇 년간 두고두고 듣곤 하였으니, 이만하면 요즘 젊은이치곤 내 아리랑 좋아한다 말해도 괜찮을 듯싶다. 물론 나는 송소희 씨 팬이기도 하다.


한과 흥이, 설움과 신명이 공존하는 진득한 가락은 이 음악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고유의 흥취인데, 아리랑은 그 상반되는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가리킬 수 있는 하나의 고유어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 정서는 다른 데선 찾아볼 길이 없기 때문에, 아리랑은 반드시 한 번씩 다시 돌아오게 되는 음악이다. 한편 버스에 타서 젊은 친구들 한 가운데에 앉아 이따금 밀양 아리랑을 틀 때마다, 슬슬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피식 웃기도 한다.

 




 

공연의 시작은 적요하고 구슬픈 정선 아리랑으로 시작한다. 첨부한 영상은 공연의 첫 넘버와 가장 유사한 것으로 아리아라리 공식 유튜브에 등록된 클립 영상이다. 정선 아리랑은 이번에 처음 들어보았는데, 어릴 적 듣던 불경의 냄새가 난다. 텅 비어 있는 듯 쓸쓸하고 광막하고도 호젓한 냄새. 고향 집 뒤편엔 첩첩 팔공산이 병풍처럼 서 있었고, 치맛자락처럼 펼쳐 있는 산 중 여느 계곡 가운데에 있었다. 계곡을 따라서는 사찰들이 많았고 그 사찰로 이르는 연등길 군데군데 놓여 있는 스피커로 반야심경 불경이 온종일 울려 퍼지곤 했다. 정선 아리랑에서는 그 불경에서 나는 승복과 향초 냄새가 난다. 그래서 좋았다.


한편 영상을 찾아보느라 아리랑만 100번은 더 들은 것 같은데, 정선 아리랑이라 이름 붙여진 것 중에서도 같은 것이 하나가 없었다. 후렴구의 테마와 전반적인 곡의 정서가 유사한 것을 제외하곤, 음률과 가사가 천차만별이었다. 아리랑이야 대략 익숙하니, 그 종류가 많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일 텐데, 그 종류가 60 여종에 총 3600개 정도의 음악이 구전되고 있다는 것은 미리 몰랐다.


이 노래 저 노래 찾아 듣니라고 정작 리뷰가 많이 늦어졌지만, 그 제각의 맛을 음미하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이게 또 반드시 내가 송소희 씨 팬이라서는 아니고, 다른 정선 아리랑도 듣고서 비교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 밑에 첨부한다. 위의 정선 아리랑과 주제 선율을 일부 공유하지만, 가사도 주 정서의 표현도 가창 방식도 모조리 다른 것이 흥미롭다.

 

 


 

아리랑을 거듭해서 듣다가 보면 문득, 흑인의 영가나 가스펠이 연상되곤 한다. 두 노래는 노동가로서 발원하였고, 비통한 자신의 현실을 노래로서 승화한다는 공통점이 있기에 이 연상은 꽤 흔한 일일 것이다. 한편 아리랑을 통해 노동요를 새로이 생각해보게 되는 지점은 각국의 정서가 각 유별하여 음악이 묘사하는 감정의 결이 다르다는 사실을 넘어, 각 나라의 언어 자체가 지닐 수 있는 감정의 색채와 그 언어의 구개 구조에 따라 분화된 발성의 차이이다.


영어가 복식호흡을 통해 입의 뒤쪽에서 소리를 내 구강 발성의 변화가 용이하고, 자·모음 구성에 따른 조음이 파열음과 파찰음보다는 유음 위주로 구성돼 소리가 유연한 흐름을 지닌 것에 반해 한국어는 흉식호흡으로 입 앞쪽에서 소리를 내고 파열음과 파찰음이 많아 입소리의 변화가 명확하게 분절되는 특징을 지닌다. 우리에게 영어 발음이 어렵고, 영어권 사람에게 우리 말 발음이 어려운 까닭. 


그래서 우리에게는 소울 음악의 가창이 어렵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학창시절 보컬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소울이 잘 안 되는 게 괜한 이유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두 음악이 지니는 비브라토의 차이를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둘 모두 많은 비브라토를 차용하여 노동자들의 한풀이 말을 다른 차원인 예술의 것으로 격상시켰음에 같지만, 그 비브라토의 성질은 완전 판이하다. 


소울 음악의 비브라토가 부드럽고 매끈하여 유려하게 흘러내린다면, 민요의 비브라토는 뚝 하고 가락을 분지르듯 꺾으며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하게 이어진다. 이건 우리 입소리에 걸맞은 비브라토다, 물론 체득하기 요원한 기예이지만 말이다. 정선 산맥의 굽이굽이 굴곡진 물성이 귀에 직접 와 닿는 듯한 소리. 인간의 한과 설움이 소울보다 민요에서 더욱 깊이 와 닿는 것은 이러한 발성 차이 때문이고, 그것이 정서상의 친숙함 뿐 아니라 일상의 말소리와 긴밀하게 발성을 공유하고 있는 까닭이다. 비록 민요를 좋아한다 말할 순 없지만, 이런 이유로 아리랑 듣기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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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덕질의 증명은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고, 공연 얘기를 마저 하도록 하자. 줄거리는 단순하다. 강원도 정선에서 두 남녀가 혼인하고 얼마잖아 사내는 경복궁 증축 공사에 동원되어 젊은 부부는 이별케 되었고, 사내는 큰 돈을 벌었으나 기생에게 홀려 돈을 모조리 빼앗기고 기억마저 잃어버렸다는 설정. 이야기의 구조가 납작한 것이야 얼마든 참작할 수 있지만, 중간중간 서사가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설명과 묘사가 부실한 지점은 몰입을 방해한다. 짧은 공연이기 때문인가, 이야기가 막 단위로 빠져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으면 나도 좋겠다만 내가 서사에 좀 집착하는 편이라, 느껴지는 아쉬움은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대 연출은 만족스러웠다. 왜인지 설명할 수 없지만, 옛 산골을 배경으로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광경은 그 자체로 보기 흐뭇하다. 다시 볼 수 없는 문화 생활의 재현인 까닭인가, 마치 우리가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것, 겪어보지 못한 것에 대한 향수, 고릿한 냄새의 아네모이아가 왈칵 들이친다. 


연출은 보기에 즐거운 것을 넘어 놀라운 지점이 많다. 요즘 공연들이 대개 그렇듯, 뒤쪽 스크린의 영상을 통해 동적으로 배경을 표현하고 아름답게 묘사해내는 것은 꽤 흔한 일이 되었는데, 본 공연에서는 앞쪽의 막을 반투명하게 하여 스크린으로 활용해, 무대 공간의 앞 뒤쪽을 입체적으로 표현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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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증축을 위해 나무 베는 장면이나, 나무 실은 배를 타고 한양으로 넘어가는 장면은 발군의 연출을 보여준다. 뒤쪽 배경에는 새파랗고 두터운 비단 천을 드리운 채 바람에 마구 흔들고, 앞쪽 배경에는 천둥비가 내린다. 사내들이 탄 배는 앞뒤로 꿀-렁 꿀렁 크게 흔들리며 무대를 크게 돌고 있고, 사내들은 뱃전에서 호기로운 뱃노래를 부른다. 험난한 뱃길을 실감나게 표현해낸 장면이었고, 근래 공연에서 경험한 것 중 시각적으로 가장 만족스러운 장면이었다.


위 장면이 본 공연의 시각적 하이라이트라면, 주제의 실질적 하이라이트는 증축 공사 뒤풀이 연회 장면이지 싶다. 풍악을 울리고 신명나게 노니는 장면을 채우는 아리랑은 제 있을 자리를 딱 찾았다는 인상을 준다. 그 요체는 노동요이자 한풀이지만, 그것은 세대를 거듭한 변화를 거쳐 흥겨운 축제에 걸맞은 것으로 승화된 것이다. 하여튼 이 나라 사람들은 시름에 그저 오래도록 빠져 나뒹굴기보단, 그걸 어떻게든 흥으로 끌어올리지 않고는 못 배기나 몰라.

 




 

여러 고장의 유명 아리랑이 메들리 형태로 한 데 묶여 있는데, 이 부분은 청각적 만족을 선사한다. 실지 유튜브를 찾아 여러 아리랑을 들었지만 나도 어디까지나 현대인이기에, ‘국악대마당’에서 느릿하게 뽑아낸 전수 아리랑의 본 모습보다는 이렇게 빠르고 경쾌하게 재해석한 아리랑에서 더 큰 흥을 느낀다. 또한 각각의 개성을 지닌 아리랑을 자연스럽게 이어붙여 두니 이는 자체로 새롭다. 음악은 정선 - 진도 - 밀양 - 강원도 아리랑 순으로 이어지는데, 개중 강원도 아리랑은 조용필 씨 번안본으로 보인다.


여기가 이 공연이 보여주고자 한 하이라이트라는 생각이 든다. 주제 의식을 힘주어 무언가 설파하려는 것도 아니요, 무대 연출의 극치를 선보이려는 것도 아니요, 그저 ‘우리 아리랑, 듣기에 좋-지요?’하고 말하려는 것 같다. 그래, 듣기에 좋았다. 정말이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저 듣기에 좋아서, 연극을 보러 가는 길에도,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도 거푸 들었다. 아 글쎄 그 덕분에 나도 이렇게 10시간을 찾아 듣고, 이런 요-상한 대학 소논문 과제 비슷한 글을 쓰지 않는가.


아리랑은 평소에 즐겨 찾게 되지는 않지만, 접하면 의외로 흠뻑 젖을만하다는 생각을 한다. 고리타분한 옛 노래, 오래된 테이프에서나 살아 숨 쉴 수 있는 음악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도 나이를 먹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사람들의 노력처럼, 끝없이 재해석하고 계승·발전하며 시대를 따라잡고 있기 때문일까. 공연이 끝나고 난 뒤에도, 머릿속에서는 누군가 정선 사투리로 계속 말하는 듯하다. “우리 아리랑, 듣기 좋-지요?” 나는 그렇다, 참으로 그렇다 말하며 송소희 씨 밀양 아리랑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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