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에는 막연하게 공연기획자를 꿈꿨다. 공연업계에 입문하기 전에는 프로세스에 관해 무지했던 터라 처음부터 기획자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연 기획사에 들어간 후 공연기획자, 대개는 프로듀서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대표의 위치에 자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외에서는 리드 프로듀서, 책임 프로듀서,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 등으로 구분을 두지만, 한국에서는 프로듀서라 하면 총괄 프로듀서를 일컬으며 보통 공연 기획사의 대표가 맡는다.
그런 의미에서 공연 기획사에서 일하다가 3년 만에 사표를 내고 직접 제작사를 차렸다는 저자 이성모의 도전은 굉장히 감명 깊게 다가왔다. 공연기획자는 모든 분야의 전문가는 아닐지라도 전문가와 소통하는 데 문제가 없어야 하며, 그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적절히 중재하고 조율할 줄 알아야 한다. 더불어 자신의 의견보다는 다른 이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하기에 넓은 마음과 포용력을 가져야 한다. 그가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공연기획자로 거듭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했을지 감도 안 잡힌다.
저자는 공연기획자를 "예술가들과 관객들이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조율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도서 [무대 뒤에 사는 사람]은 그러한 공연기획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공연(특히 연극/뮤지컬)에 관한 생각, 예술가들과 호흡하며 작품을 만들어가는 삶, 그리고 기획자만이 갖는 고민과 성찰을 유쾌하게 풀어낸다. 특히 무대 뒤에서 흘린 땀과 눈물에 대한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 대한 감사를 표하게 되었다.
저자가 기획한 연극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를 보며 현재의 삶으로도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통해 위로받은 적 있다. 이 책에는 해당 작품의 공연 기획서에서 "지친 청춘들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라는 부분이 소개되었는데, 이러한 기획 의도가 나를 포함한 관객들에게 100%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공연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좋은 공연을 판단하는 가장 큰 기준은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는가이다. 저자는 작품의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매번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태도 덕분에 19년 동안 공연기획자로 살아가면서 연극 <보도지침>, <인계점> 등 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작품들을 기획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20년 지기 친구들은 저자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서 덜 늙었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용기가 좀 더 많아서 덜 늙을 수 있었다는 표현에 싱숭생숭한 감정이 들었다. 나 역시 주변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부럽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었다. 그때는 하고 싶은 일이 하기 싫어지는 게 견디기 힘들다고 괜히 투정을 부렸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면 용기 있는 선택을 한 내가 조금은 자랑스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공연업계의 현실은 여전히 박하고 잔인하다. 남들 쉴 때 일하고 일할 때 일한다. 저자가 "공연기획에 뜻이 있는 학생들을 만날 때가 종종 있는데 언제까지 막연히 돈보다는 꿈이라는 이야기로 사탕발림할 수 있을까. 점차 한계를 느낀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공연업계 구성원들이 일하는 환경과 처우가 조금이라도 개선이 된다면 더 많은 사람이 꿈을 포기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불철주야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한 적절한 보상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에 몸담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공연만이 자신을 숨 쉬게 한다고. 실로 AI가 각광받는 시대에서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장르 중 하나는 공연이다. 다양한 사람이 오랜 기간 합을 맞춰 올리는 공연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처럼 대체 불가능한 사람들로 꾸려진 프로덕션에서는 굳이 기계를 쓸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더욱 희소한 공연은 영원히 대체되지 않고 인간들의 산물로 남아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도서 [무대 뒤에 사는 사람]을 통해 느낀 건 공연기획자는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무모해도 일단 시작하는 것. 저자가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면 생판 초면임에도 직접 찾아가고, 연락하고, 부탁하는 자세를 닮고 싶었다. 심지어 연이 끊어졌다고 생각한 사람에게도 용기를 내어 다시 전화한 모습을 보며 '세상은 용기 있는 자의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는 동갑내기 친구들보다 덜 늙을 수 있었던 이유인 용기 덕분에, 꿈에 그리던 우상 김정민의 콘서트까지 기획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공연이라는 것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요소로 인식될 만큼의 가치 있는 콘텐츠가 된다면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다. 공연을 통해 삶의 질이 나아질 수 있음을 사람들이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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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영상 콘텐츠의 유명세로 전보다 공연에 대한 접근성이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공연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 비싼 티켓 가격과 딱딱한 관람 분위기로 인한 진입장벽은 아직 허물지 않았고, 이를 뛰어넘을 만한 좋은 작품들이 많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니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할 공연이 쏟아짐으로써 더 많은 이들의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