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불행에 기대, 그대 무엇을 보는가 - 붉은 웃음
-
*
본 리뷰는 연극 <붉은 웃음>의
내용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친구와 최근 느끼는 무력감에 관해 이야기하다 청년에게 상처를 주고 희망을 좌절시키는 현 시대의 부조리를 논한 적이 있다. 미디어 속 청년의 모습과 실제 청년의 모습에서 괴리를 느끼며 들었던 생각이 자연스럽게 화두로 이어진 것이었다. 많은 미디어에서는 MZ 세대, 특히 20대 사회초년생을 내세워 이들을 심지가 굳지 않고 사회성이 부족한 젊은 세대로 묘사한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자신이 봐온 유사한 젊은이들에 관한 일화를 공유하기 시작해, 'MZ스러움'에 관해 상당히 많은 의견이 넷상에서 오고 가고 있다. 사실, 사회 생활에 막 발을 들인 단계에 있는 사회초년생의 취약성은 배제한 채 이런 논의가 오가는 것이 늘 불편했다. 이따금씩 이러한 오락거리같은 논쟁의 화제성에 반해 우리가 당장 서 있는 지점에서 겪고 있는 동시대적인 아픔과 삶의 애환에는 관심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씁쓸함을 느낀다.
흔히 청년과 청춘을 떠올릴 때면 꿈, 희망, 끈기, 근성과 같이 미래를 지향하는 무형의 가치가 동반되고는 한다. 실상 몇 년 단위로 발생하는 참사, 녹록치 않은 취업, 보다 높아진 인권 감수성에 발맞춰 주지 않는 혐오 정서의 만연으로 인해 청년은 현재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다.
이런 청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현재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위로다. 한계를 인정하고 현재를 정비하기 위한 쉼을 죄악시하지 않는 관용이다. 취업 준비를 앞두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현재 느끼는 무력감 사이에 잠 못 이루던 요즘, 연극 <붉은 웃음>은 작은 위로가 되어 주었다.
연극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무력감과 공포, 격정을 재현한 배우의 연기에 전율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 또한 두려움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음에도 타인에게 위로를 건네려 애쓰는 배우의 연기에서 나약한 인간의 가장 강한 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올해,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가 고립∙은둔 청년 문제를 알리고 주변인에게 관심을 독려하는 캠페인을 홍보하는 안내 음성을 들었다. 고독사 문제가 청년 세대까지 내려오고 가시화되는 것은 어찌 보면 이들이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에 공감해주길 요청하는 절박한 사인이라 할 수 있다. 2024년, 좁은 방 안에서 생을 마감한 한 청년의 모습을 담은 것은 이러한 죽음에서 의미를 발견해내기 위한 것이었을 터다.
연극 초반, 커튼 위로는 청년이 수기로 작성한 글이 비춰진다. 맥락을 알 수 없으니, 밑도 끝도 없이 자기연민에 빠진 모습을 전시하는 글처럼 보였다. 연극은 누군가의 인생을 쉽게 판단하는 이러한 시각을 연극 초반, 유품 정리사를 통해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유품 정리사가 청년의 일기를 읽다 어떤 구절을 읽고 발작 같은 웃음을 터뜨리는 대목은 타인의 아픔을 보고 되려 비웃는 현대의 비인간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처음에는 영문을 알 수 없었던 그 웃음의 의미를 1904년 전쟁에서 돌아온 청년의 경험과 2024년 미래를 더는 꿈꾸지 못하는 청년의 경험을 경유하면서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곧 '붉은 웃음'이라는 것을 말이다.
'붉은 웃음'은 과연 무엇인가. 연극은 그 질문에 대한 답과의 거리를 천천히 좁혀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연극의 축이 되는 두 청년은 전쟁터에서의 무의미한 살육 사이로 대의가 사라지는 모습과 일상의 투쟁 속 삶의 가치가 무너지는 걸 목격한다.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청년은 방에 틀어박혀 그가 목격한 '붉은 웃음'의 실체를 알리는 글을 쓰려 하지만, 죽기 전까지 그 무엇도 쓰지 못한다. 세상이 지닌 잔인한 진실을 몸소 경험한 그는 필시 참전 이후 세상이 낯설게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색한 행동거지 하며, 말투 하며, 가족들이 그를 광인으로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는 동생의 이름도 부르지 못하고 '동생'이라는 호칭으로 그를 부르며 그저 불변하는 사실만을 호명한다. 그가 살아가기 위해 품었을 꿈과 희망을 처참하게 배반한 세상. 미래를 꿈꾸기에는 세상이 너무나도 참혹했고 믿을 수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실체를 폭로하기 위해 글로 옮기려 해도 그가 느꼈던 공포를 재현하는 것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가족들이 떠난 후에도 동생은 빈 집에 남아 백지를 들고 죽은 형의, 이제는 들을 수 없는 그의 의중을 묻는다.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던 형이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음을 그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와 비교했을 때 현재의 청년은 어떠한가? 전쟁에 비견하는 고통은 모를 것만 같은 그가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어쩌면 그렇게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연이은 실패가 그의 의지를 소진시켰고 자신의 발에 자신이 걸려 넘어지는 상황에서 그는 일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연극을 보는 내내 그가 느꼈을 중압감에 공감할 수 있었고 그것이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는 유품 정리사가 유품을 담아 쌓아두었던 검은 봉지 더미에 기대 죽음의 경과를 경험하는데, 언뜻 보면 그저 쓰레기의 산처럼 보이는 이 무대 장치는 특히 청년의 삶에 대한 여러 의미를 품고 있었다.
온라인 프로그램북에서 본 이 검은 산은 조명의 각도에 따라 얼핏 보면 유골 더미처럼 보였고, 연극 속 청년은 자신의 삶은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쓰레기 봉지 같다고 자조했으며, 검은 봉지에 싸여 그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유품은 당장 갖다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1904년으로부터 약 120년이 지난 현재도 청년들은 다른 방식으로 죽어가고 있고, 더 살아갈 수 있었을지 모를 미래를 맞이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며, 그 생의 면면을 우리는 속속들이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그들을 잊어버린다.
그 쓰레기 봉지가 마치 집의 풍경처럼 묘사되고, 청년이 그것에 기대 누운 모습을 보면서 갖다 버려야 하는 쓰레기를 갖다 버리지 못하는 그들의 우울을 읽었다. 미련처럼 삶을 붙들고 있는, 심한 우울증을 겪는 청년의 모습을 말이다.
고작 한 사람의 삶을 영위하는 것은 이토록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지닌 것들은 혹독한 환경과 가혹한 시련 속에서도 살아가고 싶어한다. 그의 목소리로 읊는 내레이션을 들을 때는 죽음 후에도 그의 영혼이 삶에 미련을 가지고 몸 곁을 맴도는 것만 같았다.
연극의 끝에서는 비로소 붉은 웃음의 실체가 밝혀지는데 이는 바로 창밖에서 나타나 우리에게 생을 포기하기를 바라며 손짓하는 충동이었다. 이러한 충동에 지지 말라고 외치는 그 부름을 들으며, 지금도 외면당하고 있는 외로운 청춘에게 그 외침이 꼭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혹자는 젊은이들이 자기연민에 젖었다 비판하지만, 누군가는 당장 불행만이 보이는 시야를 가지고도 스스로 희망이라는 싹을 틔운다. 우울이라는 정서가 한 세대를 잠식했을지라도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들을 보면 죽지 말라는 말이 목끝까지 울컥 차오른다.
그러므로 오늘도, 내일도 '붉은 웃음'이 우리의 불운한 선택을 보고 웃음 짓게 내버려두지 말기를, 그 살의를 차라리 웃어 넘길 용기가 모두에게 허락되길 바란다.
[서예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