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술과 밤에 얽힌 이야기들 - 술 없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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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라면 누구나 술에 얽힌 이야기 하나쯤 있다. 술을 마시고 섣불리 사랑에 빠진 경험이라든지, 스무 살 때 술을 처음 마시고 한 실수라든지, 그런 건 시간이 지나서도 술자리에 올라오는 단골 안줏거리가 된다.
술은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술을 마시기 위해 혹은 마시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야기도 재밌는 소재가 되고 술자리에서 좋은 사람과 함께했던 추억도 오래 마음에 남는다. 각자마다 사연은 다르겠지만 술이 끼어들면 이야기가 생긴다.
그럼 술과 관련된 이야기를 모아보면 어떨까? 글을 쓰는 사람들이 일정한 주제를 두고 모여 활자로 풀어내다보면 흥미로운 결과물이 생기기 마련인데, 술이라면 다들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가득할 거다. 그런데 아마 나보다 먼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었나보다.
미루고 피해왔던 권태, 고독, 불안 그리고 해방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시간.
누군가에겐 일상, 누군가에겐 비일상인 ‘그 밤’에 바치는 여섯 개의 진담.
출판사 글항아리가 지난달 18일에 펴낸 책 ‘술 없는 밤’은 밤과 술에 대한 6명의 진솔한 기록을 담은 에세이다. 이 책은 작가, 번역가, 싱어송라이터, 영화감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풀어놓는 이야기를 담았다.
서로 다른 이력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지 글의 주제나 톤도 다채롭다. 술에 이끌려 ‘멜랑콜리도 없는 얼굴을 좋아하게 되고’, ‘술로 밤을 유예’하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치킨에는 맥주가 아니라 무조건 콜라’를 외치거나 ‘술 없는 밤을 의연하게 건너기 위한’ 사유도 있다.
작가들의 글은 술로 시작하고 술의 언저리를 배회하면서도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각자만의 그물로 하고 싶은 말들을 포획해나간다. 이 지점이 책이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포인트다. 책 속의 표현을 빌려 비유하자면 “술의 효험 중 하나는 나를 엉뚱한 곳에 데려다 놓는다는 것”이다. 분명 시작은 술자리였지만 어디 기억도 안 나는 곳에서 추억과 흑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일이 빈번한 우리의 삶처럼 이 책도 술로 시작해 더 넓은 이야기로 자꾸만 그 지평을 넓혀나간다. 책 속의 이야기들이 독자를 어디로 데려다 놓을지 기대하게 된다.
그가 어디서 구해온 두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오이소다를 건넬 때, 너무 순진하게 웃을 때, 집에 이런 게 다 있고 그게 그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생활용품점에서 사온 고리를 벽에 일렬로 달아놓았다는 걸 알았을 때, 수저를 놓을 때는 수저받침을 쓴다는 걸 알았을 때, 그 모든 사실이 지금 그가 어둠 속에서 내보인 결함 있는 얼굴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12쪽, 서한나 「어째서 그는 멜랑콜리도 없는 얼굴을 좋아하게 됐을까」
그 밤에 세계는 없다. 타자도 없다. 모두 소진되었다. 어떤 위로도 없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나르시시스트의 욕망만 소리 없이 울부짖고 있다. 추워요, 외로워요, 잘못했어요, 안아줘요, 괜찮다고 말해주세요, 제발. 세계의 기표에 유혹당해 끝까지 달려 들어가다 맞닥뜨린 그 막다른 밤. 도망치는 것 말고는 대처할 수 없는 절대의 무에 다다른 밤. 미치거나 죽고만 싶으나 미칠 길도 죽을 길도 막힌 밤, 퇴로는 없다. 고통뿐인 영혼에 맨정신으로 영원히 화답해야 한다.
34쪽, 김선형 「술 없는 밤」
삼 개월 수습 기간이 끝나는 날 회사를 관뒀다
완벽하고 완전하게 적응 실패 역부족이었다
먹지 않던 막걸리를 찾아 먹고 또 먹었다
온 세상이 무서운 전염병으로 초토화됐고
새벽마다 구역질로 잠을 잘 수 없었다
아침 해는 그야말로 정말이지 나를……
91쪽, 김일두 「믿고 선택한 건 이것이다」
뒤풀이엔 사람이 많다. 음악인 외에도 공연을 함께 만든 스태프도 있고, 공연을 보러 온 업계 사람도있고, 음악인의 친구들도 있고, 건너 아는 그냥 배가 고프고 술이 고픈 누군가도 있다. 술이 좀 돌면 사람들은 반갑고 싶어한다. 걔 지금 뭐할까. 걔 홍대 살잖아. 걔는 망원 살잖아. 네가 연락해봐. 그렇게 계속 사람은 불어난다. 이 뒤풀이와 저 뒤풀이가 합쳐진다. 그런 술자리가 매일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어서 한때의 나는 굳이 약속을 잡을 필요도 없었다. 뒤풀이가 아니어도 공연이 없는 날은 적적해서 마시고, 일이 많은 날은 스트레스가 쌓였으니 마시고, 일이 잘 안 풀린 날은 갑갑해서 마시고, 아무것도 없는 날은 무료해서 마시고, 공허해서 마시고. 누군가는 반드시 술병을 잡고 있으니까.
144쪽, 오지은 「술 있는 술 없는 밤」
팀장이 불만을 표했다. 그러면 보통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 맥주를 시켜서 먹는 둥 마는 둥이라도 하는데, 그날따라 짜증이 확 났던 기억이 난다. 이유까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치콜 조합이 너무 먹고 싶었거나, 맥주를 먹고 싶지 않은데도 맥주를 먹어야 하는 일이 그날 유독 부당하게 느껴졌거나, 아니면 팀장이 꼴 보기 싫었거나. 콜라 먹으면 안 돼요? 내가 되물었다.
158쪽, 오한기 「나의 즐거운 알쓰 일기」
이불 속이 생활 반경의 전부였던 나는 바깥의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웠다. 그런 나라도 술이 있다면 결국에는 이렇게 새롭고 생경한 순간에 이르는 것이었다. 탁 시동이 걸려 발산하게 되는 술의 효험 덕에 어색한 선배, 어색한 사람들, 모르는 것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것이 술의 맛. 맛도 간지도 더 월등한 닥터페퍼는 줄 수 없는 맛. 불쑥 솟아오르는 맛이었다.
186쪽, 김세인 「술이 덜어진 몸은 느슨해졌고 틈새가 벌어지더니 어느 순간 북- 하고 갈라졌다」
밤은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술 있는 밤과 술 없는 밤.
술과 밤은 왜 맞닿아 있을까. 밤이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밤에 떠오르는 마음에는 먹이를 주지 말라지만 어둠이 찾아오면 자꾸 속수무책이 된다. 잠들기 싫어 시간을 미루다보면 지나간 장면들이 떠오르고 후회와 피곤이 밀려오고 소득 없는 상념에 빠져들게 된다. 그럴 때 술은 견딜 수 없는 것들을 조금은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윤활유가 되어주고 때로는 사랑에 빠지게도 한다.
반대로 술이 싫은 날도 있다. 원치 않는 사람과 불편한 자리를 해야 하기도 하고, 어지러움과 숙취가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니까. 술에 인생을 허비하는 듯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 방증하듯 술에 담긴 이야기만큼은 재밌기 마련이다. 재밌는 일 좀 없나 싶을 때 친구가 ‘어제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 이야기해준다. 모여’라고 말하면 신나게 귀기울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도 잠시 여기 모여보라며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다.
술이 있거나 없었던 6명의 밤에 대한 이야기 <술 없는 밤>은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은 얼핏 금주를 권하는 책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보다는 있던 것이 없어진 밤의 공백, 그 어두운 빈칸과 나란히 눕고자 하는 사람들의 용기를 환기하는 책이다. ‘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 없이 세계와 직접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배짱을 직시하는 책이다.
- 책 소개 중에서
[김인규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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