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책을 왜 읽어? - 유식해 보이니까! [문화 전반]

우리 삶에 '지적 허영'이 필요한 이유
글 입력 2024.10.16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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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0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이후 국내외에서 그의 소설들이 순식간에 매진돼 품절 대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매년 전 세계 작가 중 문학적 공헌이 큰 한두 명에게만 수여되는 권위 있는 상인 데다가, 아시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수상한 터라 더욱 이목을 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 김대중 대통령에 이어 24년 만에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되면서 전국이 떠들썩하다. 수상 이후 엿새 만에 국내 누적 판매량이 무려 100만 부를 넘었다고 한다.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을 드높인 작가에게 뜨거운 찬사가 쏟아지는 동시에, 평소 문학에 관심이 없던 이들까지 대거 그의 소설을 구매하는 열풍이다.

 

그런데 일명 ‘문학 알못(문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가 단지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강 작가의 저서를 구매하는 이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평소에는 독서를 하지도 않았으면서 수상 소식을 듣고 그제야 관심을 갖는 것은 진정한 지성인이 아니며, 그저 ‘나도 그 책을 읽어봤다’는 것을 뽐내려는 과시욕이라는 것이다.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1).jpg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예는 한강 작가에게 돌아갔다.

©Nobel Prize Outreach

 

 

그러한 비판적인 의견을 접한 후에 처음으로 들었던 생각은 ‘그게 왜 문제일까’였다. 노벨상을 탔다는 이유로 그 작품을 찾아보는 게 문제라면, 고전 명작들을 다른 사람들이 명작이라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찾아 읽는 것도 문제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그러한 의견이 합당하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오히려 노벨문학상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긍정적인 효과가 크다는 입장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한강 작가뿐 아니라 문학 전반에 관심을 가지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출판사를 비롯해 관련 업계에는 이러한 일시적인 관심만으로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두 번째로 들은 생각은 ‘우리는 왜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유명하다고 하는 것에 집착할까’라는 의문이었다. 사실 비단 이번 한강 작가의 소설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흔히 ‘교양’으로 치부되는 문화생활의 대부분은 ‘전문가들이 훌륭하다고 하는 것’ 내지는 ‘남들이 유명하다고 하는 것’을 향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생활을 하게 되는 동력은 다름 아닌 지성인이 되고 싶다는 ‘허영심’에서 비롯되지 않나 싶다.

 

일례로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할 때도 남들이 모두 간다는 명소를 위주로 관광하는 경향이 있다. 각종 문화 유적지와 박물관, 미술관 등을 막상 방문했을 때 자신이 그 의미와 가치를 충분히 납득하지는 못하더라도, 그저 그곳이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고 보러 가는 것이다. 왠지 그런 것들을 향유해야 자신도 무언가 ‘있어 보이고’, ‘교양 있는 사람’ 같으니까 말이다.

 

 


허영 가득한 문화생활


 

사전에서 ‘허영(虛榮)’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자기 분수에 넘치고 실속이 없이 겉모습뿐인 영화(榮華), 또는 필요 이상의 겉치레’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그 정의에서도 드러나듯 대개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된다.

 

실제로 필자 역시 스스로 허영이 심한 것은 아닐까 고민한 경험들이 있다. 가령 난해한 고전 문학 또는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현대 음악이나 현대 무용 같은 것들을 접할 때 주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내가 받아들이는 수준과 그 대상들의 수준 사이에 괴리가 크다는 것을 느끼며, 대상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러한 문화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것은 그저 나의 허영심에서 비롯된 자기만족일 뿐 아닐까 싶었다. 어려운 작품들을 보고 실제로 머리에 남은 것은 별로 없는데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감상했다고 말할 때, 속으로는 허영을 자각하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유명 박물관 앞에서 한 시간씩 기다려서 입장하고, 모나리자와 같은 세계적 명화를 보기 위해 기나긴 줄을 기꺼이 기다린다. 그런데 막상 그 예술품들을 마주했을 때 무엇이 그토록 다른 작품들보다 훌륭한 것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그저 사진만 남기게 될 때,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작품들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할 때, 내가 그토록 시간과 돈을 투자해 가면서 그곳을 간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과연 무엇을 좇은 것이었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공연의 경우에도, 좋은 공연을 어렵게 예매해서 기대에 부풀어 갔다가도 피곤한 날들에는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고, 그럴 때면 나 자신이 무척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이 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내가 그저 ‘나는 이런 공연을 보는 사람이다’라는 겉멋에 든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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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 중 바그너의 <파르지팔>.

장장 5시간이나 소요되는 대작을 처음 보게 되었는데 몸이 안 좋아 공연 내내 졸았던 기억이 있다.

©최민서 에디터



 

“허영이 없으면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없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러한 ‘지적 허영심’이야말로 진짜 지성인으로 거듭나는 데 시작이 되는 발판이지 않을까. 실은 잘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접하다 보면 자연스레 관련 지식이 조금씩 쌓이고, 견문이 넓어지고,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더욱 다양한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생기며, 해당 분야에서 흥미를 발견한다면 그것이 새로운 취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는 일종의 자부심을 가지게 되면서 자존감이 높아질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비록 지적 허영심에서 시작되었더라도 지속적으로 좋은 문화를 향유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결국 성장할 수밖에 없다. 영화평론가 이동진 역시 “오늘은 짐 자무쉬 영화를 보러 가서 자고, 다음날은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보면서 잤더라도, 졸지 않고 본 5분씩이 쌓이고 쌓이면서 어느 순간 도약의 순간을 경험해요. 훈련이 되니까요.”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껏 수많은 공연을 보면서 공연에 집중한 시간 못지 않게 졸은 시간도 많았던 내게 ‘그래도 내가 헛된 짓을 하지는 않았구나’ 하고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합리화일 수도 있지만 그간 공연을 보면서 절반을 졸았다고 해도 나머지 시간들이 조금씩 축적되었고, 그 결과 이제는 제법 어려운 작품도 흥미를 가지고 감상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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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지적 허영심을 나타낸 그림.

©ChatGPT

 

 

또한 이동진 평론가는 “자신의 정신의 깊이와 부피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래서 영화든 음악이든 책이든 즐기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빈 부분을 메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지적 허영심”이라고 정의하며 “문화에서는 허영이 필요하다. 허영이 없으면 문화적으로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 평론가는 '긍정적 의미의' 허영심에 대해 이야기한 듯하다.

 

물론 본인의 수준에서 너무 벗어나는 것을 겉으로만 흉내 내려고 하다가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만 커져서 결과적으로 자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또한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그것을 알면서도 직시하지 않고 남들에게 아는 척 행세하기 위한 허영은 좋지 않다.

 

그러나 적절한 선에서 자신이 교양 있는 사람임을 과시하고 싶어 하면서 지적 허영을 건강한 방식으로 발현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조금 겉멋이 들었더라도, 스스로는 자신의 위치를 지각하고 그것과 지적 이상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로서의 허영은 외려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지적 허영’이 갖는 의미


 

하도 훌륭한 고전이라고 해서 야심 차게 읽어 봤는데 지루하기만 하고, 세기의 명화라고 해서 봤지만 솔직히 무엇이 그렇게까지 특별한지 잘 모르겠고, 현대 미술을 보니 ‘나도 저 정도는 그리겠다’는 생각을 해본 경험이 다들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단계에 계속 머물거나, 자신과 해당 분야가 맞지 않다고 생각해 더 이상 시도하기를 그만둘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처음에 그러한 경험을 했더라도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수 차례 시도해 보는 것, 작품의 의미가 도저히 와닿지 않아도 일단 끝까지 한번 읽어 보는 것일 테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당장 지적 수준이 크게 높아진다든가 하는 눈에 띄는 변화는 없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언젠가 다시 시도해 봤을 때 진일보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혹은 일상을 살다가 어느 날 문득 그 내용이 큰 통찰을 주는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격변하는 사회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느린 속도의 지적 성장, 눈앞에 결과물이 빨리 나타나지 않는 것에 대한 투자에 인색해진 것 같다.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실용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도파민을 자극하는 수많은 콘텐츠들을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인문학의 중요성과 메시지가 퇴색되며, 창의성을 자극하는 예술에 투자하는 시간과 돈의 가치가 폄하되기 마련이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그보다 당장 눈 앞에 놓인 시급한 문제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지적 허영심’은 비난 받을 것이 아니라 귀한 것으로 칭송되어야 할 대상이며, 지양되기보다는 ‘지향’되어야 할 덕목이다. 많은 이들이 건강한 방식의 지적 허영심을 통해 기존의 자신의 세계를 부수고 새로운 세상과 만나기를, 그리고 그것이 천천히,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사회 전체에 선순환을 일으키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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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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