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수많은 일러스트의 향연, 다채로운 세계에 잠시 머물다 - 서울일러스트레이션 페어 V.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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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사이에 코엑스만 두 번을 갔다. 한 번은 서울국제도서전, 다른 한 번은 서울일러스트레이션 페어 때문이었는데, 이미 몇 권의 책을 사버려 통장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책도 마음의 양식이고, 엽서와 스티커도 마음을 울리는 즐거움이니 단 하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역시 어릴 적에 스티커 사 모으던 버릇은 어디 가지 않나 보다.
서울일러스트레이션 페어(이하 서일페)는 각양각색의 일러스트레이션을 한자리에서 접할 수 있는 전시로, 지난 7월 4일부터 7월 7일까지 나흘간 코엑스 C홀에서 열렸다. 상상 이상의 인파에 힘 없는 종잇장이 된 기분이었지만 활력은 작가들의 그림이 채워줄 것이다. 실제로 코엑스를 나선 이후의 삶에서도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유난히 인상적이었던 작가의 부스에 대해 말해보도록 하겠다.
누리 작가(@noorie.watercolours) - 친구의 이름과 똑같아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심지어 코엑스 C홀 입장문 바로 코앞에 있어서 서일페 투어는 여기서부터 시작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특히 부스의 정중앙에 반짝거리는 전등은 사실상 신호등이었다. 잠시 머물다 가라는 신호. 그래서 잠시 멈췄다가 다른 부스로 향했다.
회전목마, 남산타워, 초콜릿 박스 등 일상을 우표 모양으로 담아냈다는 점이 기억에 남았다. 정성들여 고른 편지지에 편지를 쓰고, 우체국에서 우표를 사서 엽서에 붙이는 모습이 그려지는 그림이었다. 우표를 수집하던 세대는 아니지만 우표는 일상의 순간을 특별하게 기념할 수 있을 것 같아 괜히 낭만적이기도 하다. 그날 서일페 현장에서 우표 붙인 편지를 떠올리게 하는 그림은 누리 작가의 그림이 유일하지 않았을까? 우리네 삶의 귀퉁이도 우표 같기를.
엘무늬 작가 (@elmunuy_drawing) - 인스타그램을 둘러보다가 그림을 바로 저장하면, 그 작품은 꼭 엘무늬 작가 것이었다. 빛을 묘사한 그림이 으레 그렇듯, 엘무늬 작가의 그림에서도 따뜻함이 느껴졌다. 조각처럼 찬찬히 부서지는 빛보다는 어깨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아 토닥이는 손길과도 비슷한 부드러움. 엘무늬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괜히 궁금해지기도 했다. 일상에 녹아드는 온기와 눈이 편안해지는 자연의 조화에 홀린 듯이 엽서를 샀는데,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도밍 작가(@dom_doming) - 동화책을 읽으며 즐거워하던 어린이는 이제 없어도, 마음 한편에 환상을 간직한 어른이는 있다. 몇 년 전, 삭막한 인터넷 세상에서 도밍 작가의 이오환상곡을 발견하고서 그대로 빠져들었다. 이오환상곡은 특유의 짙고 푸른 색감과 신비로운 세계관도 매력적이지만, 이야기의 언어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눅진해서 계속 읽게 된다.
올해 새로 공개된 이야기는 새카만 잉크 속에서 태어난 까마귀 요정 카유와 마녀의 이야기로, 현장에서도 만나볼 수 있었다. 도밍 작가의 부스만큼은 신화와 설화의 경계 안에 있는 듯했고, 단순히 판타지풍의 예쁜 그림이 아니라 이미 구체화된 텍스트 같았다. 이오환상곡을 몽환적인 그림으로만 뭉뚱그릴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 점에 있지 않을지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탭탭탑탑 작가(@taptaptoptop) - 가장 오랫동안 머무른 부스다. 현장에 귀여운 그림은 너무나도 많았지만, 이상하게 탭탭탑탑 작가의 그림에 계속 시선이 갔다. 그림의 주인공 토끼는 책상 스탠드를 켜둔 채로 글을 쓰고, 안경을 벗어두기도 한다. 몇 호선인지 모를 지하철을 타고, 차를 끓여 마신다. 그리고 오리, 고슴도치 등 동물 친구들과 함께 숲을 거닐기도 하는데, 무해한 다정함이 내게로 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마침 작가는 만년필로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고, 그림을 구매한 관람객에게 편지도 함께 건넸다. 담백한 그림이 정갈한 말을 많이 닮아 있어 신기했고, 글과 책이 맞닿아 있는 그림을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두 시부터 여섯 시까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여러 부스를 돌아다녔다. 막연하게 좋아하던 취향에 구체적인 이름을 붙이고, 생소한 취향은 언젠가 다시 만날 이름으로 남기고 왔다. 각각의 부스는 작아도 그 안에 담긴 고민과 열정, 시간만큼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개성 넘치는 그림이 가득한 서울일러스트레이션 페어, 올해 겨울 12월에도 예정되어 있으니 꼭 가보기를 권한다.
[이유빈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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