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효율의 시대에 LP판의 먼지를 터는 행위 [음악]

140g으로 느리고 두껍게 취향을 말하다
글 입력 2024.05.16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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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버의 미키마우스 mp3가 첫 애착 음향 기기였던 나는 디지털 네이티브다. 그러나 음악에 있어 LP가 어색하지는 않았다.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아버지는 LP판을 가득 모으셨고 서재 책장의 아랫줄은 그 콜랙션을 위한 장소였다. 어떤 마음으로 그것들을 모으셨는지도 모를 천진난만한 나이에 조마조마 떨던 아버지의 눈앞에서 먼지를 후후 불어 LP판을 턴테이블 위에 두던 기억도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랜만에 자취방을 나서 본가에 갔더니 커다란 TV가 거실에 들어서 있었다. TV 옆에는 소리를 섬세하고 입체적으로 귀에 전달해주는 착용감이 부드러운 아이보리 색 헤드폰이 있었다. 밤늦게 층간소음의 걱정 없이 넷플릭스 드라마들을 즐길 수 있더이다 - 만족스러운 소비에 대한 어머니의 후기였다. 밤 10시, 고요한 거실에는 헤드폰을 쓰고 요란한 마음으로 드라마를 정주행 하는 부모님께서 앉아계셨다. 케이스가 닫힌 턴테이블 위에는 달력이 올라가 있었고 나는 에어팟으로 음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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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해왔고 이 순간에도 발전하고 있다. ‘더욱 편리하고 디테일하며 웅장한’ 소리를 향한 가속은 줄어들 생각이 없다. 디바이스는 점점 가벼워지고 이를 통해 들리는 소리는 빽빽하고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해지고 있다. 음악을 선정하는 과정 역시 간소화됐다. 과거 나의 데이터를 통해, 혹은 키워드를 중심으로 수많은 음악이 추천되고 이를 듣기 위해서 우리는 귀에 그저 소형 스피커를 꽂기만 하면 된다. 10초 - 에어팟을 꽂고 손으로 플레이 버튼을 누르기까지, 음악을 듣는 과정은 극도의 효율성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정확히 반대되는 아날로그의 상징, LP판이 다시 등장했다. 매해 11월 개최되는 서울레코드페어는 2011년 2천여 명의 방문객 수에서 시작해 2020년에는 최대 2만 5천 명을, 2023년에는 1만 5천 명의 방문자 수를 기록했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시류를 거스르고 음악을 두껍게, 천천히 듣기로 마음먹었다. 


아날로그의 길을 택한 순간 우리는 수많은 추가적 단계를 밟게 된다. 지름 12인치가 되는 이 바이닐 판을 담기 위해 봉투를 준비하고 들고 갈 수 있는 손을 남겨두어야 한다. 듣는 과정 역시 만만치 않다. LP판을 연주할 수 있는 턴테이블이라는 장비도 필요하고 듣기 전 잡음을 최소화하기 위한 먼지 제거는 필수다. 온도와 압력에도 약하니 세워둘 수 있는 서늘한 장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간다. 그런데도 나는 왜 좋아하는 가수의 LP 발매 소식에 어느새 결제창을 들어가고 지도 어플에는 LP바와 가게들을 슬그머니 저장해둘까.

 

선호를 표현하기 쉬운 세상이다. 좋아요 누르기라는 단순한 행동으로 취향과 관심사를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생산해낸 수많은 데이터와 그보다 배로 많은 새로운 콘텐츠들 사이에서, 그 중 진정 나의 것인 건 얼마나 될까? 단순함에 무게감을 잃는 세상에 LP판이 주는 묵직한 소유의 기분은 되려 새롭다. LP를 안다고 하기에는 부끄럽지만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몇 앨범들의 소유주로서, 각 140g 정도의 존재감으로 휘발되지 않을 나의 취향을 묵묵히 말해주는 LP들은 내 삶에서 단순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무게이다.


LP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LP는 특유의 따뜻하고 두꺼운 소리가 매력이라고 말한다. 물리적인 매체가 마찰되며 나오는 연주를 구현하기까지 더해지는 과정의 노력이 있기에 비로소 그 두께가 꽉 차게 된다. LP는 CD와 다르게 우수한 퀄리티로 담아낼 수 있는 재생 길이에 제한이 있다. LP 한 면 당 18분이 권장되고 이를 넘어갈수록 음질에 손상이 생기게 된다. 또한, 고역과 저역의 한계가 존재하는 이 물리 매체에 소리를 온전하게 담기 위해서는 CD나 온라인 재생을 위한 마스터링 이외의 작업이 필요하다. 굿즈의 역할만을 하기 위해 CD 마스터링을 그대로 가지고 와 옮기는 LP들도 있지만, 아직도 아날로그만의 정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장인 정신의 아티스트들이 존재한다. 그런 비하인드를 알고 난 뒤 LP를 접하게 되면 이 아날로그의 두께 너머 아티스트와 함께 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들은 말한다 - LP는 입문하기에 진입 장벽이 있는 취미라고. 그렇지만 그 물리적 특성의 비효율만큼 더욱 가까워지는, 길들임의 취미가 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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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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