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회복, 아픔이 추억이 되기까지 필요한 시간 [미술/전시]

뮤지엄헤드 기획전 《인공 눈물 Artificial Tears》
글 입력 2024.05.09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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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수단이 되는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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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건이 할퀴고 남긴 아픔의 감각이 점차 흐릿해지고, 그 기억이 여운으로 바뀌는 데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장의 세상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입은 상처를 황급히 봉합하는 데 급급할 뿐이다. 그러나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를 손에 넣으려면 길잡이를 눈앞이 아닌 등 뒤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의 대안을 찾기 위해, 종종 기억의 목적을 기록이 아닌 발견에 둔다.

 

지난 4월 막을 내린 뮤지엄헤드의 기획전 《인공 눈물 Artificial Tears》은 그런 발견을 꾀하며 애도를 지속하는 기억의 물질로서의 예술을 살핀다. 나아가 '기록의 방식'이 어떻게 ‘기억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눈물'이란 단어도 인간 감정의 지속성을 은유한다. 그러나 '인공' 눈물이라면 그 의미를 재차 고민하게 된다. 제목이 뜻하는 바는 눈물을 억지로라도 흘려줄 수 있는 누군가일까, 아니면 쉽게 말라 버리는 이 시대의 건조한 눈물방울일까.


이번 전시의 의미는 전자에 가깝다. 때로는 차가워 보이는 동시대 미술의 화법으로 전하는 일종의 위로이며, 시대의 공허한 눈물에 심경을 담는 방법을 고민한 결과다. '작품'보다는 ‘작업'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자유로운 실험으로 제안하는 기억의 방법은 다소 거칠거나 냉소적이어 보인다. 하지만 그 외피 너머에서 그리워하는 것은 결국 인간성이라는 온기다.


 

 

가상 세계 너머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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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바깥의 인공 연못 위로 세워진 가로 4미터, 세로 3미터가 넘는 대형 배너는 추수의 작품으로, 작가가 슈투트가르트 국립조형예술대학교에서 재학하던 시절에 제작한 작업이다. ⟨나는 이곳을 졸업하는 것이 부끄럽다⟩(2022)라는 제목이 달린 이유는 이 작업이 당시 유럽연합 외 국가 출신자들의 등록금을 인상했던 학교 측을 향한 맞대응이었던 까닭이다. 소속집단의 내부를 향해 가장 강력하게 반기를 들 수 있는 방법으로, 졸업 작품이라는 지극히 형식적인 수단을 택한 결과다.

 

배너 속 민머리의 3D 캐릭터는 굵은 타이포로 새겨진 강렬한 문장 뒤에서 눈물을 폭포처럼 쏟으며 오열하고 있다. 그는 작가의 분신인 ‘에이미’로, K-Pop 작곡가로 메타버스 세계관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버추얼 인플루언서다. 하지만 밤이 되면 가면을 벗어던지고 솔직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며 미술계에서 활동한다. 이 작품에서도 에이미는 작가의 분신으로서 그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표출한다. 실제로도 학교 구성원들 사이에서 토론의 장을 촉발했던 이 작품은 이곳에서도 새로운 화두를 건드린다. 배경의 눈 시린 핑크색과 파란색이 아롱대는, 인공적인 가짜 눈물 너머에는 현실 세상의 암적 그림자를 몰아내려 애쓰는 진짜 눈물이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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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전시장 모퉁이의 윤희주의 ⟨실리 힐리 밀키 쇼⟩(2023)는 가상공간에 실체성을 부여하지 않고, 현실로부터 유리될 수 있는 도피처로 삼는다. 하지만 그 도피처는 현실의 해소로 종결되지 못하고 결국 현실의 상실로 이어진다. 영상 속 화자는 열렬히 추종했던 락밴드 ‘힐리 브리티쉬’의 해체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그는 팬 활동을 하던 트위터 계정을 삭제하고, 가상 세계에서 ‘zizi’라는 이름의 아바타로 두 번째 삶을 시작한다. 새로운 몸과 새로운 이름을 입은 새 자아는 낯선 세계를 달리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힐리를 추억한다. 얼핏 자연스럽게 들리지만 군데군데 비릿한 기계음이 섞인, 힐리가 지지했던 칸예의 ‘응급실’ ai 커버곡을 감상하면서 말이다.


캐릭터는 3D 그래픽으로 구현된 노을을 바라보며 조금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이곳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를 고민한다. 그러면서 현실의 무너짐에 비례해 더욱이 공고해지는 가상 세계의 논리를 떠올린다. 가상 공간은 “우리가 살고 싶은 세계를 만들어줄 것처럼 보였”지만, 이곳은 이용자들의“연대를 알고리즘으로 착취해 막대한 서버 비용으로부터 도망”친다. 슬픔이 채 가시지 않은 추억이 얕은 메타버스의 세상으로 진입할 때 남는 것은 오로지 불쾌뿐이다. 비물질 세계가 물질 세계를 대신하려는 어줍잖은 시도는 성공할 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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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방지 사진 공모전을 위해서는 매년 신선한 산불이 필요하다.”

“전쟁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다.”

 

  

양지훈의 ⟨테이큰⟩(2023) 또한 현실을 표상하려는 미디어라는 프레임의 실패를 논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오늘날의 미디어는 더이상 현실의 부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이 종종 미디어의 부산물이 된다. 이 점에서 미디어가 거둔 결과는 사실 실패가 아니라 승리일지도 모르겠다. ⟨테이큰⟩은 전쟁이나 산불 등 비극적인 참사 중 극적인 스펙터클을 포착하려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스펙터클을 오히려 유도하려 드는 카메라의 폭력성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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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에 삽입된 문구처럼 “이미지 민주화”의 시대가 도래한 덕에 이미지의 생산과 재생산의 속도는 통제할 수 없게 됐다. 프레임 속 풍경은 분명 현실에 근거함에도 연출 의도가 개입될 여지가 다분하다. 무언가의 수단으로 표현되지 않아도 현실은 존재하고 사건은 발생하며, 그 깊숙한 내부에는 일축할 수 없는 복잡한 이해관계와 전후상황이 자리한다. 반면 이미지나 영상으로 '표현되는' 실제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dox〉(2023) 연작 또한 그 성급한 왜곡을 직관적인 그래픽으로 표현한다. SNS에 범람하는 출처 불명의 숏비디오들은 저작권 문제를 피하기 위해 화면비가 조정된 채 돌아다닌다. 재가공된 비디오에서 잘려나간 원본의 영역은 고스란히 검은색의 레터박스가 되어 이면의 맥락을 일깨운다.

 

 

 

회화, 감정이 보존되는 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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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작업들은 기술 시대의 매체로 생겨나는 환영에서 현실의 위기를 본다. 그러나 회화로 생겨나는 환영은 오히려 현실의 소환을 돕는다. 회화라는 매체는 현실에서 출발하지만 필연적으로 정제의 과정을 거치면서 현실에 밀착된 환영을 낳기 때문이다. 동시대 회화의 주된 과제 역시도 원본성을 뒤쫓거나 공격했던 옛 시도들을 뒤로하고, 현실과 환영의 모호한 경계에서 저마다의 당위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목하 역시 자신만의 화풍으로 객관적인 실체와 주관적인 기억을 부드럽게 연결 짓는다. 〈눈물의 표면장력〉(2023) 시리즈 속 인물들은 미묘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한다. 갑자기 눈앞에서 플래시가 펑 터지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혹은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감정을 꾹꾹 눌러참으며 상기된 낯빛으로 말이다. 서문에 따르면 작가는 눈물을 삼키던 어릴 적을 회상하며 인물의 표정을 묘사했다고 한다. 그 배경 때문인지, 아니면 미소 속의 뻣뻣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물기 없이 탁한 눈빛이 문득 서글퍼 보인다.

 

사실 그림의 원래 주인공은 작가가 SNS를 통해 알게 된 익명의 인물들이다. 별도로 존재하는 원본의 이미지가 화폭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작가의 개인사가 개입되는 셈이다. 이처럼 통제가 가해지는 것은 초상의 대상뿐만 아니라 표현의 기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엷게 수 차례 쌓아올린 레이어 덕분에 그림에서는 특유의 서늘한 깊이감이 느껴진다. 그 안에 녹아든 신중한 손길은 그림 속 인물의 형태나 색채뿐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차분히 제어한다. 전시실 밖의 ‘에이미’처럼 눈물을 쏟아내지는 않지만, 섬세한 인내 끝에 완성된 화면 안쪽에는 또 다른 색깔의 슬픔이 응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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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희의 〈원래의 땅(course 1)〉(2021)도 일시적인 풍경이 남기고 간 여운을 놓아주지 않고 부단히 자분댄 흔적이다. 가로 4미터가 훌쩍 넘어 한쪽 벽면을 꽉 채우는 이 작품은 작가가 즐겨 산책하던 담벼락을 그린 그림이다. 푸른빛이나 레몬빛, 명도 낮은 잿빛과 불투명한 먹빛까지 넓은 스펙트럼의 안료들은 화면 위로 투명하게 뭉개지며 거대한 풍경을 이룬다. 하지만 그 일부들을 조각조각 나누어보면 저마다의 인상이 각자 다르다. 구름의 명과 암처럼 부드럽게 중첩되는 색감 사이로 군데군데 끼어드는 형태들도 눈에 띈다.

 

미간을 찌푸리고 먼발치에서 가만히 응시하면 상형문자 같은 기호와 구상적인 요소가 문득 스치며 산책길의 공간적 특징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그림 가까이로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어 보면 또 다른 감상이 남는다. 온 시야가 점차 캔버스로 가득 채워지고 눈앞의 풍경에 몸을 맡기면, 산발되기 쉬운 일상의 조각들을 근면히 수집하고 사색을 거듭했을 기나긴 과정에 빠져들게 된다. 공간이 남긴 감각이 화면 위로 되살아날수록, 담벼락의 풍경은 점차 옅어지며 화면 아래로 침닉되었을 것이다. 그 고요한 시간을 돌이켜 재생하며 장소의 여운을 재차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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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화면과 안료를 도구 삼을 때는 작은 감정에도 소홀할 수 없을 듯하다. 영감이라는 씨앗이 시각화되는 모든 과정의 책임자로서, 매 순간 찾아오는 개별적인 감각에 충실히 반응하게 될 것만 같다. 박세진의 회화 속 풍경에서도 그러한 자세를 짐작하게 된다. 2020년에 시작된 〈여름_너〉 연작의 세 번째 작품인 ⟨반나절⟩(2024)은 강원도 원주의 한 평범한 여름날을 그린 그림이다. 이번 신작은 어둠이 드리워지기 직전인지 직후인지 모를 모호한 시간대의 거리를 담고 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담았던 앞서의 두 연작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이번 작품은 작가가 강원도 원주의 레지던시에서 생활하며 겪은 에피소드에서 출발한다. 밤마다 창밖을 바라보았던 그는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밤, 평소라면 인적이 드문 길가에서 누군가가 지나가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 시점에서 출발해 이전의 시간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작업한 시리즈가 〈여름_너〉 연작으로, ⟨반나절⟩은 그 날의 낮 시간대를 재구성한다. 인도 위로 한 줄기 햇살이 비추었는지 중앙의 나무 위로 문득 화사한 빛이 머무른다. 하지만 그 너머의 짙은 먹구름이 풍경의 조도를 낮추고 화면을 어둠의 기운으로 물들인다. 비가 내리기 직전, 공기 중의 습기를 머금었을 아스팔트 도로의 빛깔도 유독 짙은 먹색이다.

 

작가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현장을 거듭 관찰하며 수 차례의 드로잉 작업을 거친다고 한다. 당시에 순간적으로 감지된 감각과 공기를 화폭 위에 되살리기 위해 필요한 과정일 것이다. 그 준비의 시간이 이 그림에서 유독 뜻깊은 것은 이번 작업이 직전의 연작 이후로 약 4년만에 발표된 까닭이다. 드디어 세상 밖에 나온 풍경 위로, 그날 이후의 새로운 기억들이 축적되었을 것이다. 어떤 자극이 완전한 소화를 끝마치기까지, 곱씹기의 횟수에 적절한 정답이란 없다. 한 번 새겨진 기억은 부여된 의미의 깊이에 따라 순식간에 휘발되기도 하지만, 예기치 못하게 긴 세월을 끈질기게 버텨내기도 한다. 이 그림 역시도 후자의 기억을 완결하기 위해 제 속도를 지켜낸 결과물이다.

 

 

 

표면 위로 남은 임의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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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기의 〈진리〉(2024)도 기존의 작품 위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며, 작업의 지속성과 더불어 새로운 고민의 흔적을 담은 작업이다. 마감 처리된 표면 너머로 비쳐 보이는 글자와 텍스쳐는 본래 〈지혜〉라는 제목을 지녔던 작품의 일부다. 말하자면 '지혜'에서 '진리'로의 진화다. 단어의 위용처럼 작품의 스케일도 거대한 데다 눈길을 잡아끄는 밝은 노란색 때문에 마치 전시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천장의 와이어에 매달려 겨우내 제 몸집을 지탱 중일 뿐, 속은 텅 비어 있다. 잔뜩 구겨진 표면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작품의 재료는 종이다.

 

작가가 작업 초기, 굳이 종이와 스카치테이프라는 연약한 재료를 택했던 이유는 다름아닌 '경제성'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조소 작업을 위해서는 값 나가는 재료뿐만 아니라 노동에 가까운 작업 과정, 그리고 별도의 작업 공간까지 필요하다. 그러나 종이와 스카치테이프는 그러한 부담을 최소화할 뿐더러 작품에도 가변성이라는 새로운 물성을 부여한다. 그 덕에 '진리'는 전시장 가운데서 있는 대로 몸집을 부풀리고 있지만, 역으로 얼마든지 축소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제목이 지시하는 불변의 가치에는 상응하지 않는다. 구겨졌다 펼쳐지며 남은 무작위의 패턴과 난데없이 덧붙어 있는 일상적인 사물에서도 그저 임의성이 드러날 뿐이다.

 

〈타바스코 시리즈〉(2024) 역시 종이와 순간접착제로 만들어진 조각으로, 특유의 옅은 노란색 때문에 종이의 정체가 '포스트-잇'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포스트 잇은 간편히 떼어내고 붙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일상적인 쓰임새 이외에도 공적 발언의 수단이나 집단적인 의사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손쉬운 접착력을 자랑하는 본래의 역할이 무색해지게, 메모지들은 순간접착제로 단단히 고정되어 일체의 형태로 완성된다. 〈진리〉가 허락된 상황과 타협하며 여타의 가능성을 긍정할 때, 〈타바스코 시리즈〉는 조각이란 매체의 물리적인 존재감을 다시금 붙잡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편리성을 추구하는 매체적 실험은 공통적으로 지속되며, 그 방법의 차원 너머에 숨겨진 내적 동기로 보는 이를 초대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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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연의 작업 앞에서도 주위를 수 차례 맴돌며 수수께끼를 품게 된다. 바닥에 깔린 〈설명할 수 없는 좌절에 대해〉(2024)는 평면 작업이지만, 잡지를 찢어 물에 불린 종이죽의 질감이 입체감을 더한다. 제목처럼, 형언할 수 없는 좌절이라는 감정을 과정에서나 결과로나 비언어적으로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뒤집힌 우산의 형상'이라고 설명하지만, 우산의 안쪽으로 들이치는 형태가 눈물의 폭포수 같은 것이 더욱 눈에 띈다. 젖은 종이죽의 수분이 날아가면서 '운' 종이의 표면마저 눈물로 얼룩진 자국처럼 보인다. 종이의 거친 표면은 매끈한 문장으로는 묘사될 수 없는 슬픔의 무게감이 억눌린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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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또는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2024)은 평면 작업보다 한결 구체적인 상황을 제시한다. 유리상자 안에는 의자에 구부정히 앉은 사람의 형태가 보인다. 맞은편의 태블릿 PC의 화면에서는 화재 현장의 영상이 재생된다. 왼쪽 어깨 위로는 그와 동일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 감시 카메라가 달려 있으며, 등 뒤에 달린 귀에는 어디에도 연결되지 않은 유선 이어폰이 꽂혀 있다. 발밑에는 뜯긴 책장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고, 그 밖에도 의미 모를 오브제들이 잡다하게 배치되어 있다.

 

상자 안에서 생동하는 것은 화면 속 영상뿐이다. 상자 속 형체는 인물의 형상을 흉내 내고 있지만 완전히 굳어져 정지된 모습이 흡사 동물의 박제 같다. 그의 몸체를 이루는 종이죽의 표면을 보면서도, 영상 속의 화재라는 소재를 그의 죽음과 연결 짓게 된다. 상자 속 인물은 종이의 소멸, 즉 곧 자신의 죽음을 연상케 하는 화재의 현장을 스스로 지켜보고 있다. 감시 카메라의 존재는 앞서 살핀 양지훈의 <테이큰> 속 산불처럼, 비극의 드라마를 일방적으로 기록하는 렌즈의 폭력성을 또 한 번 상기시킨다. 상자 속 연출은 비극의 피해자인 그에게 기록된 현장을 응시하도록 강제하는 것만 같다.

 

 

 

아픔이 추억이 되기까지 필요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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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란 감정은 일시적으로 마취는 될지언정 즉시 사라지지 않는다. 여러 감정 가운데서도가장 고요한 동시에 제일 끈질긴 탓이다. 슬픔은 시시각각 얼굴을 바꾸고 우리를 괴롭힌다. 분노나 좌절, 상실은 당연하고 때로는 사랑이나 추억과도 손을 잡는다. 슬픔의 위력은 고르고 옅게 퍼져 있어서 결코 사소하지 않다. 함부로 맞서다간 그 아린 감각이 오히려 더 선명해질 뿐이다. 슬픔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차라리 그 품에 먼저 안겨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제풀에 꺾여 물러날 때까지 귀찮게 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슬픔에 안기면 결국 과거에 머물게 된다. 이전의 흔적을 등지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도는 건 지금과 같은 고효율의 시대에서는 유약한 자세다. 회복기를 확보하지 않고, 표면상의 가시화로 제 역할을 다하는 얄팍한 해결책들로 그 시간을 압축할 뿐이다. 그렇게 슬픔을 모른 체하다 돌이킬 수 없게 된 흉터들이 너무나 많다. 이번 전시는 그 재발을 막을 순 없더라도 지연시킬 수 있는 태도들을 끄집어낸다. 인간의 연약한 감정부터 사회의 구조적인 사건에 이르기까지, 슬픔이 감도는 모든 자리에서 지켜야 하는 합당한 자세를 예술로써 살핀다. 이는 곧 우리 세상의 끊임없는 실패들을 그저 방관하지 않겠다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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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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