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난민화되는 삶, 환대의 (불)가능성을 질문하다 -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

연극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에서 나타나는 난민 서사
글 입력 2024.04.22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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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코끼리만보의 연극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Undocumented Oedipus)는 혜화의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2024년 4월 13일부터 4월 21일까지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로 이어지는 소포클레스의 3부작 중 근친상간과 존속살해라는 죄명으로 테베에서 추방된 후 ‘난민’으로 떠도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다룬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 집중해 이야기를 구성했다. 하지만 프로그램북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연극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의 현대적인 ‘재해석’, 즉 현대적 적용이라기보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활용해 현대의 난민 문제를 재-질문하는 것에 가깝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가 제기하는 몇 가지 질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를 추방했지만 오이디푸스를 데리고 있는 나라가 전쟁에서 이기리라는 신탁 때문에 테베의 통치자가 된 크레온이 그를 다시 데려오려 한다. 아이러니다. 크레온은 라이오스 왕이 죽고 혼란에 빠진 테베를 일시적으로 맡아 섭정하는데, 그때 그의 왕비였던 자신의 여동생 이오카스테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이유러 정체모를 오이디푸스를 결혼시킨 사람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 밝혀지자 오이디푸스를 추방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는 죄인이라고 낙인찍히지만, 자신도 모르고 저지른 ‘죄’의 원인의 반 정도는 적어도 크레온의 선택으로 인해 기인했다. 자신이 추방한 오이디푸스를 신탁의 내용에 따라 단순히 또 테베로 데려오려 하는 크레온의 모습은 국민-됨을 자의적으로 ‘심사’하고 가치를 결정하는 배제의 정치를 일궈 온 국가의 폭력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반면 크레온과 대조되는 인물은 아테네의 테세우스인데, 테세우스와 아테네의 시민들은 눈먼 난민 오이디푸스의 기나긴 사연을 듣고 그를 자신의 땅인 아테네에 받아들인다. 이미 죄인이자 혐오의 상징으로 낙인이 찍힌 오이디푸스를 크레온과 테베의 시민들과 다르게 환대한 것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나타난 이방인이자 난민에 대한 환대는 현대의 근대 국민국가 체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일이다. 난민에 대한 혐오 담론이 유통되고 난민의 수용 여부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효율성의 척도를 들이대는 지금의 현실은, 테세우스와 콜로노스의 아테네 시민들이 보여주었던 이방인을 경청하고 수용하려는 환대의 태도를 찾을 수 없다. 또한 오이디푸스가 어느새 오염의 상징이 되어버린 자신의 낙인에 대해서 스스로 해명하고 ‘어쩔 수 없었던’ 사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과 별개로, 현대의 난민들은 그러한 기회를 가지기 어렵다.

 

심사 기관의 의도에 맞게 진술의 내용이 왜곡되고 조작되거나, 언어의 한계, 정확히 말하면 ‘다른 언어’에 대한 통역 시스템의 부재라는 한계로 인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일도 부지기수다. 연극에서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콜로노스’가 아닌 곳으로 의미화하며 무엇으로 인해 현실과 콜로노스가 차이를 보이는지 질문한다.

 

 

 

무엇이 ‘난민’을 생산하는가?


 

현대 사회에서 난민의 이야기는 신자유주의와 국가주의, 자본주의라는 체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유산으로 생겨난 국가 간의 사회, 정치, 경제적 위계와 전지구적 금융 자본주의는 제 3세계의 수많은 난민을 낳았으며, 난민의 문제를 자본주의와 연계된 노동과 자본의 이동이라는 맥락으로도 의미화했다. 난민과 이주노동자라는 자의적인 구분은 그 나라에서 노동을 해 돈을 벌면 난민 신청이 어렵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낳았고, 추방을 기다려야 하는 ‘불법체류자’라는 위치가 사실 비자가 만료되거나 하는 등의 사건으로 한순간에 벌어질 수 있는 사건임을 알려준다.

 

기후 위기로 인한 기후 난민, 난민 심사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젠더와 퀴어 억압 등의 사례도 등장한다. 난민 심사 과정 속 성소수자는 자신의 성소수자-됨을 ‘증명’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고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다 말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부족 간의 내전에서 성고문의 피해자는 그 트라우마로 말을 잃었지만, 난민 심사와 증명을 위해서는 말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는다. 배제되었으면서 동시에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취약하고도 역설적인 난민의 삶은 여러 딜레마 상황을 마주한다.

 

이처럼 연극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와 함께 현대 사회의 여러 난민들의 사연을 에피소드의 나열과 교차라는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난민 인정율이 턱없이 낮은 한국에서, 이 연극이 가지는 가치는 클 수밖에 없다.

 

 

 

요구되는 '국민 자격'을 의심하는 난민 서사, 환대의 가능성


 

난민 담론에서 필요한 논의는 근대의 국민국가 체제가 어떻게 국민과 비-국민을 가름으로써 배제의 정치를 실현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러한 구조를 문제시하지 않은 채 난민을 효율성의 가치로 재면서 선별하거나 시혜의 대상으로 본다면 근본적인 부조리함은 해결되지 않는다. 무엇이, 누가, 어떻게 국민됨을 결정하고, 이는 과연 정당한가?

 

사실 특정한 국가의 국민으로 태어나는 것 자체는 단순히 우연에 불과하다. ‘난민’과 ‘이주노동자’와 ‘불법체류자’를 쉽게 분류할 수 있다는 오만한 착각, 자신이 한 국가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비-국민에게 성원권을 부여할 것인지 말 것인지라는 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정당하다고 믿는 것은 정주자의 환상이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주목할 점은 테세우스는 오이디푸스라는 ‘이방인’에게 다른 시민과 마찬가지로 왜곡되지 않고 ‘말할 기회’를 주었고, 오이디푸스의 말을 경청할 민주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오이디푸스는 사실 본인도 의도하지 않은 채 벌어진 일에 대한 해명을 통해 자신에게 찍힌 오명에 대해 당당할 수 있었다.

 

사실 테세우스와 아테네 시민들이 보여준 수용의 태도는 너무 기본적인 의사소통 윤리다. 이러한 콜로노스라는 공간과 현대 사회라는 공간의 괴리에서 알 수 있듯, 난민에 대한 왜곡 없는 인식과 그들을 단순히 타자화하지 않고 존중하는 태도가 그 차이를 낳는 것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연극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가 말하듯, 배제와 혐오의 정치를 문제화하는 난민 담론, 정주자의 시혜와 동정으로 귀결되지 않는 난민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배제가 아닌 환대를 목표로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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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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