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야기를 맞이하는 마음 - 뮤지컬 '브론테' [공연]

글 입력 2024.04.05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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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브론테>는 여성이 이야기를 쓰는 것이 엄격히 금지된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에 담아낸다. 극의 내용은 제목 그대로, 존재 자체로 유명한 브론테 자매에 관한 이야기다.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극 중에서는 ‘워더링 하이츠’라는 원제로 표현)>, <아그네스 그레이>. 이 세 작품이 각각 샬롯과 에밀리, 앤 자매가 창작한 소설이다. 특히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은 영미 고전 소설에서 손꼽히는 유명 작품인지라, 한국인에게도 익숙하다.

 

황폐한 영국 요크셔의 황야에서, 볼품없는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난 세 자매는 어떻게 세기의 소설가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까? 왜 이 뮤지컬은 그들의 창작물이 아닌 각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 것일까? 이들이 2024년 서울의 무대 위에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극을 관람하기 전부터 질문이 많았고, 실은 아직도 이 질문들의 정답이 될 수 있는 명쾌한 결론을 찾지 못했다. 단순히 우리가 사는 시대에 더 많은 여성 서사가 필요하다는 말로 <브론테>의 의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왜 무대 위의 여성을 필요로 하는가? 그들의 인생은 어째서 유효한가?

세 자매는 모두 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가장 나이가 많았던 샬롯은 동생 에밀리와 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그렇다면 가난하고 초라한 운명만이 예술가의 숙명이기에, 그들의 삶은 아름다운 것일까? 세 자매의 삶을 관통하는 비극성이 없다면, 과연 그들은 무효한가? 물음표가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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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에서 브론테 자매가 글을 썼던 때는 여성이 가정교사나 유부녀가 되지 않고서는 뜻을 펼칠 수 없는 보수적인 시대였다. 다소 폭력적으로 서술하자면 여성이 출산과 양육을 위한 기계로 취급되었던 세상이었고, 여성들은 그 세상의 피해자였다.

샬롯, 에밀리, 앤은 이와 같은 시대를 살면서 서로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함께 병정놀이를 하며, 그들만의 작은 세상을 창조하기를 즐겼다. 어찌 보면 엄혹한 삶의 무게를 잠시 잊고 도피하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상상은 늘 그렇게 시작되니까. 그런데 세 자매는 이 상상을 대중매체에 담아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바로 글쓰기다.

이 작은 공동체의 연대는 소설, 시, 산문 쓰기로 이어졌다. 그들은 글의 종류를 가리지 않았고, 서로의 글을 날카롭게 비평하며 수정을 거듭했다. 그렇게 세 자매가 직조한 상상의 힘은 무척 강력했다. 샬롯의 <제인 에어>는 기성 문단에 파장을 일으켰고, 당시 주류 남성으로 가득했던 기득권 세력을 그야말로 강타했다.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은 즉시 주목받지는 못했으나, 수 세기가 지난 지금에는 지구 반대편에서도 읽히는 고전 명작이 되었다.

 

브론테 자매는 고통을 딛고 일어나 이야기를 창작했다. 그 과정을 거치며 반목하기도 했으나 결국은 함께 믿고 의지했다. 그렇지만 나는 한편으로 이들의 삶에서 극적인 배경과 슬픈 운명 따위를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샬롯, 에밀리, 앤의 모습을 직시하고 싶었다. 뮤지컬 <브론테>에서 내건 홍보 문구, ‘그렇게 우리는 이야기가 된다’처럼. 이 작품에서 그들의 삶을 ‘여류작가’ 따위에 가두지 않고 어떠한 ‘이야기’로 전승하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말이다.

 

세 브론테를 일견 남성에게 당연한 무엇을 획책하고자 치열하게 애쓰는 여성과 같은 프레임에 가두고 싶지 않았다. 극을 보고 나서는 그들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사실 그렇기에 공연 시간에 모든 것을 담아내기는 부족했다. 극에서 다루는 내용은 축약적이고 이해하기에는 쉬웠지만, 한편으로는 표면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세 자매의 관계성과 업적을 고루 담아내려면 그들의 삶을 직관적으로 설명해야 했을 테다.

이 뮤지컬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변화 자체가 될 수는 없을 테다. 그렇기에 <브론테>는 마중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 빛을 보지 못한, 더 많은 물을 위로 끌어 올리는 데 꼭 필요한 마중물 같은 공연.

먼 영국 땅의 세 작가 이야기를 한국에 전하는 것은, 또 한국 관객들이 기다렸다는 듯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이유는 지난 과거를 돌아보는 데만 그치지 않겠다는 결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망각과 침묵을 강요당했던 목소리를 굳이 들추려는 노력은, 이것이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이기에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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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에서 샬롯은 미래에서 과거를 향해 편지를 써서 보낸다. 물론 실제로 미래에서 편지가 오지는 않았을 테니, 이 대목은 창작된 서사일 테다.

미래의 샬롯은 에밀리와 앤에게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주지 못했다며 자책한다. 글 쓰는 일에 매몰되기 전에 주변을 챙기지 못했음을 후회하면서 말이다. 후회만 가득해 보이는 순간, 우리는 지난 과거에 어떤 조언을 보낼 수 있을까?

 

어쩌면 이 공연 자체가 그러한 편지의 맥락을 띄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는 외면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다정하게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가난하고 비루하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유롭지 않다는 이유로, 장애가 있거나,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이주민 혹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2024년의 한국에서도 아직 수많은 이유로 누군가를 탄압하고 제한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을 증명할 자격을 몰수한다. 그 책임은 이 글을 읽는 당신과 나에게 있다. 여전히 무력하다는 핑계로 주변을 지키지 않는 우리 말이다. 이는 샬롯이 느꼈던 무력함과 비슷하리라. 그래서 나는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끝없는 비난을 쏟아내었던 샬롯의 편지에 공감이 되었다. 그 후회는 어쩌면 우리의 몫이다.

세 자매는 자신의 이름으로 기록되기를 포기하고 남성 작가의 필명을 쓰면서도 글을 썼다. 포기하지 않음으로 그들을 증명했다. 나는 공연이 끝난 뒤 극장 밖을 나서서, 다음 날 그들의 소설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서 도서관에 갔다.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성공한 브론테 가의 '세 여성'이 아니라, 샬롯, 에밀리, 앤, 각 개인을 만나고 싶었다.

소설이나 공연이 담을 수 없는, 그들의 뒤얽힌 정체성과 복잡한 인생사에 경의로움을 표하고 싶다. 써 내려간 것들로 기억되는 작가의 삶. 그리고 이후에 써 내려갈 것들로 이어질 독자의 삶, 관객의 삶. 뮤지컬 <브론테>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를 마중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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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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