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진 적도 없으나 모든 것을 잃고야 말 거라면 [영화]

<패왕별희 (覇王別姬)> (천카이거, 1993)
글 입력 2024.04.05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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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별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매년 4월 1일이 가까워 오면 거짓말 같이 세상을 떠나갔던 배우 장국영이 스크린 위에서 되살아난다. 올해는 메가박스에서 ‘R.I.P. 장국영’ 기획전으로 그의 대표작 재상영과 사진전 행사 등이 열리고 있다. 새순, 꽃, 들뜬 웃음이 유독 생기롭던 날들 가운데 어느 하루, <패왕별희>를 보러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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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별희’는 본디 한 경극의 제목이다. 경극은 고사를 바탕으로 하는 중국의 전통극으로서, 노래, 대사, 몸짓 등이 총체를 이루는 종합예술이고, 중국 문화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눈에는 아마 위 사진과 같은 화려한 복식과 분장이 가장 큰 특징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 중 ‘패왕별희’는 초나라의 패망을 앞두고 패왕 항우와 그의 총희 우미인(우희)이 죽음으로 이별한 일을 그리는 극이다.


영화에서 이 경극은 중국의 20세기를 관통하는 시대적 배경 위에 극중극으로 반복해서 등장한다. 주인공 청데이(바로 장국영이 분한)는 우희를 뛰어나게 연기하여 경극 배우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실은, 뛰어나게 연기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우희로 분하려 모든 것을 잃어갔던 삶을 생각하면 말이다. 나는 이 영화가 데이로 하여금 끊임없는 상실 끝에 결국 우희의 모습으로 죽어가도록 만들기 위해, 오직 그것만을 위해 쓰였다고 생각한다. 태어나기를 앗아갈 것이 터럭만큼도 없는 미천한 존재였는데도 그는 가혹할 정도로 빼앗기고, 또 빼앗긴다.


데이가 처음으로 잃은 것은 여섯 번째 손가락이다. 유흥가에서 더는 남자아이를 기를 수 없어 경극단에 어린 데이를 맡기러 간 어머니가, 육손이라 배우가 될 팔자가 아니라는 거절의 말에 도마에 올려 엿을 끊듯 댕강 잘라버린, 없어야 했던 손가락. 이는 남근 거세의 노골적인 비유이며, 또한 경극 이전의 어머니 세계의 종말이다. 데이는 매춘부의 자식이라며 경극단의 아이들이 자신을 놀리자,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어깨에 덮어주었던 옷을 태워버렸다. 자기 손으로 불가능했던 하나의 미래를 완전히 뿌리 뽑은 것이다.


데이가 다음으로 잃은 것은 어린 날의 친구이며, 가능했던 복수의 미래이다. 어느 날 데이는 경극단 밖으로 그 친구와 함께 도망쳤다가, 우연히 처음으로 경극 공연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바깥의 삶이 어떤 형태일지 한나절의 백일몽도 채 그려보지 못하고 열없이 경극단으로 되돌아간 둘은 자신들이 도망쳤기 때문에 고문에 준하는 매타작에 처한 다른 아이들을 보고 두려움에 떤다. 화면이 시끄러운 매질 소리로 가득 찬 사이, 친구는 소원했던 대로 과일 사탕을 배부르도록 꾸역꾸역 먹고 소리 없이 목을 매달았다. 다른 미래를 보고자 했던 눈으로 죽음만을 목격했으니, 이제 데이는 절벽 위의 외길을 걷고 있음을 안다.


데이가 또다시 잃은 것은 부채를 지우지 않는 결백한 애정이다. 혹독하고 폭력적인 경극 훈련 가운데 상처를 보듬어 주고 의지할 품을 내어주는 유일무이하며 소중한 친구인 단샬루가 어느 날 데이에게 ‘너는 계집이야’라고 윽박질렀을 때, 피를 흘리는 데이 얼굴의 클로즈업이 화면에 끈질기게 머문다. ‘나는 본디 계집아이로 태어나 사내아이도 아닌데,’라고 불러야 할 가사를 ‘나는 본디 사내아이로 태어나 … ,’라고 자꾸만 틀리게 부르던 데이의 남성성을 다른 누구도 아닌 단샬루가 살해했다. 어머니와 그랬듯 받은 애정이 있으니 그가 칼을 들게 두었고, 이제 데이는 샬루에게 받아내야 할 빚이 생겼다. 사내가 되지 못했으니 희롱당해 마땅한 계집의 삶을, 마지막 숨까지 영웅을 위하는 총희의 삶으로 보전補塡할 의무.


경극 배우로 이제 막 거듭난 어린 데이를 성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부른 자가 아름답게 반짝이는 수정 그릇에 소변을 보게 하는 것을 타이트한 클로즈업으로 잡은 장면이 있다. 이는 예술가로서 데이의 앞날이 어떨지에 대한 메타포였을 것이다. 경극 배우로서 그는 이 순간 아무리 화려하게 빛나도 전유하는 자의 욕망에 따라 배설물이라도 받아내야 하며, 언제라도 바닥을 뒹굴 수 있는 취약한 존재였다. 그러나 또한 무대 위의 어느 순간에는 정말로 영원이 깃들기도 했고, 그 순간을 쫓아 데이는 ‘1초도 떨어지면 안 되는 한평생’을 샬루에게 요구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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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결국 데이가 살아낸 극중극은 일본의 침략에서부터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에 중국의 예술이 어떻게 부침하고 살해당했는지, 그러나 또한 작품 안에서 완결되는 아름다움이 어떻게 살아남기도 하는지, 그리고 끝을 앞두고 붉게 타오르는 비극을 관음하는 관객의 존재까지 극의 안팎을 엮어내는 알레고리일 것이다. 존속 학살과도 같았던 역사의 멸절을 알고 있으니, 데이는 처음부터 끝없는 아름답고 공허한 추락을 위해 태어난 배우였다. 가진 적도 없으나 모든 것을 잃고야 말 거라면, 차라리 보검을 뽑아 들고 스스로 비극을 끝맺음한 것만이 누구도 그에게서 채 앗아가지 못한 순간 속의 영원이다.

 

 

[이명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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