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좋은 날로 가기 위한 노력

한계를 유영하는 나의 일대기
글 입력 2024.03.2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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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패터슨》의 일상에는 루틴이 있습니다. 출근해서 버스를 운행하기 전, 폭포를 바라보며 도시락을 먹을 때, 저녁 작업실에서 '시를 쓰는 시간'이 그렇죠. 패터슨의 시계는 쓰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초침 소리도 고요히 잠들어 느리고 고요하게 흐르죠. 때론 골치 아픈 일이 생겨도 그는 덤덤합니다. 마치 일상이 그렇다는 듯 유연하게 넘기고 담담히 사색에 잠깁니다.

 

 

[크기변환]영화 패터슨.jpeg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처럼 평화롭게 유영하며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줄곧 명사로만 얘기해 온, 누군가에 눈에 들기 위해 분투했던 삶에서 늘 질문을 안고 살았으니까요. 나는 왜 글을 쓰는지, 왜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지, 왜 기획이 재미있는지. 좋아하는걸 '왜'로 열거할 순 있어도 그에 대한 답을 할 수 없는 아이러니는 저를 소개해야 하는 지금 시간이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자기소개야 뻔하게 많이 해왔는데 뭘" 하며 문화초대 향유 버튼을 클릭했어요. 그땐 몰랐습니다. 지금 쓰는 이 글이 제일 어려운 글이 될 거란 걸. 쓰기로 한 이상 밑바닥을 긁어내서라도 써야 하는 걸 어쩌나요. 그래서 두서없이 적어 봅니다. 나에 대해서.

 


 

나를 모르던 나


 

스물 중반까지 패터슨과 같은 일상을 살았습니다. 남들처럼 공부하고 대학에 진학하면서요. 그처럼 글은 곁가지로 둔 채 말이죠. 꽤 오랫동안 출판사 서평단을 해왔고, 지금도 책 서평을 종종 씁니다. 주말이면 도서관에 가서 서가를 여행하고 북토크나 독서행사가 있으면 참여했죠. 그렇게 '남들처럼' 사는 데에 균열이 온 것은 취직하고 나서 입니다. 보통의 삶을 살 거란 현실 감각 뒤엔 특별한 삶을 갈망하는 내가 있었고, 저는 소용돌이 속으로 마구 돌진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하던 일은 사회복지사입니다. 전공을 택할 때까진 당연히 나와 맞는 일인 줄 알았는데 막상 현장에 오니 예민한 기질을 가진 저와 상극인 일이었어요. 스물 몇 살의 풋내기가 감당하기엔 민원의 강도나 그들의 답답한 삶의 풍파가 거셌습니다. 결국 입사 1년도 채 되지 못한 채 번아웃이 와 도망치듯 퇴사를 해야 했죠.

 

눈물 젖은 쉼의 시간은 그간의 삶을 복습하는 시간이었어요. 남들 다하는 휴학 한번 없이, 모범생처럼 공부만 하며 곧장 졸업한 탓에 제겐 저를 알아갈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흔한 해외연수 한 번, 동기들과의 따뜻한 대화 한 번이 전무하다시피 했죠. 첫 달은 내가 불쌍해 밤낮을 눈물로 지새웠어요. 일과 삶에 대한 열패감이 강하게 저를 장악했고, 그동안 장점이라 여긴 끈기마저 허황된 것임을 알아버린 탓에 충격의 여파를 여실히 실감했습니다.

 

 

[크기변환]스토너.jpeg

 

 

바닥을 치면 올라갈 길 밖에 없다죠. 우연히 북카페에서 『스토너』를 읽고 다시 기운을 차리게 되었어요. 당시 활자를 아예 읽을 수 없는 상태였는데,  『스토너』는 앉은 자리에서 200쪽 넘게 읽어내렸죠. 무시와 멸시에도 굴하지 않는 스토너를 보며 희망을 얻었어요. 자리를 털고 1년이란 갭이어의 시간을 나 자신에게 선물하기로 결심했죠.

 

 

 

갭이어란 승부수를 던지다


 

그 뒤로 오랜 꿈인 출판 편집자, 에디터, 마케터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든 글 가까이에 살고 싶었고, 감사하게도 최종면접까지 가는 등 수확도 얻었죠. 하지만 제주라는 우물 속에 갇혀 있던 탓일까요. 딱 그뿐이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서울 친구들과 확연히 다른 걸, 가는 길목마다 느꼈어요. 20년 넘게 살아온 고향을 떠나온 것부터 모든 게 처음인 저는, 4평 남짓 좁은 방안에서 계속 쓰는 것밖에 할 수 없었어요.

 

덕분에 교육원에 입학해 글을 쓰는 동기들과 글과 영화, 공연 등에 대해 밤낮으로 떠들 수 있었는데요. 그때 인생의 황금기라 생각할 만큼 못 누린 문화예술을 실컷 경험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야외 스크린으로 좋아하는 영화 《패터슨》을 다시 보았고, 야외 페스티벌에 가서 좋아하는 밴드의 사운드를 온몸으로 느꼈죠. 코로나 시국이라 제한이 많았지만 저에겐 하나하나 모두 소중한 경험이 되었어요.

 

 

[크기변환]패터슨 표.jpg

 

 

하지만 코로나는 모든 걸 앗아가기도 했습니다. 갭이어 기간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어서 취업 문을 두드렸지만, 가뜩이나 좁은 바늘구멍이 더욱 깊게 닫혔죠. 세상은 빠르게 경력직을, 신입 같지 않은 신입을 원했어요. 겨우 최종 문턱에 다다랐어도 고배를 마시는 경우가 허다했죠. 제가 할 수 있는 건, '잘할 수 있다'고 외치는 것 말곤 없었습니다. 그건 근거 있는 나의 믿음, 진짜 간절한 진심이었어요.

 

악화하는 팬데믹에 계획보다 일찍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주로 돌아오고 나는 무얼 해야 하나 한참을 생각했죠.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생각에 문화기획 쪽으로 방향도 틀어봤지만 쉽지 않았고, 운 좋게 잠시 프리랜서로 일을 얻었지만, 그것만으로 여의찮았습니다. 결국 현실과 타협해 다시 회사로 돌아갔고 거기서 다시 여러 부침을 겪고 계약 종료로 퇴사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내 자리를 찾습니다


 

[크기변환]프로필.jpg

 

 

"지금이 금미님의 전환점인 것 같아요"

 

다시 계약직 면접을 봐야 하나 고민 중이던 제게 작은 말 하나가 마음을 휘저었어요. 코로나로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콘텐츠 업계를 계속 주시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기획자, 마케터, 에디터 어디든 기회만 있으면 서류를 내고 면접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면접은 너무 좋아서 애사심이 높아지기도 했고, 다른 곳은 서류조차 통과하지 못한 채 '귀하를 모시지 못해 죄송하다'는 형식적인 답변을 받기도 했죠. 실패의 연속이어도 더 해 보는 방법밖에 할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다만 연관성 없는 나의 경력이 쓸모없게 된 게 조금 슬펐죠.

 

저의 포트폴리오 첫 줄엔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진심으로 설득하는 콘텐츠 제작자, 과정을 설계하는 운영 기획자 오금미입니다. 콘텐츠의 맥락을 찾아 연결하는 기획자입니다. 프로세스를 셋업 하는 과정을 즐깁니다. 공간, 라이프 스타일, 로컬, 출판, 자기계발을 둘러싼 이야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현재는 제주에서 애정 가득한 이야기를 짓습니다."

 

과연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실망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려 노력 중입니다. 꾸불꾸불한 나의 점들이 직선이 되는 날이 언젠지 모르겠지만, 계속해 보려고요. 혹시 저와 같은 고민을 하고 분투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어요.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고요. 그 시간이 양분이 되었듯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요.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함께 길을 걸어가 보자고요. 우린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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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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