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을 향한 자조, 혹은 조소, 어쩌면 - 성해나, '혼모노' [도서/문학]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결국 받아들여야 하는 가혹한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견뎌 나가야 하는가.
글 입력 2024.03.22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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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70쪽)

 

박수무당 문수는 하루아침에 신애기에게 30년 간 받들어 모신 신을 빼앗긴다. 굿판에서 잘 벼려진 칼로 뺨을 그으며 신이 들어왔음을, 자신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임을 알리려는 문수에게 현실은 야멸차게 말한다. “아저씨…… 피 나는데요.” 문수의 모습은 유튜브에 ‘박제’된다.


신에게 버려진 문수는 어떻게든 무당으로 살아가려고 애를 쓴다. “서슬이 시퍼런 작두를 가리키며, 사장에게 묻는다. 혹시 모형은 없습니까.” (88쪽)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습을 한다. 과장되게 눈을 뒤집고 몸을 부르르 떨다 자괴감을 느끼고 그만두길 몇 차례.” (91쪽)


주인공은 무형문화재를 노리던 30년 된 박수무당이다. 장수 할멈은 그런 문수를 떠나 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여자애, 신애기에게로 넘어간다.


위계는 단번에 뒤집힌다. 그러나 이 위계 역전은 통쾌하지 않다. 이것은 이전 위계를 향한 그리움이 아니다. 세계의 법칙이 손바닥을 뒤집는 것만큼 쉽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이 삶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장수 할멈이 옮겨 간 이유는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행이 찾아오는 방식과 닮았다. 아무런 예고도 없고, 징조도 없다.


성해나의 「혼모노」에서 단순히 이분법으로 젠더와 세대는 갈라쳐 대립하지 않는다. 젠더와 세대는 갈라지지 않고 이들은 씁쓸함으로 하나 된다.


 

친구는 있을까. 있어도 일상을 공유하거나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낄낄대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가 얻은 생은 여느 평범한 이들의 삶과는 다르니까. 저 나이에 나는 평범한 삶을 살고 범상한 몸을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했는데, 한 번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저주처럼 여겼는데. (90쪽)

 

 

무속신앙에서 장수 할멈이 묘사하는 ‘혼모노’는 신성하고 중한 위치를 뜻하지만, 현실에서 쓰이는 “혼모노”는 조롱의 언어다. 더군다나 신의 예측할 수 없는 뜻에 따라 쉽게 신에게 버려지고 선택되는 이 구조에서 ‘혼모노’는 허상과 같다. 누구도 영원히 “혼모노”(진짜), 승자가 될 수 없다. 이 세계의 구조가 씌워주는 왕관은 일시적이고 위태롭다. “혼모노”(진짜)와 “니시모노”(가짜)는 순식간에 뒤바뀔 수 있다.


 

30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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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백미는 단연, 문수가 신애기와 작두를 타며 겨루는 장면이다. 작가가 박진감 넘치게 그려낸 이 장면에서, 씁쓸함은 극에 달한다. 문수가 작두를 밟으며 피를 흘릴 때, 다시 말해 인간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희락과 비애는 탄생한다.


 

그 애는 바닥에 주저앉아 휘둥그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황보와 그의 가족들도 기도를 멈추고 나를 올려본다. 할멈도 이 장관을 다 지켜보고 있겠지. 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 (104쪽)

 


우리가 끝까지 외면하고 싶은 진실은 무엇인가. 그것을 결국 받아들여야 하는 가혹한 현실을 어떻게 견뎌 나가야 하는가. ‘번아웃 증후군’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모노’를 향해 나아가는 발버둥이 극에 달해 끝내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무의미해지는 순간, “큭큭, 큭큭큭큭”, 하고 흘러넘치는 웃음은 과연 자조일까, 조소일까, 혹은…….


 

*성해나, 「혼모노」, 『소설보다 겨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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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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