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인생의 갈림길에서 스토아 철학을 외치다 - 해법 철학

글 입력 2024.03.08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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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명예, 권력 중에 가장 중요한 게 뭘까. 애인과 이런 질문을 가볍게 주고받다가,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뭔지 찾으려 골몰했던 적이 있다. 물론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치관 고민에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수험생활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고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하게 된 지금, 깊이 있게 나를 탐구하면서 제대로 된 답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이 책을 문화 초대에서 선택한 건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철학의 일은 우리 자신의 생각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경험을 호령할지 모를 집착과 잘못된 판단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라는 책의 주장처럼, 비합리적인 사고를 줄이고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도와줄 거 같았으니까.

 

 

사본 -해법철학 표1.jpg


 

책에서는 스토아 철학을 기반으로 하여 이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실천적 방법을 제시한다. 스토아 철학이란 고대 그리스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인간의 목적은 덕이 있는 행동(이성에 따라 살고 타인을 돕는 것)을 하는 데 있다고 보는 학문이다. 스토아학파는 위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고자  공적인 일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적인 일이란 단순히 정치나 대외활동 말고도 타인을 위한 선행을 포괄한다) 나아가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하는데, 이를 잘하려면 '초연함'과 '일관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초연함과 일관성을 통한 상황 판단 방법은 다음과 같다. 특정 사건을 맞닥뜨리게 되면 해당 사건을 이미 몇십 번이나 접했다고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감정적으로 무뎌지면서 초연하고 일관되게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데, 이때 비합리적 사고를 걸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위 과정을 실행하는 데 있어 '자신의 의지'가 유일하고도 중요한 실천 도구라고 보았다.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혹여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감정적으로 매몰되면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걱정하느라 시간과 감정 낭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저자는 이러한 스토아 철학을 간략하게 전하며 이 책의 한계를 서두에 분명히 밝혔다. 전기 스토아학파의 이야기는 여러 자료에 뒤섞여 있어 정교한 논리가 부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스토아 학파들 사이에서도 각자의 의견이 분분한 데다, 그들에 대한 비판도 존재하나 그 지점을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겠다고 선포도 했다. 하여 그들의 가르침을 읽으면서는 저자가 예고한 바를 감안하면서, 내게 필요한 것을 선별적으로 흡수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이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스토아 철학의 모순점을 발견하거나 내가 가진 가치관과 부딪쳐 의문이 들 때가 적지 않았다. 다음은 읽다가 제동이 걸렸던 지점들이다.

 

(1) 이론의 일률적 적용을 일삼는다는 점

(2) '생각과 의지의 상관관계'에 대한 가치관이 나와는 다르다는 점

(3) 지나치게 이성만을 강조한다는 점

(4) 방법의 실현 가능성이 의심된다는 점

(5) 비효율성을 극도로 기피한다는 점

 

물론 이후에는 스토아학파의 가르침대로 각 주제를 재고하며 생각의 변천사를 겪긴 했다. 그러나 이 과정을 소개하기 이전에, 앞서 언급한 의문점들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1. 스토아 철학을 접하며 들었던 의문점들


 

1-1 이론의 일률적 적용을 일삼는다는 점 - 스토아학파는 특정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 자아를 이성적으로 마주하고, 냉철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도 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개개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적용했다는 데 있다. 다음의 주장에서 이러한 점이 드러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힘들어하는 일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라 여기곤 합니다. 하지만 술을 자제하거나 새벽에 일어나는 일조차 대단히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을 생각해 보세요. 이런 일들은 본질적으로 어렵지 않지요. 우리가 물렁하고 느슨할 뿐입니다.” 

 

정말 그럴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정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전부 단순히 ‘개인의 의지가 나약해서’로 귀결시키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사람마다 각자가 느끼는 감정의 역치나 각자가 처한 환경이 다르니 말이다. 즉, 각자가 가진 신체적 조건 (피로가 풀리는 수면 시간이 각기 다르다는 점) 등이나 각자가 처한 환경 (야근에 자주 시달린다든지)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원에서 조교로 일하며 들은 얘기 중에 그런 말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의무 교육을 받고 학교라는 같은 공간에서 성장하는데, 각자가 꽃을 피우는 시기는 전부 달라. 다 같이 공부를 열심히 해도 누구는 좋은 대학에 가고 누구는 못 가고. 누구는 20대에 성공하는데, 누구는 40대가 돼서야 성공하고. 왜 그런 걸까?”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다는 게 그 이유였다. 10대 때 공부를 열심히 하더라도 뭔가를 병행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을 수 있고, 다른 때에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인생에는 이렇게 복잡한 변수가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개인의 상황이나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로 위 주장을 획일적 적용하여 '모두의 의지 문제'로 귀결시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반발심이 들었다.
 

물론 스토아학파는 개인이 좌우할 수 있는 지점만을 통제할 것을 강조했다. 즉, 환경은 통제할 수 없으니 논외로 한 상태에서 위와 같은 주장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개인이 처한 상황’과 ‘개인이 사고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상관관계는 물론, 인과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두 영역을 서로 완전히 무관한 문제로 단순히 치부하고 넘기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1-2. ‘생각과 의지의 상관관계’에 대한 가치관이 나와는 다르다는 점 - 모든 것을 ‘우리의 의지 문제’로 환원시키는 스토아학파의 주장에 의문을 가진 또 다른 이유는, ‘생각과 의지의 상관관계’에 대한 가치관이 그들과 달라서이기도 하다. 스토아학파는 생각이 자신의 의지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나는, 생각과 감정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난다고 본다. 누구나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특정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는데, 스스로 자제하기 어려워서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외려 그 생각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누군가는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그렇다”는 것 자체가 의지의 개입을 전제로 하지 않느냐고 반박할 수 있겠다. 그러나 '강박'은 '원인'에 해당하고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생각이 화수분처럼 피어나는 것'이 '결과'로 파생된 것은 사실이니, 결론적으로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피어나는 것이 맞다고 볼 수 있다)

 

1-3. 지나치게 이성만을 강조한다는 점 - 스토아학파가 지나치게 이성만을 강조한다는 점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는 친구가 상을 당했을 때 대외적으로는 적절한 반응을 해주되 그 안에 매몰되지는 말라고 한 데서 그러했다. 스토아학파는 그렇게 해야만 감정적으로 경도되지 않으며 친구를 위한 건설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고, 그것이 '타인을 위해야 한다'는 목적을 성취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애초에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의 감정을 달랠 수 있는 건설적인 방법이란 게 존재할까? 어쩌면 없을 수 있다. 그럴 때는 감정적으로 매몰될지라도 함께 슬픔을 느끼는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될 수도 있다. 하여 이러한 태도를 경계하라고 한 스토아학파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더욱이 결과적으로 그러한 행동이 과연 친구를 위한 길이 맞을지도 의문이 든다. 상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성적 방법을 강구한다는 목적 자체는 선하지만, 결과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게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1-4. 모순점이 있고 방법의 실현 가능성이 의심된다는 점 - 스토아학파는 명성과 성공에 집착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이렇게도 말했다.

 

“겨루어봄 없이 삶을 보내는 사람, 성공도 공적도 자랑할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을 존재의 쓸모없는 충전재로만 보게 될 뿐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인격에 만족한다면, 그건 무신경에서 나오는 만족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공도 공적도 ‘자랑할 수 있을 정도’로 공적인 일에 참여하되, ‘과도하게 집착하지 말라’는 조언은 일견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공은 어느 정도 야망을 품고 집착할 때 얻을 수 있기도 하니 말이다.

 

스토아학파는 또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상상하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현재 재산의 소중함을 알되, 그것들을 갖게 되는 순간 잃어버려도 괜찮다고 마인드 컨트롤할 것을 조언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서는 부정적 상황이 일어날 것을 미리 상상해야 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도 괜찮다는 초연함을 얻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일어나지도 않을 수 있는 일을 상상하는 데에 몰두하느라 괜한 시간 낭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했다. 

 

과연 앞서 언급한 것들을 전부 동시에 해내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물론 저자는 스토아 철학은 그것을 반드시 성공해 내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그 이상향에 가깝도록 ‘노력’을 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노력’하고 싶어도 모순점이 있어 정확한 방향성을 알기 어려운 데다, 그 기준도 모호하여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1-5. 비효율성을 극도로 기피한다는 점 - 여기서는 스토아학파의 주장 중 내 가치관과 달라 공감되지 않았던 부분을 논하고자 한다. 스토아학파는 효율성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보는 극한의 실용주의자가 대다수다. 초연한 자세로 특정 상황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것이 불필요하다고 판단된다면 굳이 더 경험하지 않아도 되기에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묻고 싶다. 왜 무언가를 할지 말지를 그것의 ‘효율과 필요성의 여부’로만 논하느냐고. 나는 어떤 경험이든 중요하고 그 안에서 얻는 것이 있으며 그럴 만한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인 만큼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는 울고 웃고 힘들어하고 집착하면서도 사랑을 하고, 때로는 알면서도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총합체가 인생이기도 하지 않나. 스토아학파가 조언한 대로 이러한 과정을 생략한다면 무슨 재미로 살아갈까. 물론 인생의 목적이 재미는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런 감정이 있기에 인생이 다채로워지기도 한다. 즉, 모든 것의 필요를 합리성과 효율성의 여부로 환원하는 것만이 정답만이 아닐 수 있다. 그게 이롭다고 하더라도, 이로운 것만이 이상적인 삶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거니 말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의문점들 이외에 공감 가는 대목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기존에 이해한 게 오해였음을 알게 되었다든가, 기존에 지녔던 가치관과 달랐을지라도 점차 스토아학파의 주장에 설득되어 변화를 겪는 과정도 있었다. 지금부터는 그 지점에 관해 논해보고 싶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아 철학이 유의미했던 이유


 

2-1. ‘개인의 의지 문제’라는 주장 다시 읽기: 긍정성을 찾는 데는 도움이 된다 - 나는 무엇이든 개인의 의지 문제로 환원시키는 스토아학파의 주장을 불편하게 느낀 바 있다. '생각은 본인의 의지로 좌우할 수 있다'는 스토아학파와 달리, '생각은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난다'라고 보아서였다.

 

그런데 이 생각에 천착하면서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의 모순점을 찾았다. 나는 생각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난다는 말을 맹신하면서도, ‘생각은 자유다’라는 말에도 동의한다는 것이었다. 후자는 의지의 개입을 전제로 하는 데 동의하는 것이니 분명 기존의 생각과 모순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것이 맞을까, 생각에 잠겼다. 

 

결국 어느 한쪽이 정답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생각은 '의지가 개입된 것'과 '개입되지 않은 것', 두 유형으로 나뉜다. 그중 스토아학파는 ‘의지가 개입된 부분의 생각’을 조절하라고 조언한 것이겠다. 역으로 그들이 말하는 조절 불가능하고 제어할 수 없는 지점에 속하는 것들이란, 불쑥 튀어나오는 두려움의 감정이나 비합리적인 생각 등일 것이다. 요컨대 이 지점은 그대로 두고, 내가 의지로 해낼 수 있는 생각을 추가해 기존의 생각에 덧입히거나 사고를 변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분류해서 보니 개인의 의지로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게 되었다.

 

특히 긍정성을 찾을 때는 상황을 ‘자기 의지의 문제’로 보는 방법이 도움이 됐다. 자기 의지가 중요하다는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에 따라, 나 자신이 자주 행복감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되어서였다. 우선 스토아학파는 어떤 일이든 개인이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좌우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사람이 사는 세상은 그가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주로 형성되므로, 서로 다른 사람에게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중략) 한 사람의 경험에서 일어났던 흥미로운 사건들을 들으면, 많은 사람은 비슷한 일이 자신의 삶에서도 일어났더라면 하고 바랄 것이다. 진짜 부러워해야 하는 것은 그가 묘사하는 사건들에 그런 의미를 부여한 그의 정신적 능력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잊고 있다. (중략) 사람에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이러한 의식의 기질이며, 이런 기질은 대체로 그 내용을 구성하는 환경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작년까지 나는 장기적인 시험공부에 매진했으나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수험생으로 있으면서는 쾌감과 즐거움, 행복감을 느낄 때가 적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있게 분석하고 집어넣으면서 지적 갈증을 해소하는 데서 오는 유희에 빠져 있었고, 이를 양껏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현재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취준하기 위해 주 6일 아르바이트에 매진 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쾌감을 느낀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지적 유희는 얻었지만, 인간관계를 포기하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때와는 달리 일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내가 해야 할 업무들을 정립해 나가면서 얻는 쾌감이 있다. 그 덕에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지만 사람을 만나는 것도 꽤 좋아했었고, 타고난 일머리는 없을지라도 꼼꼼히 기록하고 처리하면서 꽤 신임받는 사람이라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됐다. 학원에서 일을 잘한다고 칭찬을 받으면서, 교무 조교 업무 자리 제안을 받을 때는 그 희열이 배가됐던 것 같다. 

 

일련의 과정에서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재미를 찾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뭘 하든 과하게 몰입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고, 내가 잘 해내야 할 정당성을 찾고, 인정을 받으며 행복감을 얻는 사람. 그러니까 이 구절과 같은 것이다. “행복하고 쾌활한 삶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그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 즐거움과 만족감을 더하는 것이다. 그의 기질이 그 자체로 감정의 원천이 된다.” 행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하든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고 의미 부여를 할 때 온다는 것. 내가 자주 행복한 이유는 여기서 기인한 것이었다.

 

2-2. 이성 중심적 태도의 가치를 절감하다 - 앞서 말했듯 스토아학파는 친구가 상을 당했을 때 대외적으로는 적절한 반응을 해주되 그 안에 매몰되지는 않아야 건설적인 방법을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러한 방식에 거부감을 느꼈고, 과연 그것이 타인을 위하는 일인가 하는 근원적 물음이 들었다고도 했다. 그런데 아래의 주장을 보면서는 조금씩 납득되기 시작했다.

 

“당신이 슬퍼하고 있는데, 두 친구 중 한 사람에게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한 친구는 재앙이 새로운 경험이라서 당신의 슬픔을 보며 온통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다른 친구는 그런 일을 1000번쯤 봐서 다정하고 배려하는 감각은 있으나 감정은 없습니다. 저라면 두 번째 친구에게 위로받고 싶을 것이고, 어쨌든 첫 번째 친구에게 더 감동할 만한 이유를 찾지는 못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스토아주의자는 두 번째 친구입니다.”

 

스토아학파의 의도를 조금은 알 거 같은 대목이었다. 정말로 도움이 되는 조언을 얻기 위해서는 감정에만 몰입하는 것보다는 이성적 사고가 필요할 수 있다. 그럴 때는 스토아주의자의 위와 같은 대처 방식이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여전히 상을 당한 상태에서 위와 같은 상황을 적용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위와 같은 조언을 적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라면 충분히 이성 중심적이고 초연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유의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3. 효율성의 필요를 다시금 깨닫다 - 나는 세상에 좋지 않은 경험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 비효율적이라 할지라도, 최대한 여러 경험을 하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스토아학파의 주장은 이러한 내 가치관과 상반된다. 스토아학파는 특정 경험을 여러 번 했다고 상상했을 때 지닐 수 있는 ‘평정심’과 ‘초연함’을 겸비한 채로 건조하게 상황을 바라볼 것을 조언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스토아학파가 그러한 조언을 한 의도는, 그렇게 했을 때 불필요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비효율을 경험하지 않고도 현자의 고견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앞서 내가 비효율적일지라도 여러 경험을 쌓는 것을 중시한다는 이유는 무슨 경험이든 거기서 얻는 게 있고, 깨닫는 바가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그러나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고도 특정 깨달음을 얻고, 시간까지도 벌 수 있다면 충분히 그들의 가르침대로 이행해 볼 가치가 있지 않나 싶다.

 

2-4. 스토아 학파에 대한 탐구욕이 생겼다는 것 - 결정적으로 스토아 학파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 사변적으로만 생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에 찾는 데 몰두해 왔다. 그만큼 양질의 선택을 하는 데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 방법일 거라는 얘기다. 물론 다소 의문은 있었으나, 그것은 (저자가 부분적인 내용만을 다룰 것이라 예고한 바 있듯) 내가 스토아학파에 대해 아는 깊이가 적어서 그렇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다른 서적들을 참고하며 더욱 알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고 어떻게 하면 그 이상향에 가까워질 수 있는지를 조금 더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이 점을 차치하고도 책을 읽으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평소에 어떤 것을 좋아하고 이상화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주목하고 싶다. 이 책에서의 스토아학파들이 전한 가르침에는 이렇듯, 우리가 옳다거나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일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게 한다는 것, 거기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 대해 내밀하게 탐구하게 하는 그들의 가르침을 탐닉하고 실천하다 보면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도 명확해지지 않을까. 이러한 믿음 하나로 스토아의 가르침을 따라가고 싶은 욕구가 솟는다.

 

 

 

추예솔.jpg

 

 

[추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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