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온전한 무해란 없을지라도 - 영화 '괴물'

글 입력 2024.02.20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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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알았을까 후회하는 작품이 있다. 이내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안심하는 작품도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은 자기 책망과 칭찬이 동시에 교차하게 한 영화다. 이런 세상이 꾸준히 그려진다는 안도감이, 어느 한구석에 영원히 남아있다는 기쁨이 떠오르게 하는 영상물. 그걸 스쳐 간 눈은 이전과는 똑같이 세상을 바라보기 힘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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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람하지 않은 분은 먼저 영화를 시청하길 적극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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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보고 났을 때야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다. <괴물>은 어린아이들의 사랑을 둘러싼 퀴어영화라고. 하나의 장르와 소재로 한정 짓기란 편협하지만, 퀴어라는 개념 없이 이 영화를 이해하기엔 큰 공백이 존재한다.

 

미나토와 요리가 겪는 일은 퀴어라 불리는 이들이 생애주기 전반에 걸쳐 흔히 경험하게 되는 일이다. 다수와는 다른 마음을 품었을 때의 혼란과 불안, 이해하려는 노력보단 반감과 적의를 띄우는 주변인, 어디에도 쉬이 풀어놓을 수 없는 속마음, 결국 세상의 종말을 바라게 되는 애환까지. 애초에 ‘괴물’도 보통과 다르다고 인식되는 이들을 칭하는 대표적인 언어다.

 

개별적인 소재들만 보면 보편적인 퀴어 영화의 문법을 따라가는 듯 보이나, <괴물>은 동일한 서사를 세 개의 다른 시선으로 비춘 형식과 아이들을 그 중심으로 설정함으로써 여러 독특한 의미를 파생시킨다. 그 의미가 모이는 한 지점은 퀴어함의 보편화다. 즉 모든 인간은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다른 차원의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타자와의 이질감, 다름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 비밀로 인한 피로와 불안감 따위는 사실 개인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일반적인 현상에 가깝다. 그 안에서 특히 소수자만이 겪게 되는 특수한 경험은 물론 조명되고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특수성만이 강조된다면 보편의 경험으로 확장되기 어려워지는 딜레마를 가져온다.

 

그러니까 퀴어를 둘러싼 이야기는 퀴어에게만, 장애를 둘러싼 이야기는 장애를 가진 이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쉬워진다는 것이다. 그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그다지 중요하게 판단하지 않는 문화 속에선 쉬이 외면될 수 있는 주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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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은 그런 특수한 경험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실은 얼마나 보편적일 수 있는지 특유의 형식을 통해 보여준다. 학교폭력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저마다의 시선에 따라 다양한 인물들은 자신의 세상에서 약자로 소외당한다. 위치에 관계없이 굉장히 유사한 방식으로, 서로가 서로의 괴물이 되면서.

 

이때 그 공간으로 학교가 설정된 것은 흥미롭다. 학교는 계급과 관례에 기초한 보수적인 사회의 상징이 된다. 교사와 학부모와 학생이라는 명징한 위계, 사회화라는 명목으로 유지되는 공고한 시스템, 그 체계에 맞춰지지 않으면 낙오되고 낙인찍히는 관례, 동질감과 유사함을 최우선의 가치로 설정하는 또래 아이들의 문화.

 

이 속에선 관례에 들어맞지 않는 ‘이상한’ 존재와 목소리는 곧바로 표적이 된다. 학교가 ‘정상적으로’ 굴러가기 위해 민원인인 미나토의 엄마 사오리는 제거 대상으로 설정된다. 아이가 교사의 폭력과 폭언에 노출됐단 사실과 무관하게, 학교가 소란스러워지지 않고 예전처럼 굴러가기 위해 어떻게든 잠재워야 하는 문제 인물로 평가되는 것이다.

 

폭력 교사로 낙인찍힌 호리의 경우도 유사하다. 실제로 폭력이 있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문제를 일으켰다고 판단된 호리는 범인이 되기를 강요받는다. 그것이 사회를 ‘무리 없이’ 유지하기 위해 관례적으로 옳기 때문이다. 손녀를 차로 쳤다고 의심되는 교장 선생님 역시 그러하다.

 

자기 아이를 걱정하고 슬픔에 분노하는 학부모의 마음, 출처도 모를 소문에 연인과 사회적 지위를 잃을까 억울한 개인의 마음은 우리 모두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다. 그들의 항변이 도착한 곳은 어떤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진단하기보단 그 결과만을 놓고 유흥거리로 삼거나 책임 회피에 급급한 무책임한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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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부짖는 사오리와 호리가 마주한 공허한 반응은 권리와 존재를 가시화하기 위해 투쟁한 퀴어들의 모습과 굉장히 유사하다. 누군가를 병들게 하는 환경에 의문을 품고 대화를 시도하는 이들이 ‘괴물’이라 불리는 것까지. 느끼겠지만, 그건 비단 퀴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크고 작게 권리를 침해당하는 사소한 개인 모두의 이야기다.

 

이 지점에서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괴물은 누구게’라는 어구의 의미는 명확해진다. 괴물이 누구냐는 물음에서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계속해서 괴물이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 그 자체다. 괴물은 사실 우리 모두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고 고려하는 건 불가능할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향한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경험한 세상을 진리로 믿으며 내뱉고 행하는 모든 것들은 다른 세상과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즉 우리는 모두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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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따듯한 바람조차 누군가를 벼랑 끝으로 몰 수 있다. ‘남자가 그것도 못 버티면 어떡하니’라는 가벼운 격려조차 누군가를 위축시킬 수 있다. 예능 프로에 나온 ‘여장남자’의 행동을 웃으며 따라 하는 것조차 누군가를 고민에 빠트릴 수 있다.

 

의도와 관계없이 때론 누군가를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까지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건 씁쓸하고도 난해하다. 인정하긴 아프지만, 그것이 결국 인간 본성의 한계가 아닐까. 따라서 절대적인 괴물이라는 허상을 축출하는 게 아니라 상황과 맥락에 따라 변모해서 나타나는 괴물의 모습을 끊임없이 심문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자기의 세상이 반드시 다른 존재의 세상과 충돌할 것임을 알고 겸허하게 겸손해지는 태도가 더 옳다. 온전한 무해란 없을지라도. 

 

그럴 때 두 개의 우주는 소멸이 아닌, 소란하면서도 안온한 융합의 세계로서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퀴어

 

퀴어함이라는 특수성이 보편성으로 확장되는 지점과 더불어 초등학생 퀴어라는 특징에도 눈길이 간다. 초등학생은 흔히 미성숙함의 상징으로 여겨지기에 그들의 주체적 행동은 경시된다. 이는 퀴어라는 특성과 합쳐져 나이가 어려서 헷갈린다거나, 그 나이에는 누구나 그렇다는 식의 무시와 의심으로 이어진다.

 

성인 퀴어도 무시와 의심과 폭력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성인이 아닌 퀴어들이 갖는 실존적인 불안감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괴물>은 그들을 절대적 약자의 위치에만 머물게 하지 않는다. 미나토와 요리는 편협한 어른들의 시선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서로를 부지런하고 강력하게 회복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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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바라본 어른과 세상은 그들에게 힘을 키워주지 못했다. 서로가 같이 있을 때 진실에 가까워진 마음에 훼방과 의문을 늘려갈 뿐이었다. 이해가 어려운 세상의 말에서 벗어나 그들은 그저 서로를 지키려 했다. 어느 소리보다 자기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방해받지 않는 공간을 개척하는 모습은 나이를 막론하고 주체적이고 순수한 듯 보인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은 세상을 휩쓸어 갈 것 같은 태풍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소를 띠며 즐거워한다. 그들에게 태풍이란 창세의 신호처럼 다가온 게 아니었을까. 투명하고 진실한 마음을 수용하지 못하는 세상이 휩쓸려 가고, 어떠한 질서도 없이 순수함이 오롯하게 존재할 수 있었던 태초의 세계를 향한 신호.

 

 애초 미나토와 요리에게 퀴어라는 명명은 존재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듯 보인다. 퀴어라는 명칭도 결국 세상의 질서 안에 포섭되는 비非순수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자기의 마음이 사랑인지 구체적으로 알고자 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상대의 눈을 바라보고 재미난 놀이를 하며 같이 있고 싶을 뿐이다. 그 순수한 마음엔 실용적인 이유도 논리적인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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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태풍이 지나가고 맑게 갠 들판에서 환호를 지르며 뛰어다닌다. 태풍이 세상을 뒤바꾼 ‘빅 크런치’였는지, 잠시 스쳐 지나간 소나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은 세상의 요구대로만 바뀌지 않아도 된다는 걸 분명히 알게 됐다.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태초의 비밀을 굳게 믿을 수 있게 됐다.

 

영화의 결말이 아이들의 죽음을 암시하는지 여부로 의견이 나뉜다고 들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아이들이 죽었다고 의심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낙관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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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큰 격변이 있어야 세상은 순수함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미 불가능해져 버린 일일 수 있겠으나, 이런 이야기가 계속 생겨난다는 것이 아리도록 기쁘다. 태초의 정수를, 그 순수한 비밀을 엿보는 이야기가 계속 피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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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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