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노방일기

노방(路傍) : 길의 양쪽 가장자리
글 입력 2024.04.03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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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드득- 꺄드드득-. 잘 익은 호두 두 알이 손아귀에서 부딪히며 건조한 소리를 낸다. 거친 굳은살 사이사이를 비집은 호두 두 알이 애처롭게 운다. 그는 갈 곳이 없다. 그의 발바닥은 더러운 아스팔트 위를 나뒹군다. 그러고는 이내 마치 세상을 향해 자신을 보호하듯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둥글게 웅크린다.


폐차장 건물 안, 대로변을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세상으로부터 제외된 느낌. 언제나 들었지만, 언제고 익숙해지지 않는 불쾌한 느낌이 그를 휩싼다. 돌이켜 보면 그는 어릴 적부터 그랬다. 또래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아니, 그는 어울린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아이들이 싫었다. 유치했다. 가령 바람 빠진 공 하나를 쫓아 마치 개새끼처럼 헥헥 거리며 운동장의 흙먼지를 잔뜩 삼키는 일이나, 괜한 여자아이들을 괴롭히고 울리는 일을 혐오했던 것이다. 가지런한 크레파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잔뜩 날이 선 못처럼, 그는 자신 스스로가 '비정상적인' 이단아라고 느꼈다. 그러나 생존 본능에 의한 것인지, 그는 가면을 쓸 줄 아는 법을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었고 이내 그들과 살얼음판과 같은 아슬아슬한 관계를 맺곤 했다.


그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싫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어른들을 증오했다. 그에게 어른이란 모순으로 덩어리진 피조물에 불과했다. 오로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영혼까지 팔아넘길 수 있는 장사치들처럼 보였다. 세상엔 이토록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가득한데,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기계처럼 담담히 보내는 그들이 싫었다.


그러나 그는 꽤 정상적인 집안에서 자랐다. 그에게는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하고 자상하기까지 한 5살 많은 형과, 2살 많은 누나가 있었다. 그의 부모도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던 어른이었다. 모두가 화목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들과 '가족'이라는 최소한의 형식적인 관계만을 유지하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냈다. 그렇게 그는 늘 겉도는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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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그가 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때는 레이싱 선수가 되고 싶었다. 학창 시절, 교실 창문 밖을 들여다보는 취미가 있었던 그는, 학교 앞 대로변을 달리는 자동차를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는 자동차에 관해서라면 전문가 못지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아주 가끔, 밤이 유난히 어둡게 느껴지는 날이면, 폐차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버려진 차들을 기웃거리는 것이 전부이다. 그에게 있어 '사람살이' 같은 것 따윈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기에 매일이 혼란스러운 고통의 연속이다. 그렇게 매일 잔뜩 취한 채로 길가에 시체처럼 널려 겨우 살아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까, 유난히 비가 쏟아지던 그날 아침에, 그는 여느 때처럼 소주 몇 병과 로또를 사기 위해 편의점으로 향한다. 그는 일주일에 딱 한 번, 오랜 습관처럼 로또를 사곤 한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아니 어쩌면 자신에 대한 아주 작은 미련이다. 평생을 세상을 혐오하며 등졌던 그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자신은 남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일말의 우스운 기대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토 나오도록 역겹다. 그러나 늘 그랬듯 그는 생각하기를 멈춘다. 가장 편한 방법. 그는 구매한 로또 종이를 꼬깃꼬깃 접어 재킷 주머니 깊은 곳에 넣는다. 그러고는 익숙한 인근 공사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 아니 소주를 사기 위해서, 그곳은 그가 자주 찾는 유일한 일터다. 그의 친형은 그에게 한 달에 한 번, 많지 않은 돈을 보탠다. 그러나 그 돈들이 왠지 모를 '빚'처럼 느껴진다. 빚. 그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마치 빚을 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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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뒤, 대로변에서 로또 숫자를 맞춰보는 이들에 의해 문득 오늘이 로또 당첨 발표일이란 것을 알게 된 그는, 좀비처럼 잠든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눈부시도록 높은 건물의 전광판 화면을 응시한다. 로또 추첨 방송이 한창이다. 2, 31, 44, ···. 굳었던 그의 얼굴 근육이 비로소 각자의 존재감을 외치듯 꿈틀거린다. 21, 7, 28, ···. 그리고 마지막 숫자 15. 흉측한 미소를 짓는다. 이제껏 느낄 수 없었던 희열감이 온몸을 감싼다. 역시 세상은 나를 버리지 않았어··· 세상은··· 10억··· 로또 종이··· 종이···! 그는 미친 듯이 재킷 주머니를 뒤진다. 없다. 정말 아무 곳에도, 마치 거짓말처럼, 없다.


그는 전날 폐차장에서 앞 범퍼가 전부 망가진 빨간 마티즈에 잠시 올라탔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분명 그곳에 있을 것이다. 분명···. 그는 핏발을 세우고 온 힘을 다해 두 다리를 빠르게 움직인다. 횡단보도를 위태롭게 건너고, 계속되는 내리막길을 구르며 달린다. 이것이 정말 마지막 기회야···. 최고급 엔진 오일을 방금 막 갈아 낀 스포츠카처럼, 두 다리를, 빠르게, 막 구른다. 온몸을 감싼 혈관 속 온도가 이리도 뜨거웠었나.


어느덧 그는 폐차장 앞에 도착한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려 어제 탔던 빨간 마티즈를 금방 찾는다. 폐차기에 넣어져 천천히 압축되며 으스러지는 것을···. 그는 마티즈를 향해 재빠르게 돌진한다. 그저 할 일을 묵묵히 할 뿐인 탄탄한 기계는 그를 온전히 받아들여 삼켜 버린다. 그의 몸은 그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짓눌려버린다. 아주 나약하게, 정말 보잘것없게, 그의 육체는 금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진다.

 

그는 웃는다. 처음으로, 아주 정상적인 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이내 비정상적이게 괜찮은 새끼발가락 마디 하나가, 마지막 몸부림을 치듯 어설프게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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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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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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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아차림
    • 잘 읽었습니다..다음 작품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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