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도제작자는 언제나 지도 밖을 향한다 [영화]

<지도제작자의 영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2023) / <얼굴들> (이강현, 2017)
글 입력 2024.03.25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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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 (안노 히데아키, 1995)
<20세기 사람들> (아우구스트 잔더, 1910년대 ~ 1950년대 중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구스타프 말러, 1904)
<지리학자> (얀 베르메르, 1669)
 

 

공통점이랄 게 없어 보이는 애니메이션, 사진 프로젝트, 가곡, 회화. 모두 한 사람을 돌이켜 톺아보는 자리에 들려 나온 작품들이다.

 

영화계 소식을 살펴보던 차에, 우연히 인디스페이스에서 예정된 상영회가 눈에 띄었다. ‘지도제작자의 영화’. 간단한 두 어절이 연상케 하는 거대함, 진취의 이미지에 끌렸던 것 같다. 1주기를 맞은 이강현 감독의 추모상영회였고, 그를 뒤늦게 알게 된 나는 어째서 그가 ‘지도제작자’라는 생경하고도 근사한 비유로 칭해지는지 몹시 궁금해져서, GV 회차였던 <얼굴들>을 보러 다녀왔다.


고백하자면, 영화를 본 당장의 감상은, ‘낯설다’, 정도였다. 익숙한 극영화의 문법이 노골적으로 배제되었기에, 너무도 낯선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에 대한 첫인상이 되었다. 그러고는 이어진 두 주연 배우가 자리한 GV에서, 쉼표가 가득 찍힌 느린 호흡의 회고를 통해 조금은 사적인 기억의 조각들을 엿봤다. 그렇게 처음 나를 상영회로 이끈 궁금증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커지고 말았다.


여태껏 본 적 없는 소설책처럼 두텁게 서술된 각본을 내놓았던, 항상 큰 가방을 고 촬영장에 나타나 선명한 그림의 디렉션을 주었던, 작품에 대한 말들을 막힘없이 늘어놓는 달변가였던 감독. 조각들은 그가 선명한 지도를 그려가던 사람임을 유추하게 했고, 지도를 펼쳐놓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나의 오래된 염원이므로, 그걸 읽는 방법을 꼭 알아내야만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서론이 길었다. <지도제작자의 영화>라는 동명의 책을 통해, 이강현 감독의 지도를 이루는 요소들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서두에 언급한 네 가지 작품들이 이 책에 등장한다. (*편의상 아래부터 ‘감독’이라고만 일컬을 경우 이강현 감독을 가리킴)

 

먼저 김경묵 감독은 감독의 첫 다큐멘터리 <파산의 기술記述>(2006)과 일본의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공유하는 ‘세기말적 아우라’에 주목한다. 두 작품 모두 몰락에 접어든 사회에서의 각자도생-투쟁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jpg

 

 

말하자면 감독의 ‘세기말’은 신자유주의 이후 삶의 조건과 같이 놓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다큐멘터리 <보라>(2010)에 대한 인터뷰에서 ‘실은 파산이든 질병이든 주제 자체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는 감독의 발언은 얼핏 그의 첫 극영화인 <얼굴들> 이전에 찍었던 두 다큐멘터리의 중심 소재인 노동 문제가 중요치 않다는 말로 오독될 수 있으나, 그가 작품 속에서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오히려 그는 소외된 노동자의 능숙하거나 실패하는 자기 경영을 부분의 장애로 일축될 수 없는 삶 전반의 조건으로 접근한다.


노동 문제가 극의 중심에 놓여 있지 않은 <얼굴들>에서도 자기 경영의 전형으로 볼 수 있는, 일명 ‘1인 기업 사장’ 택배 기사인 현수라는 인물뿐 아니라, 직장을 그만두고 자영업을 준비하면서 동분서주하는 인물인 혜진, 일에서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지만 계속해서 실패하고 마는 인물인 기선까지 중심인물 모두에게서 소외와 내면화된 착취를 읽어낼 수 있다.


감독은 이런 인물을 통해 감히 강변하지 않는다. 특별한 서사와 감정적인 몰입으로 설득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얼굴들>이 유독 낯선 언어로 느껴졌던 까닭이다.


김소희 영화평론가는 아우구스트 잔더의 인물 사진이 독일의 전후 사회상의 지표가 된 방식으로 이강현의 작업이 2000년대의 한국 사회상을 드러내고 있다고 평가한다. <20세기 사람들>이라는 잔더의 일생의 프로젝트에 대해 알프레드 되블린이라는 독일의 소설가가 남긴 말이 그 방식을 잘 설명한다. “잔더는 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단지 복장이 아니라 면면을 남기는 행위를 통해 사회학적인 기술에 성공했다. (Sander has succeeded in writing sociology not by writing, but by producing photographs – photographs of faces and not mere costumes.)”

 

 

20세기 사람들.jpg

 

 

주석에 의존하지 않고, 면면의 영상으로 사회를 기술하는 것. 단순히 사람과 사건 앞에 카메라를 들고 서서 영상 기록을 남기면 그만인 일이 아니다. <파산의 기술記述>에 ‘앞으로 자라나는 벽’이 나온다. 벽에 전단지가 붙고, 그 옆에, 또 그 위에 다른 전단지가 붙고, 그렇게 계속되어 점점 두께를 더해가는. 전단지는 별달리 주목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벽은 계속 자라고 있고, 그것이 아마 현재가 끝없이 겹치는 실제의 세상을 살아가는 감각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중심 사건의 인과적인 고리를 제시하는 내러티브보다는 말이다. 감독에게는 그 감각을 드러내는 것이 본질에 닿기 위한 분투였다.


자신의 다큐 작업을 두고 감독은 세상에 넓은 그물을 쳐두고 기다리는 행위라고 일컬었다. 그 과정에서 내 것이 아닌, 타인의 투쟁의 포토제닉한 순간을 거르는 일이 고통이었다고 한다. 채집에 걸려든 어떤 전형의 개성과 몰개성 사이에서 분투하는 일이 그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았을까. ‘새털처럼 가볍게 영화를 찍고 싶은’ 그는 늘 전작의 작법을 탈피했고, 그래서 그의 세 영화는 제각기 새롭지만, 본질에 닿고자 하는 미끄러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언제나 같다.


거듭된 시학적 고뇌 이후의 <얼굴들>은 채집의 대상이 돌출하기보다 그물과 그물을 치는 행위 자체를 대상의 확장으로 드러내기에 이른다. 앞으로 자라나는 벽을 보듯 스치는 ‘가능한 얼굴들’을 느슨하게 묶는 일을 보여주는 것이다(<얼굴들>의 영제는 < Possible Faces >이다). 무수히 틈입할 수 있는 인물들이 스치며 영향을 주고받는 일, 그리고 그 가능한 양상을 한정하는 삶의 조건이 영화의 주인이다. 그 영향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래서 그 한계선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는 구태여 설명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전지적 관찰자와 같은 존재로 불쑥 끼어드는 ‘제3조종관’이 아니고서야, 기껏해야 더듬어 짐작할 도리밖엔 없는 일이니. 그 ‘알 수 없음’ 또한 영화의 주인이다.


그러니까, 감독은 지도를 만들면서도, 정작 지도를 이용해 지형을 간명히 읽어내는 일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안내를 기대했기에 조금은 애석하나, 그를 넘어서는 선물을 받았다. 지도 밖에 대한 이야기이다. <얼굴들>의 차기작으로 감독은 <지도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가제의 영화를 준비 중이었다. 지도를 만들려면, 역설적으로 “지도에도 없을 만한 곳”, “‘측량이전’의 영토”를 향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지리학자.png

 

 

시나리오 공동 작업을 하던 최아름 작가는 감독에게 거듭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베르메르의 <지리학자>라는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을 공들여 그리는 답이 돌아왔단다. 방 안에서 세상을 측량하는 자에게 찾아온 깨달음의 순간, 허공의 응시를 그는 가리켰다. 일견 파악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온갖 첨단 기술이 초정밀한 지도를 완성해 나가고 그것이 인간 존재 확장의 등치로 여겨지지만, 사실 지도는 의미가 부재한 모사에 지나지 않으며 그 속의 한 점에 불과한 인간은 실은 지도를 통해 어떠한 진실도 얻어낼 수가 없다는, 시지프스적인 탄식. 앎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원초적인 측량 행위를 언제까지고 계속하며 도달하기 전까진 존재하지 않는 미지를 찾는, 완수될 수 없는 임무. 그러나 실패하고야 마는 숙명에 대한 영화 쓰기를 감독은 계속했다. 그의 작업이 <지도제작자의 영화>로 기억될 수 있는 연유를 이제는 알겠다.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작가전 ‘메모리얼 이강현’의 일환으로 출간된, 책자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가벼운 이 책에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가능하고도 불가능한 삶에 대한, 한계를 직면하는 작업에 대한 믿을 수 없게 촘촘한 무게의 시학이 20명의 비평가, 프로그래머, 영화감독, 배우, 작가 등의 입을 빌려 진술되어 있다. 책의 마지막 글에서 백종관 감독은 이강현 감독을 떠올리는 일을 ‘말러를 듣는 시간’으로 표현한다. <파산의 기술記述>에서 언급되는 말러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는 의미의 부재를 드러내는 장치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감독에게도 말러에 귀 기울이는 마음이 중요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가능한’이 선언하는 불가능의 경계가 중요했던 사람. 지도 밖 미개척지로 끝내 향하는 일에 대해 들어볼 수 있었을까? 너머의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이 세상의 지형을 이해할 수 없어서 때론 깜깜했던 마음에 작은 등화가 되었다. 해소될 기약이 없어 더 오래 타오를 불이다.

 

 

지도를 만드는 사람.jpg

 

 

[이명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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