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직관적이고 풍부한 각색 -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1) [공연]

글 입력 2024.02.13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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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에는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의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리뷰는 총 2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 리뷰는 1편으로, 원작 희곡의 각색 방향에 대해 중점적으로 풀어나갈 예정입니다. 뮤지컬 공연의 무대와 상징들, 뮤지컬에서 무대와 객석이 어떻게 관계맺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2편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는 무대는 온통 검은색이다. 무대 벽면도, 무대 위에 놓인 세트와 소품도. 그 위로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중 ‘솔베이지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다소 무겁고 음울한 현악기 선율은 빛이 거의 들지 않는 듯한 검은 무대와 맞물려 관객으로 하여금 엄숙함과 경직됨을 느끼게 한다.

 

무대 위에는 검은 의자 세 개가 줄을 맞춰 반듯하게 놓여 있다. 무대 왼편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듯한 한 줄기 빛은 의자들을 선명히 비추며 그 위에 마치 창살 같은 바둑판무늬 창틀 그림자를 새긴다. 그 자리에 앉은 이들을 감옥과 같은 폐쇄적인 틀 안에 가두어 놓겠다는 것 같다. 조금만 시선을 돌려보면 무대의 세 면을 둘러싼 계단도, 중앙에 놓인 넓은 직사각형 단도, 의자 배열도 모두 직선과 직각의 이미지이다. 이는 엄격한 규율과 통제의 환경을 암시한다.

 

작년 8월 26일 개막한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는 스페인의 주요한 현대 극작가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의 1946년작 동명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국내에서도 몇몇 극단에서 공연화되었고, 다수의 대학교에서 학생 공연 레퍼토리로 자리 잡은 작품이다. 하지만 뮤지컬로 각색된 것은 세계 최초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특히 주 창작진으로 <사의 찬미>, <문스토리> 등 우수한 한국 창작 뮤지컬을 탄생시킨 작가이자 연출가인 성종완, 그리고 작곡가 김은영이 언급되며 관객들의 기대감을 높였다. 작품은 원작의 대사와 상징들이 가진 의미를 조명과 동선, 음악과 함께 감각적이고 직관적으로 확장한다.

 

이내 엷게 무대를 비추던 조명마저 꺼지고, 객석과 무대까지 완벽한 암전이 되고 나면, 학생들의 목소리가 하나하나 쌓이며 화음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멜로디에 맞춰 무대 곳곳의 조명이 차례로 켜지며 무대 세트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소리를 통해 열리는 풍경은 ‘돈 파블로 맹인 학교’의 학생들이 감각하는 세상 속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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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하고 강렬해진 세계관: 철의 정신

 

조명을 받으며 등장한 학생들은 무대의 딱딱하고 어두운 분위기와는 상반되는 발랄한 멜로디의 노래를 부르며 무대 이곳저곳을 활보한다. 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눈앞의 풍경들과 서로를 그려낼 수 있음을, 흰 지팡이를 쓰지 않고도 학교 안의 모든 길을 알 수 있음을 자부하며 과감하게 춤을 추고, 의자와 계단 위를 오르내린다.(M-01. 알 수 있어) 학생들은 자신에게 시력이 없다는 사실을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듯, 서로 대화를 할 때도 서로에게 서슴없이 ‘봤다’, ‘보인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동시에 공간의 동선을 모두 암기한 듯 무대 위 단과 계단의 모서리 윤곽을 따라 반듯한 직선으로만 걸어가고, 무대의 특정 지점을 찾아 90도 방향으로 걸음의 방향을 바꾼다. 이처럼 학생들의 움직임이 주는 부자연스러운 규칙성은 그들의 주장과는 다소 괴리감이 있다.

 

동선이 암시하듯 학생들이 누리는 자유는 역설적으로 엄격한 통제와 제한 안에서 보장된다. 학교의 우등생이자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리더, 까를로스가 극의 초반부터 말하듯, 학생들이 다치지 않을 수 있게 ‘설계된’ 체계 속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고, 늘 ‘다니던 길로만’ 다닐 때에 공포와 제약이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의 자유는 교장 돈 파블로와 그의 대리인 도냐 페피따에 의해 설계되고 지배되는 학교 내부의 폐쇄적 환경 속에서만 지켜진다. 하지만 ‘시력이 없다는 것이 일상 생활에 제약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돈 파블로 맹인학교’의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의 모습이 학교 밖의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오인하게 만든다. 또는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학생들은 자신의 한계와 불안감을 실감해야 하는 바깥 세상을 등진 채, ‘오직 우리만의 세상’이라 일컫는 학교 안에서의 안락함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학교의 규율을 거부하는 한 학생이 등장한다.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였음을 의미하는 흰 지팡이를 사용하는 학생, 이그나시오이다. 라틴어로 불을 뜻하는 ‘Ignis’에서 파생된 이름을 가진 이 한 명의 학생은 얼마 지나지 않나 작은 불씨 하나가 온 밭을 다 태우듯이 수백 명의 학생들이 오랫동안 유지해온 평화를 산산조각낸다. 이그나시오는 학생들에게 자신들은 ‘장님’이며, 그들이 보지 못해 알지 못하는 더 큰 세계가 있음을 일깨움으로써 모두를 ‘앞을 보는 것’에 대한 타오르는 고통과 갈망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그나시오의 첫 솔로곡(M-05. 모두 장님이니까) 장면은 이그나시오라는 인물과 그가 가져올 파장을 동선을 통해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이그나시오에게 건물의 구조를 외우게 하고, 흰 지팡이를 내려놓게 하려는 우등생 커플, 까를로스와 후아나를 뿌리친 그는 지팡이를 이용해 학생들이 학습한 경계 내의 길이 아닌 다른 곳으로 걸어간다. 그러자 학교 안에서 불가능한 것과 모르는 것은 없다고 자부하던 학생들은 순식간에 이그나시오를 찾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다. 지팡이를 손에 쥐지 않는다는 것은 ‘학교 바깥의 사람들과 동등하게 자유롭다’는 뜻으로 포장되기 쉽지만, 주어지고 학습된 세계 밖으로 나가는 것이 차단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학교 안에서 보장되어 온 기존의 평화와 행복을 지키려는 까를로스와, 학생들로 하여금 장애를 직면하고 지금까지 차단되어 온 세계를 인지하게 하려는 이그나시오 사이의 대립은 학생들을 분열시킨다. 이그나시오에게 설득된 학생들은 흰 지팡이를 사용하여 무대 위를 보다 자유로운 동선으로 활보하고 원하는 위치에서 마음껏 방향을 바꾼다. 이내 학생들은 자신들이 지금껏 의지했던 세상이 자신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행복, 평화를 가져다주었는지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뮤지컬은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유일하게 시력을 가진 존재이자 학교의 실질적 관리자인 도냐 페피따의 시선 속에 다 같이 모여 학교 규율을 암송하는 장면을 하나의 넘버로 만든다.(M-04. 철의 정신) 이는 원작의 곳곳에 흩어져 등장하던, 학교 내에 공유되던 사상들을 한 장면에 ‘규율’ 형식으로 집약시킨 것으로, 학생들이 도냐가 만든 세계 속에서 통제당하고 있음을 강렬하고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 규율들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장님이라 부르지 않는다. 우린 그저 앞을 못 볼 뿐이다.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우릴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우린 바깥의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을 우리 역시 할 수 있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을 깨달아 안다.

우린 불가능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가능한 것을 가능케하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그 어떤 것도 우릴 세상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우리의 자유는 우리의 정신에서 나온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철의 정신으로

 

    

규율에서 알 수 있듯이, 학생들은 자신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지워내며, 자신이 경험할 아픔과 부족함을 거부하고 회피하도록 유도된다. 또한 규율은 ‘자신의 자유는 자신의 정신에서 나온다’, ‘철의 정신으로 할 수 있다’는 표현 등을 통해 직설적으로 개개인의 정신과 의지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시력이 없는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이 살아가며 겪는 불편의 원인이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사회의 한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믿게끔 만드는 전략이다. ‘우린 바깥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표현을 통한 낙관주의적 눈속임 아래, 규율은 일차적으로 학생들로부터 자신이 사회 속에서 불편함을 겪고 있다는 진실을 인지할 기회를 박탈하고, 설령 인지한다고 해도 철저히 개인의 탓으로 돌리게 한다. 그렇게 학생들은, 자신을 오직 학교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도록 만든 학교 바깥의 불평등한 구조와, 도냐 페피따가 만든 체계를 의심하거나 뒤흔들지 못하게 된다. 더불어 ‘우린 불가능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규율은 직접적으로 계급구조와 불평등과 소외가 너무도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현 상태’에 대해 반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작품은 대사들을 통해 ‘본다’는 것을 ‘진실을 안다’는 것과 의미적으로 연결 짓는다. 이그나시오에게 설득된 미겔린이 ‘그 바보같은 낙관주의는 우리가 눈먼 것과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학생들이 겪는 이 모든 상황을 지적하는 핵심적인 대사이다.

 

특히나 극의 마지막 부분에 이그나시오가 의문스러운 죽음으로 제거됨으로써 그가 몰고 온 혼란은 사라진다. 까를로스와 도냐 페피따를 제외한 모든 학생들은 이그나시오가 누군가에 의해 희생당했는지, 그 여부를 보지 못했기에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그나시오가 학생들의 안전을 보장하던 학교의 규칙을 어김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다고 단정 짓고, 다시 예전의 ‘평화’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자유를 보장하는 듯 보이던 집단이 누군가 학생들을 향해 권력을 휘두르고, 학생 중 누군가가 희생당할 때에 유지될 수 있는, 극단적 통제 속의 집단임이 증명되는 셈이다. 이는 결코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학생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더 넓은 세상의 모습과 그 안의 진실들이기도 하고, 낙관주의적 눈속임 아래 그들이 누리는 자유의 방식에는 모순과 부조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진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강렬했던 지점은, 도냐 페피따가 객석을 바라보며, 이렇게 규율을 외우는 학생들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면서 학교의 우수성을 정당화하는 넘버를 하나의 ‘쇼’와 같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M-04. 철의 정신’은 유독 제 4의 벽 너머 관객을 향한 도냐 페피따의 퍼포먼스가 돋보이는 넘버이다. 배우의 깔끔한 고음과 몸을 들썩이게 만드는 중독성 있고 신나는 박자는 관객으로 하여금 쉽게 감탄하고 박수갈채를 보내게 만든다. 1막의 마지막 곡인 'M-11c. 철의 정신 reprise' 역시 어느 정도 그런 특성을 공유한다. 도냐 페피따의 카리스마 있는 연기와 학생들의 합창이 주는 폭발적인 에너지는 이 ‘멋진 장면’에 압도되어 큰 박수를 보내고 싶게 만든다. 극의 형식상으로도 관객은 자칫하면 학생들이 도냐 페피따의 낙관주의적 눈속임에 취하듯, 그 ‘쇼’에 홀려 무의식적으로 그녀와 그녀의 주장에 박수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각각의 의견에 균등한 무게 싣기: 까를로스

 

하지만 뮤지컬이 강렬하게 드러내는 이러한 학교 체계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은 자칫하면 처음부터 관객의 생각이 한쪽 의견으로 치우치게끔 하기 쉽다. 그래서 작품은 여러 방안을 통해 까를로스와 이그나시오 각각의 입장에 비슷한 무게를 실어 관객에게 주도적으로 고민할 기회를 열어준다. 뮤지컬은 까를로스의 주장이 한 개인을 위한 목표가 아닌 학생들 집단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그만의 방안이었다는 것을 더욱 강조한다. 또한, 관객이 까를로스의 ‘정서’를 충분히 따라갈 수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뮤지컬은 원작의 미겔린의 대사들을 가져와 까를로스에게 부여한다. 원작에서 미겔린은 유일하게 방학 동안 학교 밖의 일상을 즐기다 온 인물로, 극의 초반부에 학생들에게 자신이 오랜만에 지팡이를 사용해야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다시 편안한 집과 같은 학교로 돌아온 것을 기뻐한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학교 바깥 생활을 즐기고 온 것은 까를로스이다. 영화관, 쇼핑몰, 축구장 등등을 방문했던 경험을 말하던 까를로스는, ‘늘 벼랑 끝을 걷는 기분이었고, 그곳의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까를로스는 이그나시오를 제외한 학생들 중, 바깥 세상은 학교 안의 세상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과, 시력이 없는 사람으로서 밖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소외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 된다. 이 지점이 극의 초반부터 드러남으로써 극의 구조는 일방적으로 이그나시오가 까를로스를 오랜 무지에서 앎으로 이끄려는 형태보다는, 한 집단이 처한 현실을 알고 있는 두 인물이 집단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서로 다른 대응 방식을 주장하는 형태임이 더 견고해진다.

 

또한 뮤지컬은 관객이 까를로스의 시각을 따라가게 하며 집단의 리더로서의 무게를 짊어진, 평생동안 믿어온 가치가 무너진 한 개인의 정서를 공유할 수 있게끔 한다. 까를로스는 어떤 한계가 있는 관념 그 자체의 대변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커다란 체제에 휩쓸린 살아 숨쉬는 작은 개인이기도 하다는 점이 더욱 강조되는 것이다. 뮤지컬은 이그나시오의 주장과 갈망을 먼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원작에 비해 이그나시오의 직접적인 등장을 통한 발언을 일부 삭제하고, 그의 주장으로 인해 혼돈에 빠진 학생들과, 이그나시오로 인해 ‘앞을 보는 것’을 갈망하게 된 미겔린의 욕구를 먼저 드러낸다. 불안정한 학교의 모습에서부터 1막 후반부의 ‘결투’장면의 이그나시오의 의견을 추적해 나가도록 장면을 배치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로 인해 관객들의 관람 경험은 학교 상황을 인지해나가는 까를로스의 시각에 더 가까워진다. 2막에서 역시 이그나시오에 의해 흔들리고, 그를 학교에서 떠나게 하기까지 까를로스의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하던 것과 맞물려, 원작과는 다르게 결말부를 까를로스 시점의 환상으로 처리한다. 또한 뮤지컬의 가장 마지막 장면은 원작과는 다르게 추가된 것으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까를로스가 '보인다'라는 외마디 대사를 남긴 채로 막을 내린다.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는 그 누구도 분명히 알 수 없다. 뮤지컬은 극이 끝나고서도 관객 개개인의 주체적인 사고를 유도하려는 대사를 까를로스에게 부여함으로써 관객이 자연스럽게 까를로스의 입장을 반추해볼 수 있게끔 이끈다. 이그나시오의 논리에 동조하게 되는 만큼이나 까를로스의 정서에 가까워진 관객들은 단순히 까를로스와 이그나시오, 두 입장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 없게 된다.

  

 

인물의 생략과 분명한 권력 구조: 돈 파블로와 도냐 페피따

 

또한 뮤지컬에서는 원작에 등장한 두 인물을 삭제한다. 학교의 교장이자 시력이 없는 인물인 돈 파블로와, 시력을 가진 이그나시오의 이버지이다. 학교 ‘외부’의 앞을 보는 이를 대표하는 이그나시오의 아버지는 아들을 걱정한다는 명목하에 이그나시오와 학교 학생들을 그저 정안인과 동등한 것을 할 수 없는 ‘불쌍한’ 존재로 규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또한 극의 초반부에 아들을 학교에 맡겨둔 채 떠난 후 단 한 번도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 인물은 잘못된 ‘사랑’을 바탕으로, ‘아들’로 상징되는 다음 세대가 더 많은 것들을 동등하게 누릴 수 있게끔 하는 변화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채, 학교 체제의 눈속임에 넘어가 무책임하게 그들을 방치하는 기성세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극중 유일한 학교 외부인이라는 점에서, 무대 밖 객석에서 극의 전 과정을 외부인으로서 바라보는 관객 개개인의 삶의 태도를 지적하기도 한다. 뮤지컬에서 이 인물의 직접적인 등장이 생략되고, 도냐 페피따가 이 인물에게 하는 원작의 대사가 객석을 향해서 하는 것으로 바뀜으로써 얻는 효과는 다음 편에서 무대와 객석 간의 관계를 다룰 때 더 자세히 서술하겠다. 간략하게는 이 역시 관객이 좀 더 입체적으로 생각하며 극의 전개를 따라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원작에서 이그나시오의 아버지에게 학교라는 작고 통제된 세계가 이그나시오를 위한 최선의 환경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는 인물이자, 학교의 우수함을 정당화하며, 학교의 실패를 막기 위해 이그나시오가 떠나도록 조치를 취할 것을 까를로스에게 명령하던 인물은 교장 ‘돈 파블로’이다. 그가 눈이 먼 인물로 설정된 이유는, 스스로가 세운 학교의 체계가 옳다고 스스로에게 속아 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는 인물인 도냐 페피따의 경우 돈 파블로에게 학교 상황을 보고하는 조력자일 뿐이다. 이그나시오를 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까를로스의 행위를 유일하게 목격하고도 함구함으로써 스스로 ‘장님’과 같이 시력을 무력화시키는, 진실을 보지 못하는 지도자 옆의 무기력한 동조자들을 그린다. 뮤지컬에서도 돈 파블로를 교장 자리에는 위치시키기는 한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유명세를 얻어 자주 자리를 비우는 인물로 그리며 극 중 단 한 번도 등장시키지 않는다. 학생들이 돈 파블로 맹인학교의 존재를 모르던 이그나시오를 향해 ‘돈 파블로를 모르다니’, ‘딴 세상에서 온 거 아냐?’라는 대사를 나누는 데에서 그 유명세가 어느 정도인지 드러난다. 하지만 돈 파블로는 등장은커녕 극의 후반부, 이그나시오의 죽음이라는 학교와 학생들의 안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할 때 조차도 연락이 닿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정치적인 명예와 유명세가 시야를 가려 실질적으로 집단을 돌보지 않는 지도자를 꼬집는 듯 싶기도 하다. 또한 그가 학교 밖에서, 관객의 시야가 닿는 무대 밖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인물이 됨으로써, 극 중 일어나는 일들과 드러나는 문제점들이 비단 돈 파블로 맹인학교라는 특정 집단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돈 파블로라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음에 따라, 뮤지컬에서 이그나시오의 아버지에게 전화로 학교가 얼마나 우수한지를 정당화라고, 실질적으로 학생들을 관리하며 통제하는 인물은 도냐 페피따이다. 시력을 가진 인물인 도냐 페피따가 훨씬 주체적인 인물로 그려짐으로써, 학교의 관리자이자 어른인 도냐와 학생들 사이에 생기는 명확한 위계는 시력을 가진 이와 가지지 못한 이의 권력관계를 극의 중심부로 끌고 들어온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체계가 발생하는 원인을 이그나시오의 입을 통해 직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정 사람들이 시력의 가짐으로써 시력이 없는 이들을 그들의 '아래'에 위치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특별한 재능을 가졌거나, 선행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개개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이다. 이는 개인의 노력의 산물과는 별개의 요인을 기준으로 집단을 구분하고 계층화하는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로 확장된다. 물론 도냐 페피따는 이 지점을 가리고 자신의 체제를 견고히 하기 위해 ‘철의 정신’이라는 개개인의 의지를 내세우고 있지만.

 

도냐 페피따의 인물 설정에 있어서 원작보다 훨씬 더 눈에 띄는 점은, 관객이 대사의 흐름에 있어 어색함을 느낄 정도로 ‘고전’을 인용한 비유를 많이 사용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도냐 페피따는 이그나시오에게 ‘허황된 것을 꿈꾸며 학생들을 혼란에 빠뜨리지 말라’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 입센의 ‘페르귄트’ 이야기를 들려준다. 더 나아가 까를로스에게, '이그나시오에게 흔들리지 말고 그가 학교를 떠나도록 하라'는 것을 명령하기 위해 동일한 이야기를 활용한다. 도냐 페피따의 설명에 따르면, 평생을 허황된 꿈을 꾸며 살던 페르귄트는 단추공의 모습을 한 사자를 만나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죽이는 것, 그리고 주인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는 도냐 페피따가 지배하고 있는 학교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죽음과 같은 형벌이 기다린다는 협박이다.  페르귄트 이야기는 극의 후반부에 이그나시오가 (아마도 자신을 ’단추공‘이러고 지칭한 까를로스에 의해) 실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학생들의 상황과 겹쳐진다. 도냐 페피따가 까를로스에게 이그나시오를 학교에서 내보낼 것을 명령할 때 사용하는 또 하나의 것은 '예수의 비유'이다. 이그나시오가 마치 ‘박해받는 예수’의 흉내를 내며 추종자들을 만들고 있다는 까를로스의 말에, 도냐 페피따는 ‘예수를 처형한 것은 로마 제국이 아닌 그가 지키려던 유태인들’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까를로스와 학생들의 힘으로도 교묘하게 이그나시오를 쫓아낼 수 있음을 설득한다. 이는 결국 이그나시오의 의문스러운 죽음 이후, 미겔린이 의도치 않더라도 스스로 이그나시오가 홀로 사고사 했다는 논리를 만들고, 학생들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음으로써 이그나시오의 죽음을 없던 일로 만든다는 점에서 학생들의 현실과 이어진다. 이렇게 도냐 페피따가 비유를 많이 활용한다는 점은, 비슷한 양상의 사회적 모순이 오래 전부터 반복되어 왔음을 뜻하기도 하고, 도냐 페피따의 사고방식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녀는 오래 전에 만들어진 이야기에 자신의 권위를 의탁하고 있다. 이는 그녀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 태도를 부각시킴과 함께, 이그나시오의 주장과 같이 기존 의견을 반박하는 새로운 입장이 나타날 때 그녀가 쌓아온 것이 무너져내리기 쉽다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이는 그녀의 ‘자의성’을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자신의 뜻대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데 능수능란한 도냐 페피따의 모습은 그녀가 학교 내에서 '볼 수 있음'으로 인해 독점하고 있다 여겨지는 진실들이 진짜 ‘진실’인지 의문을 가지게 한다. 또한, 도냐 페피따는 학생들의 생활을 총괄하고 있는 인물이자, 유난히 제 4의 벽을 깨고 관객을 향하여 자신의 주장에 대해 설득하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인물이다. 그러한 도냐 페피따의 대사에 드러난 인용과 비유의 부분들은 무대 위로 보이는 이야기에 우화적인 이야기를 연결시킴으로써, 관객들에게 무대 위의 이야기가 특정한 시대와 공간에 제한된 이야기가 아닌 하나의 관념적 비유로 전달될 수 있게 한다. 이는 이야기가 극장 밖으로 확장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공연은 구조적으로도 이 부분을 실현하고 있다. 도냐 페피따는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중 '솔베이지의 노래'를 자주 틀어놓으며, 그 곡을 변형하여 학교 종소리로 사용할 정도로 페르귄트 이야기를 학생들의 생활 속에 겹쳐놓는 인물이다. 극의 시작 전과, 마지막 장면 이후 커튼콜에는 '솔베이지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는 돈 파블로 맹인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연극 전체에 또 하나의 이야기 층위를 덧대어 작품 전체가 단순한 사실주의적 풍경으로만 여겨지지 않도록 한다.

     

 

안전함과 연대 사이 길잃은 '사랑': 후아나

 

뮤지컬이 후아나를 대하는 태도도 눈에 띈다. 뮤지컬 각색에서는 원작에서 까를로스와 이그나시오가 후아나를 '이성'으로서 사랑함을 암시하거나, 이 지점을 인물 간의 주요한 다툼과 설득의 동기로 삼는 대사들을 상당 부분 삭제했다. 이는 인물들의 후아나라는 한 이성을 향한 개인적 관계로서의 사랑의 양상을 약화시킨다. 또한 후아나가 직접적으로 발언하거나 행위를 하지 않는 장면에서도 후아나를 무대 중앙에 위치시키고 중점적으로 조명을 비추어 인물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전면에 드러내거나 (M-09. 싸워야 해), 결말부(M-22.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의 환상성이 짙은 부분에서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혼자 빛을 보지 못하며 뒤늦게 등장하는 인물로 그림으로써 후아나라는 인물의 존재 자체가 가진 상징적인 의미를 강조한다. 이는 극의 내용을 보다 은유적이고, 원작에 비해 인물의 역할이 오늘날 관객에게 불편하지 않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측면이 있지만, 동시에 캐릭터의 매력을 다소 반감시키는 측면도 있다.

 

후아나는 학생들 사이에서 ‘선한 영향력’의 중요성을 직접적으로 강조하는 인물이다. 그 중에서도 '사랑'과 '우정'이라는 관념을 대사 전반에 내세운다. ‘폭력은 어느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와 같이 학생들 전체의 우정을 유지하는 데에 기반이 되는 기본적인 도덕 규칙을 직설적으로 언급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학생들이 전학생 이그나시오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신을 가지지 못할 때, 그를 ‘진심 어린 우정’으로 품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후아나의 첫 솔로 넘버로, 후아나가 극에서 가진 의미를 드러낸다.(M-06. 진심 어린 우정) 또한 후아나는 이그나시오에게 ‘너를 사랑해’, ‘너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 줄게’ 라고 말함을 통해 이그나시오가 집단에 포용될 수 있도록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M-07. 안녕)

 

조직 안에서의 위치상으로도 후아나는 까를로스의 연인이고, 까를로스와 함께 도냐로부터 '가장 훌륭한 학생'으로 불리고 있으며,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다. 후아나가 보여주는 말과 행동들은 집단이 추구하는 ‘사랑’ 그 자체인 셈이다. 후아나가 이러한 관념적 가치를 상징하는 경향이 생기면서 까를로스와 이그나시오가 후아나와 맺는 관계는 개인적인 애정을 넘어서서, 두 인물이 각자의 입장을 주장하는 데 있어서의 ‘대의’를 강조하게 된다. 결국 두 인물은 결국 같은 학교의 친구들에 대한 ‘사랑’으로 모두를 위한 ‘더 선한’ 방향을 찾아 추구하는 것이다. 마지막 두 인물의 논쟁에서 각자의 선택에 있어 공통적으로 ‘친구, 우정’이라는 가치가 중요시된다는 점에서 두 인물이 추구하는 지점은 분명해진다.(M-21. 그 나름의 의미를 찾아)

 

뮤지컬에서 후아나의 변화는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 변화와 결을 같이 가져갈 수 밖에 없다. 이그나시오의 등장 전후로 ‘사랑’과 ‘우정’의 의미는 변화된다. 이그나시오가 혼란을 가져오기 이전, 까를로스가 주도적으로 이끌던 ‘사랑’과 ‘우정’의 경우 현실의 불안과 고통을 잊게 하고, 그 순간의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 이 지점이 후아나의 역할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각각 1막과 2막 초반부이다. 1막에서 바깥 세상을 경험한 까를로스가 불안감을 이야기할 때, 그를 그리워히던 연인으로서 후아나는 ‘여긴 안전해. 여기서 넌 완벽해’라고 위로하며 까를로스가 학교의 체계 안에서 다시 안정을 찾도록 도와준다.(M-02. 우릴 위한 세상) 또한 이그나시오에게 영향을 받아 돌아선 학생들로 인해 절망한 까를로스에게 후아나는 ‘변한 건 없어.' '난 항상 네 곁에 있어’라고 다독이며 그가 본래의 자리를 찾고 지킬 수 있도록 의지를 준다.(M-14. 변한 건 없어) 도냐가 까를로스만큼은 아니지만, 후아나를 아끼고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후아나에게서 실천되는 사랑이 현실의 고통을 회피하고 가리는 데에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특히 후아나가 학교를 떠나려던 이그나시오에게 '사랑한다' 말함으로써 붙잡는 이유는, 이그나시오를 각별히 신경써 달라는 도냐 페피따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고, 이그나시오가 학교를 떠남으로써 학교의 실패가 드러나고 유지해 온 가치가 의심받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아나는 극의 후반부 이그나시오에게 마음이 흔들린다. 후아나가 이그나시오와 키스한 이후 까를로스는 더이상 자신의 '우정'을 실천하지 못한다. 까를로스의 호소는 학생들에게 자신들을 위협하는 끔찍한 폭력으로 여겨진다. 또한, 까를로스가 그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며 다가온 엘리사를 향해 '이그나시오를 이기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를 동정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매몰차게 몰아내는 데에서도 그의 우정이 실천되지 못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그나시오가 주장하는 '사랑'과 '우정'은 이전까지 학생들이 알던 것보다 더 깊은 층위의 의미를 가진다. 비극에 등을 돌리고 허황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닌, ‘아픔, 고뇌, 슬픔’을 솔직하게 마주하고 공유하는 ‘연대’에 가까운 사랑이다. 후아나는 그것이 진심이었던, 진심이 아니었던 간에 이그나시오가 말한 그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그나시오가 추구하는 사랑의 가치를 집단 내로 유입시킨다. 이그나시오는 그를 포용해준 후아나를 통해, 자신이 가진 한계를 비관적으로 인지하는 데에 빠져있는 모습에서, 같은 아픔을 가진 학생들과의 연대를 통해 자신도 바깥 사람들이 즐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동등하게 누릴 자격이 있다는 희망을 가진 모습으로 변화하게 된다. 후아나에게는 이처럼 두 가지 '사랑'의 의미와 그에 따른 서로 다른 역할이 중첩되는데, 이는 후아나를 혼란과 고통으로 밀어넣는다. 끝까지 까를로스의 곁에서 흔들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엘리사에게 후아나가 '날 다 안다는 듯이 말하지 마'라며 참아온 답답함과 울분을 을터뜨리는 장면은 후아나의 내면에서 두 가지 관념이 충돌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뮤지컬에서는 원작에 비해 후아나의 '선행'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또 후아나 자신이 이를 인정받았음을 확인하려 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대사가 눈에 띈다. 진심 어린 우정으로 이그나시오를 학생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뭐든 할 수 있다'는 의지를 심어주자고 주장하는 후아나에게 학생들은 ‘까를로스가 왜 너를 사랑하는지 알겠다.’, ‘넌 정말 멋진 사람이야’라는 반응을 보인다. 후아나가 절망에 빠진 까를로스를 찾아가 그의 자리를 지키라고 말하며 위로와 용기를 전할 때 역시 까를로스는 '넌 정말 멋진 사람이야'라는 답을 건넨다. 이 때 더 나아가 후아나는 '그게 네가 날 사랑하는 이유고'라며 까를로스로부터 자신이 실천하는 '사랑'의 가치를 확인받으려 한다. 이는 후아나가 이그나시오의 등장 전까지 오랫동안 실천해온 '사랑'의 의미와 발현이 폐쇄된 집단 내부에서의 인정과 명예와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후 후아나가 자신이 지켜온 사랑을 의심하는 과정은 관객들에게 한 집단의 가지관에 맞추어 그 체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목적의 사랑이 언제나 진정한 의미의 것인지를 묻는다.

 

극의 후반부 이그나시오가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 학생들은 그의 죽음이 사고사였다고 결론짓고 떠난다. 하지만 후아나만큼은 이그나시오의 시신 근처를 지키는 모습을 보이며, 까를로스와 도냐 페피따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이는 이그나시오의 죽음 이후 까를로스에게 사과를 전하며 현실에 빠르게 다시 순응하는 원작에서의 태도와 분명한 차이를 보이며, 작품의 연출이 객석에 전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한다. 익숙한 길을 통해 기숙사로 돌아가는 다른 학생들과는 다르게, 후아나는 제자리로 돌아가는 길을 헤맨다. 도냐는 학생들을 위한 작은 세상인 학교를 견고히 유지한 것이 학생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 믿는다. 그리고 이그나시오의 죽음을 초래했을 것으로 보이는 까를로스의 행위에 대해 함구함으로써 학교와 까를로스를 지키는 것이 그를 사랑하는 방법이라 믿는다. '나는 네 엄마나 다름 없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까를로스는 그런 도냐에게 분노와 조소를 보임으로써 그러한 사랑이 허상이었음을 지적한다. 까를로스 역시 이그나시오가 죽음을 맞이하자 그토록 쉽게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태도에 크게 절망하며 그들에 대한 우정을 잃어버린다. 학교를 지배하던 이들의 기반이 되던 사랑과 우정은 무너지고 그 가치들은 어느 방향을 향해야 할지 길을 잃는다.

 

극의 마지막 부분, 까를로스는 마침내 이그나시오가 말하던 갈망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받아들이고 환상을 그려낸다. 학생들 모두가 마음껏 앞을 보며 시력을 가진 이들이 누리는 평범한 일상을 즐겁게 영위하는 모습을. 하지만 후아나는 그들과 섞이지 못한 채, 홀로 난간을 손으로 더듬으며 뒤늦게 무대로 등장한다. 이제 이그나시오는 사라졌으므로 그가 주장한 연대를 향해 이끌어줄 이는 남지 않았고, 까를로스 역시 이전의 의지와 믿음이 무너진 채 죽음을 선택하며 학생들을 떠난다. 진정으로 공동체를 위한 방향의 '사랑'이 어디로 향해야 할 지 결론을 내려줄 이는 남지 않은 채로 공연은 막을 내린다. 관객은 무대 밖 자신의 일상 속에서 그 방향을 스스로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가장 일상적인 풍경 안에서 후아나는 여전히 길을 헤매고 있으니.

 

 

[박보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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