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운이 좋았다

영화 <다음 소희>/정주리
글 입력 2024.02.14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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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서 10대 소녀 자살'

 

안타깝지만 일상적인 헤드라인을 볼 때, 우리는 그와 완전히 격리된 완전무결한 존재가 된다.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며 “그거 봤어?”로 시작하는 대화의 결론은 늘 같다.


‘우리는 좋은 사람이야’


그제서야 오늘의 토픽은 소멸된다.


‘좋은 사람’임을 자처하는 이들에게 <다음 소희>는 달갑지 못할 영화다. 영화에는 107명의 배우가 등장하고 그들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기한다. 선한 이와 악한 이가 있고 방관하는 이, 무지한 이도 있다. 개중 누가 선한 이이고 악한 이인지를 알기란 어렵지 않지만, 개중 누가 나의 배역인지를 알기란 쉽지 않다. 이 영화가 달갑지 못할 이유는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2017년 전주. 통신회사의 콜센터직으로 특성화고 여고생 소희(김시은)가 현장실습을 나갔다. 나도 이제 사무직 여직원이라며, 인센티브를 왕창 벌어 부자가 되겠다며 좋아했다. 선생님은 드디어 우리도 대기업 보낸다며, 부모님은 역시 대기업이라며 좋아했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렴 어떤가. ‘취업하면(대학 가면) 고생 끝’과 같은 류의 속담이 현실이 될 것만 같았다.


소희가 죽었다.

 

분명 편하게 앉아 전화만 한다 했는데, 분명 열심히 일한 만큼 돈을 더 벌 수 있다 했는데, 선생님이 그랬는데, 팀장님이 그랬는데, 그랬는데 거짓말이었다. 소희가 배치된 ‘해지방어팀‘이란 서비스 해지를 원하는 고객에 낮이고 밤이고 스무 번 넘게 전화를 돌리며 온갖 욕설과 희롱을 대가로 결국은 지쳐 포기하게 만드는. ’욕받이‘ 부서다. 그 지긋지긋한 감정노동과 초과근무에 돌아오는 건. 그런 일이나 한다는 멸시와 최저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급뿐. 약속된 인센티브는 언제는 실습생이라, 언제는 네가 그만둘까봐 나중에 지급되었다. 와중에 실적은 언제나 사무실 맨 앞에, 가장 크게 전시돼 그곳의 숫자를 따라 모든 종류의 호의와 권리가 결정되었다. 부조리에 대한 항변과 힘들다는 호소는  

’나약한 요즘 애들‘로 분리되었다. 동료도, 상사도, 친구도, 선생도, 부모도. 소희가 사는 세상 속 사람들은 모두 문제를 외면했다.

 

소희는 죽었다.


<다음 소희>는 지독하리만치 현실적인 영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소희의 죽음을 쫓는 형사 유진(배두나)의 존재만큼은 지독하리만치 현실적이지 못하다. 그래서일까 ‘막을 수 있었는데 왜 보고만 있었냐’며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유진을 바라보는 시선들에는 한결같은 당혹감이 묻어있다. 분명 정의의 사도여야만 하는데, 그런데. 유진은 훼방꾼일 뿐이다.


유진은 꾸준히, 유일히 소희의 발자취를 뒤쫓는다. 그 발자취를 따라 찾은 회사와 학교.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곳, 그들을 향해 묻는다. 왜 고등학생이 이런 곳에서. 왜 고등학생이 그런 처우를. 왜 애를 이런 곳에. 왜 애한테 이렇게 모질게. 왜 돈은 안주고. 왜 못 알아차렸고. 왜 이렇게 쉽게. 왜 이렇게 편하게. 그렇게 왜, 왜, 왜, 왜를 묻다 께름직한 뒤통수 방면에는 한결같은 ‘그게 내 책임이냐’는 당혹스러운 눈과 ‘원래 애가 문제가 많았다’는 뻔뻔한 입. 분노에 못 이겨 따지기도, 한대 갈기기도 하지만 소희가 그랬던 것처럼 유진에게 찾아드는 건 무력감뿐이다.


이 영화가 지독하리만치 현실적이며 잔인한 결정적 지점은 그 무력감에 빠지다 보면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럴만도 한 것이 한국 사회은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매정하고 전투적으로 가르친다. 비정상 속 정상으로 살아남는 방법과 입맛에 따라 정상을 비정상으로 격리시키는 방법. 약삭빠르게 그에 동조하거나 방관하는 방법. 그리고 모든 종류의 부조리를 합리화시키는 ‘여기 사회야!’ 그래서 서러웠던 초년생의 기억에 빠지다보면 ‘나 또한 소희였구나’라는 생각의 흐름은 지극히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그리고 한층 나아가 기필코 ‘다음’ 소희를 만들지 않겠거니.


그렇게 집으로, 학교로, 학원으로, 군대로, 직장으로. 그러면 원점이 된다. 영화 속 사람들처럼 비정상에 전염되지 않고 정상으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하다보면 말이다.


그러니까 ‘다음’ 소희를 만들지 않겠거니라는 결심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다음 콜센터’, ‘다음 동료’, ‘다음 팀장’, ‘다음 선생’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실천. 안타까운 마음이나 충동적인 결심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다음 소희>만 보더라도 소희가 죽기 몇 달 전 해지방어팀의 팀장(심희섭)이 자살했다. 쉽고 빠르게 그리고 그 죽음에 내가 없게. 그렇게 한 사람의 죽음을 삭제하는 데에만 몰두한 덕에 그의 죽음은 소희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우리는 이 바보 같은 짓을 되풀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일말의 판타지로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만든 소희들은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운이 좋았다.

 

 

[윤제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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