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의미에서 의미를 개척하는, 낙천적 패배주의 [문화 전반]

글 입력 2024.01.15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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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자우림이라는 아바타를 통해서 그동안 많은 얘기를 해왔죠. 기쁨과 절망, 정의와 모순, 분노. 그 기저에는 항상 ‘낙천적인 패배주의’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여전히 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하고 있고요. 가슴 안에는 폭풍이 가득 차 있다고요. (…) 제가 알아봤는데 사람은 평생 그렇게 살더라고요. 죽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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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25주년을 맞이해 기획한 기념 콘서트에서 보컬 김윤아는 밴드 자우림의 아이덴티티를 이렇게 회고한다. 낙천적 패배주의. 희망과 패배감이 결합된 모순어가 과연 어떻게 성립될 수 있다는 말인가 싶겠지만, 사실 이 개념은 나름 일리가 있다.

 

삶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에 내 삶을 내 식대로 꾸려가도 괜찮다는 긍정과 안심이 곧 낙천적 패배주의의 요지다.

 

<샤이닝>과 <이카루스>에서 현시하듯, 삶은 “풀리지 않는 의문들 정답이 없는 질문들”로 범람하며 때때로 “아무리 몸부림쳐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무력만을 안기기도 한다.

 

죽을 때까지 마주해야만 하는 미로의 연쇄 같은 삶 속에서 자우림은 그 안에서 골몰하는 고독자로 살바에 새로운 길을 창조하는 개척자가 돼보는 건 어떠냐는 제안을 자주 건넨다.

 

“나도 몰래 나를 내버리”기도 하고(<있지>),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 지루해 난 하품이나 해 뭐 화끈한 일 뭐 신나는 일 없을까”라며 발칙한 상상을 실현하기도 하고(<일탈>), “신경 쓰지 마요 그렇고 그런 얘기들 골치 아픈 일은 내일로 미뤄버려요 인생은 한 번뿐 후회하지 마요 진짜로 가지고 싶은 걸 가져요”, “지난 일은 모두 다 잊어버려요 기회는 한 번뿐 실수하지 마요 진짜로 해내고 싶은 걸 찾아요 용감하게 씩씩하게 오늘의 당신을 버려봐요”라고 청자에게 주문하기도 한다(<매직 카펫 라이드>).

 

그렇게 자우림은 자신을 세계에 던지며, 던져질 것을 요구한다. 혹시 이들의 행보가, 전언이 그저 무모하고, 이기적인 것이라고 여겨지는가. 그렇다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 줄여서 일명 에에올은 또 어떻게 우리를 설득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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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는 크게 두 개로 나뉜다.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 쉽게 말하면, 수동적 허무주의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할 만한 절대적인 진리나 의미 자체가 없기에 모든 노력은 다 부질없다는, 비관성이 짙다. 극 중에서는 알파 행성에서 절대악이 된 ‘조이’가 그 세계를 관장하고, ‘에블린’을 회유한다. 반면 능동적 허무주의의 경우, 수동적 허무주의와 전제는 동일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태도에 있어 다르다. 의미는 좇는 것이 아니라 개척하는 것이라는 게 요지다.

 

자우림의 곡들과 상통하는 메시지다. 다만 다른 점은, 자우림이 주로 ‘나’라는 개별 주체의 실존에 대해 천착해왔다면, 에에올은 ‘나’와 ‘타인’의 관계 속에서 실존의 의미를 정의하려 한다는 것이다.

 

대혼돈의 멀티버스 속에서 에블린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초월성을 경험하지만 이내 꿈, 명예, 영생 등 다양한 선택지들을 제쳐두고, 가족 즉 ‘사람’이라는 의미를 선택한다. 즉 낙천적/능동적 패배주의의 기조가 마냥 돌발적인 모험이나 일탈만을 지시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삶의 의미는 익숙한 대상의 재정의를 통해서도 창출된다.

 

양귀자의 <모순> 역시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 실존의 의미를 묻는다. 당시 시대상으로 결혼 적령기에 해당하는 주인공 ‘안진진’은 낭만적이지만 가난한 남자 ‘김장우’와 현실적이지만 끌림은 덜한 ‘나영규’ 사이에서 결혼 상대를 고민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주 김장우 같은 남자와 결혼해 고된 삶을 살아 괴팍해진 자신의 엄마와 나영규 같은 남자와 결혼해 평탄한 삶을 살아 온화한 쌍둥이 이모를 판단의 준거 삼아 자신의 미래를 그려 본다.

 

그러나 삶이란 모순의 결정(結晶)인 법이다. 치매, 중풍에 걸린 남편을 외벌이로 병수발해야 할 처지에 놓인 엄마는 본인에게 닥친 역경을 동력 삼아 살아가는 반면, 예외 없는 삶 속에 고독하게 늙어가던 이모는 그 무력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하기 때문이다.

 

이에 안진진은 이렇게 고백한다.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이모는 죽음으로 내게 가르쳐 주었다. 이모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나는 김장우의 손을 잡아야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이모의 죽음이 나로 하여금 김장우의 손을 놓아버리게 만들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보였던 이모의 삶이 스스로에겐 한없는 불행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하게 비쳤던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이었다면,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295쪽)

 

어떤 사람을 택한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하는 것이며, 나에게 더 중요한 의미를 취하고 덜 중요한 의미를 버리는 것이다. 삶이 모순뿐이라면, 다시 말해 다 무의미하다면, 그런 방식으로도 삶을 개척해갈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간에 극단적인 건 위험하다. 삶은 결국 무상한 것이니 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으로 혹여 이 글을 이해하지는 않길 바란다. 외부로부터 답을 강구하고자 하는 삶뿐 아니라 결국은 모든 것이 허무할 뿐이니 무기력하게 사는 삶 역시 수동적인 것이니 말이다. 적당한 허무를 빌려 여유로움을 되찾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개척하려는 태도의 간헐적 필요 정도를 피력하고자 한 자구책 정도로 일러 두고 싶다.

 

 

[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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