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날

글 입력 2023.12.29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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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지나간 자리에 새겨지는 깊이를 선망했다. 날의 이름도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면서.

 

몇 번이고 맞부닥치면서도 깨지지 않을 유리의 반짝거림을 떠올렸던 일이 시작이었을까. 결국 날 하나를 만들어냈다.

 

유리잔이 부딪히며 나는 소리만큼이나 선명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날붙이의 이름은 흐릿했다. 용도 역시 미정으로, 그 날의 정체를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모호하게 예리하다는 말만큼이나 이상한 날이었다.


다행히도 이상한 금속은 본인이 있어야 할 곳을 알고 있었다.

 

마침 자침이 빙그르르 돌았고, 어느 방향으로 정렬되다가 멈춰서서 떨었다. 날은 직감했다. 내게는 방향 감각이 없으니 꽤 오랫동안 비틀거리겠다고.

 

날은 그래서 비틀거렸고, 몇 번이고 주저앉았다. 때로는 차가운 물을 먹으며 아스러지기도 하며 자신의 등을 선명히 마주했다. 날은 무엇이든 명확하게 그어버리는 습성이 있었다.

 

심지어 제 모습까지도. 군더더기 없는 매끄러운 단면은 분명 유려했지만 배타적이라 날은 본인이 익숙한 것만을 사랑할 수 있었다. 날은 조용히 금을 그어 샛길이라 이름 붙였다.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정체들을 조용히 지켜보고, 쉽게 쳐내지 않겠다고. 날이 다듬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날은 웬일인지 눈이 흩날렸고, 멀리서부터 유성우가 쏟아졌다. 눈가루가 단단한 금속 위로 내려앉아 날이 우둘투둘해졌다.

 

날은 평소처럼 군더더기를 털어버리고 땅덩이를 아주 깊게 그으려다가 멈췄다. 잠시간 쏟아지는 유성우를 온전히 비추는 거울로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찬란한 빛을 냈다.

 

날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떨어져 삶의 균열을 내는 운석이 되었다.

 

정말이지 이상한 날.

 

 

[이유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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