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가끔은 나 돌아가고 싶어 - 딜쿠샤

가끔은 돌아가고 싶어, 어머니 당신께로
글 입력 2023.12.16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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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정동극장] 딜쿠샤_포스터(12.7-30).jpg

 


덕수궁 길은, 어딘가 쓸쓸한 기억으로 내 마음속에 있었다. 아마 이수영 '광화문 연가' 탓이리. 아직도 이리 그 선율에 선한 것을 보면 분명 그 이유일 거야. 눈 내린 이 길을 같이 걸은 연인은 헤어진다고 해. 참 섧기도 하지.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덕수궁은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다. 북창동과 시청 광장을 지나면 곧바로 돌담길, 횡단보도를 두 개만 지나면 나오지. 평일 18시, 중구에는 퇴근하는 회사원들의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사람들과 반대방향으로 걸어서, 길지 않은 돌담길을 거슬러 정동길로 간다. 오늘의 뮤지컬이 기다리는, 정동극장으로.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 광화문 연가 中

 


지난번 뮤지컬 '비밀의 화원'으로 처음 알게 된 정동극장은 정동교회 맞은편에 있다. 덕수궁 돌담이 끝나자마자 길모퉁이를 따라 돌아본 곳으로는, 로터리가 확보해둔 넉넉한 공간 너머, 어둠 속에 동그마니 얼굴 밝힌 정동교회. 나는 이 공간에 완전히 반해버려 꽤 오래도록 서 있었다. 초면인데 어딘가 몹시 그리운 느낌, 그러다가 '언덕 밑 정동길'과 '눈 덮인 교회당'과 광화문 연가와 덕수궁 돌담길을 잇달아 생각해내지. 여기가 그곳이었구나, 내 오랜 기억 속의 향수. 언젠간 꼭 한번 와보고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었네.

 

 

[크기변환]정동교회.jpg

 

 

새삼 상경했구나 하는 감상에 깊었다, 옛날 노래를 들어서 그런가. 플레이리스트에 광화문 연가를 틀어놓고 멍하니 이 광경을 치어다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났어. 한창 이 노래를 듣던 때의 나는 어렸고 대구의 근교 경산에 살았으니 이곳은 그저 기약 없이 미뤄둔 그리움, 이내 잊혔다간 이렇게 맞닥뜨리게 되었구나. 코트 하나 꿰어 입고 벤치에 홀로 앉아 이 노래를 다시 듣고 있자니, '야-, 나 완전히 서울 사람 다 됐네', 이런 생각이 들었어. 아주 싱거운 실소와 함께.


10년이 넘은 타향 생활, 이미 마음 구석구석 이 도시와 그 안의 생활은 익숙하다마는, 아주 가끔씩 떠오르는 타지의 감각은 지워낼 수 없더군. 내게 고향은 따숩고 꼬스운 내음만을 풍기는 향수 鄕愁의 공간은 아니야. 그럼에도 불현듯씩은 찾아오는 이 낯선 감각을, 그저 어디론가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어. 아마 오래도록 그랬어.

 

*

 

뮤지컬 '딜쿠샤'는 두 사람의 이야기야. 아름다운 딜쿠샤를 기억하는 사람과 추억하는 사람의 이야기. '금자 씨'는 역사의 파란 속에서 홀로 이 공간을 지키며, 내내 그 안을 살아온 여인. 여인은 딜쿠샤에 살고 자라나며 소녀에서 할머니가 되었지. 그리고 이곳에서 임종을 맞이해, 꿈을 이룬 사람의 행복한 미소로. 그녀의 꿈은 이 아름다운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 그뿐이었거든. 이 안에 살아온 온 기억을 되짚으며, 행복한 미소로 마지막을 장식해. 그 표정이 참으로 아름다웠지.



콜라주.jpg

 

  

'브루스 씨'는 금자 씨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리운 딜쿠샤를 생각해. 찬란한 유년시절의 기억, 창문 바깥으로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흔들리우던 곳. 인자한 아버지와 지혜로운 어머니가 아침을 맞이하던 곳, 멱을 감는 동네 아낙들의 아리랑 노래가 들려오던 곳, 사람들의 방문과 자자한 칭찬 소리가 끊임이 없던 곳... 그립고 그리운 그곳.


딜쿠샤는 그의 부모님, 테일러라는 색목인 부부가 지은 신혼집이다. 이름은 '기쁜 마음'이라는 뜻의 페르시아 어, 신혼여행으로 들른 인도의 한 여행지에서 착안하였다고 하지. '장차 우리도 신혼집을 지으면, 이처럼 아름다운 집을 지어 거기다 딜쿠샤라 이름 짓자.' 경복궁 옆 인왕산 자락, 지대가 썩 높고 아주 커다란 은행나무가 보우하던 터. 딜쿠샤는 지금도 그곳에 있다.


  

 

 

 

브루스 씨는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 일가가 추방되기 전까지는 식민지 대한제국에서 자라났지. 그에게 딜쿠샤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궁전이거니와, 유년의 반짝이는 세계 그 자체였던 듯싶어. 내게도 그런 것들이 참으로 많이 있지. 눈 감으면 떠오르는 아름다운 기억들, 돌아갈 수 없어 한없이 아리고 아련하기만 한 것들이.


그러나 동쪽으로 2만 2천 리, 한없이 멀리 있는 곳. 이제 그의 늙고 병든 몸으로는 차마 못 올 여기. 그는 딜쿠샤를 앓다간, 수소문을 통해 딜쿠샤의 소식을 알려줄 사람을 찾았고 그렇게 금자 씨와 브루스 씨는 오래도록 편지를 주고받는다. 하나의 공간을 기억하는 자와 추억하는 자가 긴 바다를 가운데 끼고서, 기나긴 서편을 나눈다. 오매불망 편지를 기다리는 그들에겐 애틋한 마음씀.

 

 

[꾸미기][국립정동극장] 2023 뮤지컬 딜쿠샤_공연사진 (6).jpg

 

 

'그곳으로 나 돌아가리, 항상 나를 기다리는 그 집으로.' 다른 넘버들도 좋은 게 많았지만 나는 이 넘버, 'Take me home'에 그대로 빠져들었어. 비슷한 것을 앓고 있어서 그런 걸까. 하지만 브루스 씨, 내겐 돌아가고픈 대지가 없어. 내 고향 경산도, 여기 서울도 내 마음이 쉴 만한 곳이 없어. 내겐 돌아가고픈 대지가 없어, 팔 뻗어 나를 안아 편히 쉬게 할, 딜쿠샤가 없어.


한 사내의 아름답고도 절절한 향수 앞에서 나는 골몰했다. 햇수로만 따지면 12년이나 지났는데, 내게 고향이 막 아름답고 따스운 곳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가끔씩은 깊이 쓸쓸하고 그저 어딘가 돌아가고픈, 아린 감정이 사무치는 걸까. 내게 고향은 두려움의 공간이었다. 어린 나는 그저 고향을 떠나고 싶어서 아득바득 공부했고 번듯하게 상경하였더랬지. 재수 생활은 참 힘들었고 그렇게 떠나온 설레는 타향 생활도 마냥 좋지만은 않았어. 언제나 물으시는 수화기에다가 대고는 좋고 좋노라, 명랑하니만 말하였지만 마음고생을 퍽 오래 했어. 억센 억양의 사투리를 쏟아내던 나는 촌스러운 까투리, 여기 사람들은 나를 좀 부담스러워했거든. 어머니, 나 있는 곳은 꽤 춥다. 차마 마음고생 할 당신 생각이 겨워서, 다 말하지 못했지만 말야.


어머니, 지금도 가끔 당신 생각이 나오. 뮤지컬이 끝나고 돌담길을 걸어 돌아 나오는 동안, 오늘 당신 생각을 해. 여기 손 꼭 잡고 걸으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은 무척이나 좋아하겠지. 한 번씩은 좀 올라 오시라니깐... 장사하느라 한 해 꼬박 쉬지를 않는 마당에, 무어 허송 호사냐고 하시는 전 前에, 내가 뭐라 더 강짜를 놓을 수도 없더라.


내가 그리워하던 것은 그저 고향이 아니라, 고향에 있는 당신인가 보아. 어머니, 그 지긋지긋한 곳에는 허나 당신이 있기 때문에, 나는 수상하고 알쏭달쏭한 향수를 느꼈던지도. 어찌할 수 없는 쓸쓸함에 대하여서는 그저 괜찮은 척하게 되느라 잊고 살던 것, 어머니 나는 외로워. 그러면 당신 생각을 해, 당신 있는 곳을 생각하게 돼. 그 생각에 미칠 때, 폭발하듯이 감정이 올라왔다. 에잇, 울음 참느라 죽는 줄 알았네. 대로 변에서 다 큰 남자 혼자 울 순 없는 법이지.


그 대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가끔 돌아가고 싶어. 딱히 예쁠 것 하나 없는 내 고향 말고, 당신 있는 곳, 어머니 당신께로. 가끔은 돌아가고 싶어, 그립고 오직 그리운 내 마음의 쉴 곳, 어머니, 나의 '딜쿠샤'로... 언젠가 당신이 내 곁을 떠나는 때가 오겠지. 그땐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아직 그날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허락될 테니, 오늘은 전화를 해봐야겠어. 어무이. 아들! 웬일이래, 전화를 다 해주고? 그냥, 그냥. 생각나서 전화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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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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