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엘리멘탈'이 현 시대에게 보내는 편지 [영화]

우린 무언가를 평생 미워할 수 없다.
글 입력 2023.11.30 16:03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간만에 본 영화다. 최근 다양한 이슈를 몰고 다니는 디즈니가 간만에 수작을 뽑았다고 해서 보게 되었다. 픽사식 그래픽은 아름다움을 넘어 황홀할 정도였다. 실제로 존재하는 곳을 찍은 것 같기도, 환상 속 세계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려나 싶기도 할 정도로 너무 멋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볼 가치는 충분했다. 다만 전반적으로 영화 자체는 너무 많은 주제를 한 번에 다루려다 급히 마무리한 느낌이 들어 아쉬운 점 또한 분명히 있었다. 

 
 

[크기변환]20230809-021306-047-uSCf17xo.png

 

 

원소 마을은 미국을 비유한 것처럼 보였다. 미국은 원주민과 영국에서 온 청교도 출신의 이주민 후손 외에도,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사는, 작중의 원소 마을 같은 모습을 보인다.

 

교육열과 성공에 대한 강한 열망을 보이며 외지에서 억척스럽게 일군 자신의 터전에 자부심을 가짐과 동시에 집착하는 앰버의 아버지의 모습에서 나는 언어와 문화권이 확연히 다른 먼 타지에서 틈새를 비집고 억척스럽게 살아내야만 했던, 지금의 한류가 있기도 전 미국에 정착했던 한국의 이민 1세대가 떠올랐다.

 

영화를 보며 여러 가지 느낀 점들이 있다.

 

우선 주인공 앰버의 성격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혈질적이고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나에게는 너무 미성숙해 보이고 싫은 모습이었다.

 

'후반부의 성장을 묘사하기 위한 장치겠지?' 하며 참고 봤지만 후반부에도 감정 조절의 측면에서 그다지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후반의 안정됨은 상황의 덕이지 내적 성장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특히나 웨이드네 집에 방문한 시점에서, (이후 앰버에겐 진로에 대해 새로운 고민과 변화가 찾아오긴 했다지만) 웨이드에게 이유 없이 짜증을 내는 앰버를 보고 상당히 꼴 보기 싫다고 생각했다. 

 

물론 세상에 화낼 일은 참 많고, 때로는 화내야 할 때 화낼 용기 역시도 필요하다. 글에서 자기혐오가 드러났을진 모르겠다만, 나도 사실 화가 굉장히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에 따라 화와 짜증을 내는 사람은 굉장히 대하기 힘들다. 결국 그런 것이 본인 마음의 문제에서 기인하기에 주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의 반응을 예측하거나 신뢰하기 어렵다. 타인의 내적 서사를 알 수 없기에, 이것은 곧바로 사람 자체에 대한 신뢰도 저하로 나타난다.

 

여담이지만 나는 간혹 갈등이 생길 때마다 그 사람이 주인공인 영화에서는 내가 악역이라는 생각을 견지하고자 한다. 한발짝 문제에서 떨어져 조금 더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지인에게 했더니, 그럼 또 다른 주인공인 웨이드의 성격은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성품과 성격을 조금 나누자면, 선한 성품은 존중하나 내 시선에서 성격적으로는 감정 과잉에 가깝다. 또한 작품 외적으로, 앰버와 앰버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쏟아내는 웨이드네 가족들을 바라보며 묘한 불편함이 들었는데,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살아온 '미국 백인 중산층'의 가정이 '이민자 동양인 소녀'에게 베푸는 시혜적 시선이 느껴져서였다.

 


[크기변환]87034215069_727.jpg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따로 있었다. 바로 부진한 공기 에어볼 선수를 응원하는 웨이드의 대사였다. 공기 부족은 에어볼이라는 게임을 하는데 그것이 원소 마을에서는 인기라는 설정이다. 

 

잔뜩 부진한 채 주눅 들어 있는 공기 선수에게 웨이드가 일어나, 외치는 말은 '힘을 내'도, '잘할 수 있어'도 아닌 '우린 널 사랑해' 였다. 

 

문득 이것이 응원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잘되길 바란다. 성공하길 바라고, 아프지 말길 바란다. 때로는 그런 마음이 물가에 내놓은 자식처럼 앰버를 지켜보는 앰버의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아들 웨이드의 애인 앰버를 챙겨주는 웨이드의 어머니처럼, 발현되는 것 같다.

 


[크기변환]KakaoTalk_20231130_222904216.jpg

 

 

"하지만 아빠, 이 가게는 아빠의 꿈이었잖아요."

"아니다 앰버, 내 꿈은 항상 너였어." - <엘리멘탈>

 

작품 후반부에서부터, 앰버가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서면서부터 앰버의 아버지와 앰버 간에는 내적인 갈등이 일어난다. 앰버는 아버지를 실망하게 할까 봐 자신의 꿈을 말하지 못하고, 아버지는 그저 앰버가 자기 일을 이어받길 바랄 뿐이다. 

 

이민자 1세대로 억척스럽게 살아가며, 그에겐 다른 곳에 눈을 돌릴 틈이 그리 많지 않았다. 편협하고 어쩌면 경주마 같은 인생이었지만 등 뒤에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기에 악착같이 살아냈다. 그런 그의 '성공가도'는 정해져 있고, 앰버가 잘 되고 행복해지려 한다면, 어쩌면 그에겐 다른 상상을 할 틈이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대사를 통해 직접 말하듯, 그에게 가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꿈은 늘 앰버였다. 그의 응원 역시도 앰버를 사랑하기 때문이었기에, 그는 고향을 떠나는 자신에게 '맞절'을 해주지 않았던 아버지와 달리 꿈을 위해 떠나는 앰버를 배웅하며 '맞절'을 한다. 그의 꿈처럼 보였던 '가게'는 꿈 그 자체가 아닌 사실 '낯선 땅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남을 수 있던 터전'이었던 것이다.

 

'잘되길 바라서 그랬다.'

 

참 손쉽고도 안타까운 변명이다. 그 말이 진실인 것을 알 때 더욱 그렇다. 하지만 결국 응원의 본질은 사랑이다. 그것은 우리가 단순히 누군가의 물질적 투자자로서 그 사람을 응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나 또한 내가 마음을 다해 좋아하는 사람이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 걸 보면 가끔 울화가 치민다. 상관없는 사람에겐 웃으며 넘어갈 만한 행동도, 그 사람에겐 괜히 더 잔소리 하게 된다. 그럴 때일수록 내가 널 사랑하기 때문에, 라는 그 원인이 서로를 해치고 있지 않은지를 우린 늘 되새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린 널 사랑해" - <엘리멘탈>

 

사실 작중의 '불'의 취급은 조금 이상한 면이 있다. 물과 공기, 흙은 사실 서로에게 큰 악영향을 쉽게 주지 못한다. 하지만 불의 경우 주변의 공기를 날려버리며, 물에 닿으면 꺼지기도 하는 등 원소마을에서 쉽사리 섞이지 못하는 묘사를 보인다. 

 

"물과 엮여서 좋았던 적이 없다"는 어쩌면 메타포 적으로는 당연한 앰버 아버지의 말에서, 나는 서로 다른 인종들 사이에서도 사용하는 언어와 문화, 역사와 본국의 위상마저도 확연히 달랐던 동양인 이민자 1세대가 낯선 나라 낯선 땅에서 느꼈을 당혹감을 체감할 수 있었다. 저들끼리도 서로 다르지만 어떻게든 엮여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면, 낯선 이 땅의 가장 소수인 우리가 살기에는 너무도 위험하고 배려가 없는 곳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지나고, 그들의 자식들인 앰버와 웨이드는 결국 서로에게 닿는다. 우리는 영원히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아갈 수 없다. 여전히 그들은 서로를 다치게 하지만, 그래도 사랑하기에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한 세계가 나에게 오는 것 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때로는 그렇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담스럽기도 하다. 내가 이 사람을 현재 만나 가진 과거와 사연을 서사로써 받아들이고, 미래를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 어디 쉬운 일인가. 너무나도 다른 두 세계의 충돌을 작중에서는 불과 물의 사랑으로 시각화한다.

 


[크기변환]KakaoTalk_20231130_222904216_01.jpg

 

 

바야흐로 이해와 관용이 부족해진 시대다.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지 않고자 하고 배격하는 것이 풍조가 되었다.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고, 다른 사람은 이방인이다. 차이에 대한 혐오가 최고조에 이른 지금, 픽사는 이 영화를 통해 그것이 틀렸음을 말해주고 있다. 어떠한 논리와 주장으로 납득시키는 것보다도, 마치 옛이야기를 읽어주는 할머니의 위로와 타이름같이. 그것이 옳지 않음을 조곤조곤 이야기해주는 듯했다.

 

누군가를 사랑함은 다름과 다름으로부터의 모든 아픔을 수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임을 이 영화는 말한다. 결국에는 사랑이고, 결국에는 사람이다.

 

*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디즈니만, 내가 최근의 행보에도 디즈니에 대해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즈니는 사랑의 가치를 이해한다. 이 모든 갈등을 딛고 이루어진 웨이드와 앰버의 사랑은 어쩌면 진부하고 예측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좀 어떤가. 우린 늘 무언가를 사랑하며 살아가야만 하고, 그것이 우리와 조금 다를지라도, 설령 우리를 아프게 할지라도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엘리멘탈>은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김우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