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로렌 차일드의 '요정처럼 생각하기'

11월에 찾아온 크리스마스
글 입력 2023.11.30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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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 차일드와의 첫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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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때, 급식시간에는 무조건 식판을 비워야 했던 규칙이 있었다. 먹기 힘든 반찬이 나올 때면 동화 ‘개미와 배짱이’를 떠올리곤 했다.


개미가 여름에 땀 흘려 일할 동안 배짱이는 놀고 먹다 차디찬 겨울을 맞이한다. 그런 배짱이에게는 지금의 이 급식도 진수성찬일 것을 생각하면 눈앞의 밥을 야금야금 먹을 수 있었다. 롤모델치고는 좀 글러먹은 인물이여도, 배짱이는 식판을 깨끗하게 비우게끔 도와주는 일등공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로렌 차일드의 ‘난 토마토 절대 안 먹어’ 역시 기억에 남는 책이었다. 책에서는 한 남매가 등장하는데, 오빠는 편식쟁이 여동생을 위해 온갖 음식을 별미로 둔갑시킨다. 생선튀김은 바다얌냠이가, 으깬 감자는 구름보푸라기가 된다.


그 맛깔나는 묘사를 보며, 우리 학교에도 입 짧은 아이들이 납득할 만큼 재미있는 주장을 펼칠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소망을 품게 됐다. 그런 그리움을 품고 자란 탓이었을까. 인연이 닿아 전시회 ‘로렌 차일드와 상상친구들’을 둘러볼 수 있었다.

 

 

 

로렌 차일드와 상상친구들- 차일드의 세계관 속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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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 차일드의 주 기법인 콜라주는 전시장 내부에도 잘 반영되어 있었다. 벽에 걸린 그림들 사이 입체감을 더하는 판넬과 모형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무릎보다 더 낮은 높이에는 한 전시장에서 다른 전시장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네모난 구멍도 있었다. 아이들의 시선을 고려한 작가의 마음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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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천사와도 같은 이상적인 아이는 로렌 차일드의 작품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착한 아이가 되기 싫어 제멋대로 구는, 갓 태어난 동생을 사랑하는 게 아닌 질투하는, 어른들의 바보짓에 시크하게 대응하는. 있는 그대로의 아이들이 있다. 그래서인지 더 정이 갔다.


소설 ‘어린 왕자’에서는, 모든 어른들은 처음에는 아이였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내가 지금 어른 노릇을 잘 못 하고 있는 것 같다면 로렌 차일드가 만든 아이들을 통해 위로를 얻는 것도 좋겠다. 훌쩍 어른이 됐다는 부담감을 느끼기보다는, 아이였던 나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을 고안해 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고얀이와 강아지- 귀여움 뒤 외로움 


 

귀여운 동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과 대비되게, 나는 이 세션을 감상하며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해당 세션의 제목 ‘고얀이와 강아지’에서의 ‘강아지’는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부유한 주인을 둔 푸들 트릭시다. ‘개푸치노’를 마시며 럭셔리한 미용실에서 관리를 받는 등, 웬만한 인간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삶을 살고 있는 트릭시의 소원은 단 하나다, 다른 개들처럼 자유롭게 뛰어노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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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트릭시는 나무 사이를 빙빙 돌고 흙탕물에 구르며 노는 다른 개들을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트릭시의 주인은 추위를 조심해야 한다며 목에 목도리를 둘러줄 뿐이다.


애정과 관심이 듬뿍 담긴 따뜻하고 폭신한 목도리. 그러나 목도리는 본래 인간의 것이지, 개의 것이 아니다. 개임에도 인간이 사용하는 물건에 둘러싸여 있는 트릭시에게서는 외로움을 넘어 이질감마저 느껴졌다.


보통 ‘고얀이’라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동물은 고양이겠지만, 우습게도 이 이름의 주인공은 생쥐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살아가는, 도시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존재인 생쥐.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고, 그렇게 고얀이는 고얀 생쥐라는 뜻을 가진 이름을 얻게 된다.


어느 날 그 고얀 생쥐가, 눈 나쁜 신사의 착각 덕에 진짜 고양이로서 키워지는 우스운 해프닝이 일어난다. 헛웃음이 나오는 줄거리, 그러나 아래 그림의 문구가 아릿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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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옷은 나한테 맞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누군가의 애완동물이 될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어.’

 

돌아보게 됐다. 우리가 매사에 있어 백 퍼센트 진심으로 말하고. 행동하는지를. 사람들은 종종 꿈꾸던 일이 아님에도 금전이 필요해 지원하고, 의견이 맞지 않아도 관계 유지를 위해 참는다. 나는 그것을 위선보다는 노력에 더 가까운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사람마다 외로움을 해소하는 방법은 다르다. 안락한 환경에서 벗어나고픈 강아지들을, 하나 내려놓는 대신 더 큰 도약을 꿈꾸는 고얀이들을 응원한다.

 

 


책 속의 책- 동화의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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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안으로 들어간 아이는 즐겨 읽던 동화를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어쩌다 입은 드레스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던 늑대는 신데렐라 대신 무도회에 가버리고, 주인공이 되어야 할 신데렐라는 도리 무도회 당일임에도 설거지나 하고 앉아있는 처지가 되는 식이다.


재미있는 상상이지만, 의외로 현실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동화 ‘눈의 여왕’에서 등장하는 악역, 눈의 여왕은 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에서는 성장형 주인공인 엘사의 모티브가 되었다.

 

작품의 재해석에 필요한 창의력이야말로 어린아이의 상상력에서 기반한 것이 아닐까.

 

 

 

명작의 탄생- 그리웠던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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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션에서는 로렌 차일드의 오리지널 스토리 외 어렸을 적 즐겨 읽었던 책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소녀 삐삐 롱스타킹, 예쁘거나 상냥하진 않아도 인기만은 확실한 유모 메리 포핀스 등.

 

성숙하고 유려한 그림체를 통해 아까 그려냈던 아이들이 훌쩍 큰 듯한, 작가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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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구역에는 동화 속 한 장면을 옮겨놓은 모형 역시 존재했다. 가지가 우거진 숲 속을 헤메는 공주 위로 으산한 빛이 떨어지는 모습. 2차원이 아닌 3차원의 모습인 덕에 공간과 그 공간 속 인물의 구도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마치 텔레비전처럼 네모난 틀에 담겨 있어, 몸을 낮추고 시선을 맞추니 더욱 몰입하게 됐다.

 

 


요정처럼 생각하기- 11월에 찾아온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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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워지고, 사방에서 눈 소식이 들려오는 요즘이다. 겨울과 함께 크리스마스도 다가오고 있다. 영미권에서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문장 중 이런 것이 있다. ‘Tis a season to be merry’, 흥에 겨울 시기임을 뜻하는 말이다.


보통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떠올릴 때의 이미지 역시 흥겹고 정겹다.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트리, 풍성한 한 상.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 전시회의 마지막을 장식한 세션이기도 했지만, 실물 사이즈의 크리스마스 트리 판넬과 사람들로 빽빽한 테이블 그림 덕에 절로 시선이 쏠렸다.


산타에게는 루돌프 외의 동업자가 있다. 바로 산타의 도우미로 불리는 요정들이다. 이 요정들은 전 세계 아이들이 쓴 편지를 읽고, 그들이 원하는 선물을 분류하며 산타를 돕는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산타라지만, 요정들 역시 산타가 행복을 전달하는 데 적잖은 도움을 주는 셈이다. 요정을 내세운 것에서, 나는 작가가 행복 그 자체보다는 행복의 정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느꼈다.


크리스마스는 행복한 때라지만, 모두가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살다 보면 트리를 꾸밀 여유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시간이 없을 때도 있고, 그것이 하필이면 크리스마스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크리스마스라는 이름 하에,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 작은 오지랖이 누구에게는 선물과 같은 일로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나 또한 이번 크리스마스에게는 누군가를 위한 요정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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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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