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발레의 언어로 정(情)을 말하다 - 유니버설발레단, 코리아 이모션 情

글 입력 2024.02.2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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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고 자란 지역은 소박한 중소도시였지만, 특이하게도 도 단위에서 설립한 문화예술회관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선 수시로 크고 작은 공연이나 전시들이 열렸는데, 가끔은 꽤 명성 높은 공연들이 우리 지역을 찾기도 했다.

 

사실 지방에서 제대로 규모가 갖춰진 공연을 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 가끔 엄마 손을 잡고 회관을 찾을 때면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다. 시작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공연장을 찾아가서, 자리를 찾아 앉고, 들뜬 웅성거림 속에서 약간은 긴장한 채로 막이 오르는 순간을 기다리기. 직접 관람하는 공연의 즐거움을 내게 처음으로 알려준 것도, 이곳에 올려진 몇 개의 작품들이었다.

 

특히 난생 처음으로 그곳을 찾게 했던, 한 발레 공연에 대한 기억은 꽤 특별하다. 투명한 듯 하얀 튀튀를 입고, 파란 새벽빛 같은 조명 아래 우아하게 춤을 추던 발레리나. 그 환상적인 모습이 자아내던 분위기는 어린 마음에도 깊게 남았다. 언어가 아닌 몸짓만으로 무언가를 담아내는, 춤이라는 장르의 문법은 낯설면서도 충격적이었다. 말 한 마디 없이도 이렇게 존재를 매어놓는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다니.

 

그렇게 공연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 오늘 본 모든 장면이 그대로 꿈에 한 번 더 나오면 좋겠다며 엄마에게 말하던 순간은 여즉 기억이 난다. 시간이 지나면서 감상은 흩어진다는 사실에 대한 아쉬움도 그때 처음 느껴보았다. 사실 그 뒤로 발레를 볼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발레 음악을 듣는다는지 하는 우연한 계기들이 있으면 문득문득 그 때의 마음이 떠오르곤 했다.


비록 발레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유니버설발레단의 '코리아 이모션 情(정)'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흘려보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발레는 나에게 처음으로 현장의 힘을 알려준, 어딘가 설렘을 품고 있는 장르였으니까. 그리고, 그 오래된 기억으로나마 나는 춤이 가진 힘을 알고 있었으니까.

 

 

코리아이모션-poster-final.jpg

 

 

정. 이 복잡미묘한 단어. 일전에 이것이 한국에만 있는 표현이라는 걸 처음 알았을 때엔 적잖이 놀랐다. 사랑보다 무서운 정, 미운 정과 고운 정..., 모두 일상적으로 쓰는 말들이지만 정작 이것을 설명해보라고 하면 정말로 입이 딱 다물릴 것 같았다. 너무 당연한데, 항상 느껴오던 것인데, 막상 정의하기는 어려웠다. 단순히 사랑이라기엔 좀 더 크고 넓은 어떤 마음, 그 묘한 어감을 '정'이라는 표현을 빼고서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싶어 막막했다.

 

정이면 정이지. 뭐라고 설명해야 해. 아무튼 그렇게 괜한 오기가 생겨 여러 표현을 떠올려봤지만 적확한 설명을 찾는 일엔 결국 실패했다. 정에 대해 이런저런 분석과 분류를 해놓은, 이 말이 쓰이는 다양한 상황과 그때그때 조금씩 달라지는 어감을 설명한 논문 하나를 읽어본 게 마지막 노력이었다. 겨우 한 음절의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서 장장 수십 페이지의 설명이 필요하다니.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있는 것이 언어이지만, 결국 언어도 그 자체로 가진 한계가 있다는 걸 통감하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타이틀에서부터 '정'이라는 단어를 박아놓았다. 놀랄 일이다. 타국의 말로는 정확히 번역해낼 수도 없는, 수많은 단어들을 잇고 이어서 겨우 설명해내는 이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를 발레로 풀어낸다니. 말 한 마디 없이도 그런 전달이 가능할까. 공연 홍보문을 읽고서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동시에 서두의 기억들도 차분히 떠올랐다. 말 없이도 성립하는 발레의 언어가 나에게 전달해준 것들이.

 

이윽고, 어쩌면 내가 마주했던 언어의 한계를 의외의 방식으로 돌파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가 생겨났다. 그렇게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저마다의 기대를 품고 몰려든 관객들 속에서 나는 나대로의 기대를 품은 채 관람을 시작했다.

 

 

2023Korea Emotion-ⓒUniversal Ballet_Kyoungjin Kim 12 - 복사본.jpg

 

 

그리고 '코리아 이모션 情(정)'은 과연 그 기대를 충족시키는 공연이었다.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낸다는 설명에 걸맞게, 이번 공연은 클래식 발레와의 몇 가지 차별점을 가지고 있었다. 개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발레의 특성과 한국 무용의 특성을 부드럽게 조화시킨 안무였다.

 

사실 '퓨전'이라는 시도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어느 한 쪽의 장점을 살리려면 다른 한 쪽이 죽기 쉽고, 둘 모두의 개성을 살리다보면 자연스러운 융합이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심청', '발레 춘향' 등의 작품을 통해 'K-발레'를 향한 도전을 이어 온 유니버설발레단의 노련함이 십분 발휘되었던 모양이다. 클래식 발레의 화려함과, 한국무용의 부드러움과 단아함이라는 각각의 장점이 모두 살아있던 이번 안무는 공연 내내 새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발레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꼿꼿이 세운 발 끝인 것처럼, 위를 향하는 춤인 클래식 발레는 수직적 움직임이 강조된다. 위로 끌어올리는 움직임이 주된 만큼 춤선도 길 가늘어진다. 반면 이번 공연의 안무에서는 팔과 손목을 비롯한 상체 전반을 둥글리고 늘어뜨리는, 한국 무용적 특성이 더해져 있어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공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이와 관련된 문훈숙 단장의 해설이 있기도 했는데, 잠깐의 몸짓으로도 각각의 특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기존의 발레는 가슴을 활짝 연 채 시선을 위로 두고, 직선처럼 뻗어나가는 춤선이 돋보이는 반면 한국 무용의 경우 주로 곡선을 이루는 상체 움직임과 살짝 아래를 향한 시선, 느긋하게 굽혔다 펴지는 무릎에서 느껴지는 절제미가 돋보였다. 무용수들이 그려내는 몸짓에서는 이러한 직선과 곡선, 확장과 절제, 각각의 특성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으면서 온전히 결합되어 있었다.

 

 

2023Korea Emotion-ⓒUniversal Ballet_Kyoungjin Kim 1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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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기억에서처럼 풍성하고 하얀 튀튀가 아닌, 한복을 개량한 총천연색의 의상 역시 인상적이었다. 얇고 부드러운 치맛자락과 긴 도포자락이 몸을 휘감으며 단아한 춤선에 녹아들었다. 흐르는 듯한 옷자락은 무용수와 함께 춤을 추는 듯했다. 푸른색과 녹색, 여러 가지 색깔로 부드럽게 물들인 듯한 옷감이 이리저리 나부끼는 광경은, 한국의 산 능선과 그 너머로 보이는 바다의 수평선을 연상시켰다.

 

특히 깊은 밤 속 춤을 추는 여인들의 모습을 담은 여성 4인무 '달빛 유희',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하는 사내들의 마음을 표현한 남성 4인무 '찬비가'에서는 모든 무용수가 각기 다른 색상의 의상을 입고 있었는데, 이러한 4인 4색의 의상과 함께 각 무용수의 고유한 매력을 한층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

 

 

2023Korea Emotion-ⓒUniversal Ballet_Kyoungjin Kim 215.jpg

 

 

또 음악을 빼놓고선 '코리아 이모션 情'의 차별점을 논할 수 없다. 풍성한 국악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음악은 공연에서 담아내고자 하는 한국적 정서를 극대화하고 있었다. 사실 공연을 보기 전, 국악을 발레 음악으로 사용하면 춤곡 특유의 드라마틱함이 덜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공연의 시작, 자진모리와 드렁갱이 장단 속 즉흥 연주를 주고 받는 곡인 '동해 랩소디'에 맞추어 펼쳐지는 무대를 보자 그런 우려는 순식간에 가셨다. 국악은 어딘가 딱딱하고 고루할 것 같다는 인식과는 달리, 자유롭고 즉흥적인 선율의 합이 마치 축제의 서막을 여는 듯했다.

 

이어지는 곡들에서도 그런 즐거움은 여전했다. '다솜', '미리내길', '비연', '달빛 영' 등 남녀간의, 모녀의, 형제의 정을 그려내는 무용수들의 몸짓과 동양적인 음악은 완벽히 맞아들었다. 가야금과 아쟁과 같이 전통적인 음색을 자랑하는 악기들의 향연에 더불어 부채가 접히고 펼쳐지는 소리마저 음악에 녹아들었고, 묵직하고 구슬픈 창(唱)은 애절함을 더했다.

 

특히 대미를 장식한 강원, 정선 아리랑은 익숙한 멜로디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피날레곡다운 장엄함이 더해져 벅찬 감상을 남겼다. 나를 찾는 즐거움이라는, '아리랑'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 담긴 안무가 고조되는 리듬과 선율 위에 수놓여 있으니 그 감동이 더욱 와닿았다. 지극히 한국적인 방식으로 자아내는 웅장함이 인상적인 마무리였다.

 

안무, 의상, 음악... 그렇게 갖은 방식으로 '코리아 이모션 情'은 75분의 공연 시간을 꽉 채워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냈고, 커튼콜 동안 끊임없이 박수를 치며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끔은, 언어 없는 언어를 통해서라야 더욱 오롯이 전달되는 것이 있다는 점을.

 

그렇게 소중히 전달받은 '정'을 품고 공연장을 나서는 길, 마음 한구석에서는 작은 예감 하나도 함께 피어올랐다. 그 짧은 시간 사이, 나는 금세 이곳과 이들이 그려내는 발레에 정이 조금 들어서, 또 언젠가 이곳을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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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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