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위한 글자, 나를 위한 괴물

글 입력 2024.02.0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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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주


모든 것에는 좋은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이 공존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물며 인간이 만든 이야기인 작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시의성이 떨어질 수도 있고, 내적 구조가 정밀하지 못할 수도 있고, 여타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하더라도 개인의 호오에서 여과될 수 있지요. 그러나 그 어떤 작품도 단점만 지니지는 않았다고 믿습니다. 작품이 끝내 전하고 싶었던 진심이 있을 것이고, 서툴더라도 아름다운 점, 좋은 점, 의미 있는 점을 가졌을 거라 믿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작품일 수도, 또 누군가에게는 부족한 작품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부터 찾아보려고 합니다. 좋은 점만 말한다고 완벽한 작품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개개의 진심을 읽으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위한 글자, 나를 위한 괴물

-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와 <메리셸리>-

 

 


 

뮤지컬 무대에서 우리는 수많은 ‘창작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마 원고지에 글을 쓰는 작가를 가장 많이 만나봤을 것이며, 캔버스에 그림을, 오선지에 음악을, 무대에 춤의 궤적을 그리는 가지각색의 예술가, 심지어 죽은 자의 뼈로 괴물을 빚어내는 물리학자(!)도 만날 수 있지요. 무대 위로 흩날리는 종이, 불태우는 창작혼, 그러면서 자아가 해방되거나 일상이 망가지는 이야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봐 왔던가요?


일종의 레퍼토리가 된 이런 이야기들을 자주 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지겨운 마음이 슬쩍 고개를 듭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 무언가를 만드는 시간에 이렇게 진심인 장르가 또 어디 있겠나 싶어지기도 합니다. 아렌트식으로 이야기해 보자면 개인으로서, 종으로서 생존하기 위해 하는 ‘노동’을 넘어서(물론 창작의 주요한 동기가 생존인 경우도 많지만) 예술적 영감을 담아 창작물을 만들어내고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 그 치열한 고투의 과정을 보는 게 영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이렇게 말하고 또 비슷한 작품이 나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겠지만요). 


지금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두 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와 <메리셸리> 역시 창작자를 다룹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19세기에 실존했던 창작자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그들의 창작물에 주목하는데요. 창작물을 매개로 들려주는 창조주의 이야기는 뚜렷합니다. 사랑하는 너를 위해 타자기를 만들었다는 것, 내가 자유로워지기 위해 괴물을 만들었다는 것. 그러나 그 타자기는, 괴물은 단지 너만을 위한, 나만을 위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 사후에도 공동체 속에 남아 의미화되고 있습니다. 19세기 유럽에서 만들어진 '너를 위한 글자', '나를 위한 괴물'이 21세기 대한민국 무대에 소환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캐롤리나를 위한 투리의, 너를 위한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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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 페어 사진 ㅣ ㈜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 X 공식 계정

 

 

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는 19세기 이탈리아의 발명가 펠레그리노 투리와 그가 발명한 타자기에 주목합니다. 투리가 자신의 친구인 캐롤라인 백작 부인이 점점 시력을 잃어 가자 타자기와 먹지를 발명했다는 일화에 착안한 작품인데, 사실 투리와 백작 부인에 관한 이야기는 정확한 사실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투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세간의 이야기처럼 정말 백작 부인을 사랑해서 타자기를 만든 것인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지요. 

 

그 빈 곳에 상상력을 불어넣는 것이 바로 오늘날 창작자의 소명일 것입니다. 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의 창작진은 이 작품에서 투리와 그가 사랑한 여인 캐롤리나를 소꿉친구로 설정하고, 작가를 꿈꾸지만 시력을 잃어 가는 캐롤리나를 위해 투리가 다른 소꿉친구인 도미니코와 힘을 합쳐 타자기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새롭게 빚어내지요. 

 

캐롤리나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투리의 이야기는 참 보기 드문 '착하고 아름다운 창작자의 이야기'입니다. 캐롤리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제 살을 깎아 먹는 일방적인 헌신이 아니라, 오히려 투리가 세상 문을 열고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지요.

 

그래서 이 작품 속 창작물인 '타자기'는 작품의 제목처럼 '너(캐롤리나)를 위한 글자'이면서, 투리가 자신의 사랑과 꿈을 위해 만든 '나를 위한 글자'이기도 하고,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을 위한 '우리를 위한 글자'가 되고 있습니다. 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가 빈 종이에 입력한 이 대명사들은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메리를 위한 메리의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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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메리 셸리의 초상화, (오른쪽) 뮤지컬 <메리셸리> 프로필 사진 ㅣ 위키피디아, (주)뷰티풀웨이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창조주인 메리셸리를 다루는 동명의 뮤지컬은 <프랑켄슈타인>의 페미니즘적 독법으로 메리셸리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SF 소설의 효시이자 수많은 괴물 이야기의 원형이 된 <프랑켄슈타인>, 많은 연구에서는 이 소설에 담긴 '낭만적 열정이 초래한 죄의식과 절망, 혼돈과 공포의 극한'이 작가 메리의 자전적인 상황들과 연관 지어져 있다고 분석합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억압되고 주변으로 밀려난 타자로서의 여성'이 바로 괴물을 상징한다는 것이죠(원유경, 1998).

 

같은 맥락에서 뮤지컬 <메리셸리> 역시 19세기 영국에서 메리가 겪어야 했던 고난과 공포를 충실히 구현해 냅니다. 남편 퍼시 셸리를 따라나선 것이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과 불안, 여성의 삶을 한계 짓는 불합리한 사회, 그 사회에 작은 돌이라도 던지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경계 밖으로 내쳐질 수 있다는 공포와 두려움은 괴물처럼 몸집을 키워 메리를 짓누릅니다. 메리는 그 괴물을 피하려고 하지만, 어느새 자신의 억압된 두려움이 괴물임을 깨닫고 이를 소설로 풀어내며 자유를 되찾지요.

 

메리가 괴물을 만들어내며 글을 쓰는 과정은 자기 해방에 다름 아니지만, 이 괴물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수많은 괴수의 원형이 된 이 괴물은(많이들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이름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는 괴물을 만든 박사의 이름입니다) 또 다른 시대의 또 다른 두려움을 표현하며 수많은 사람의 자유가 되고 있지요. 메리가 사라진 이 세계 어딘가에서 메리를 위한 메리의 괴물은 여전히 떠돌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없는 곳(nowhere)에서 와서 없는 곳(nowhere)으로 돌아가는 사멸적 존재”인 인간이 만들어낸 '불멸하는 것'. '너를 위한 글자'를, '나를 위한 괴물'을 보고 있자면 어쩌면 그 불멸의 조건을 알 것도 같습니다. 주어를 단수인 '너'와 '나'에서 복수인 '우리'로 확장할 것. 그리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남을 것. 

 

 

*참고

-원유경, <소설, 로맨스, 여성의 글쓰기: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근대영미소설》 제5집 제2호, 한국근대영미소설학회, 1998

-이관형, <노동 없는 노동자의 사회>, 제61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가을 정기 학술대회(12월 4일) 발표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

 

 

[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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