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아베 마리아 - 뮤지컬, 피에타

내 어머니를 구하시옵고, 연민하소서
글 입력 2024.03.26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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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피에타_포스터.jpg

 

 

예술의전당으로 가는 길, 406번 버스에서 창 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귓전에다가는 쇼팽 발라드를 틀어둔다. 무드를 가라앉혀 두기 위함이다. 점차 차분하게 내리깔린 두 눈 위로, 무심하게 속삭이는 이 세상을 나는 사랑한다. 편안하고 흡족한 기분, 내리밟은 정류장은 예술의 전당 정문으로부터 멀어 조금 걷는다. 그즈음 밤 날씨가 오락가락해 코트 단벌로 겨우 참아낼 만 하다. 그리고 언제나 바람이 센 저녁이면, 세상은 조금 적요해져 있었다. 적당한 추위와 강한 바람과 빈 거리의 오직 조용함, 고대할 공연이 있는 이 고요함을 나는 사랑한다. 사랑에 온통 바친 나의 저녁, 석식은 건너뛰었다. 평일 공연은 늘 이런 식, 식사를 결코 허하지 않는 간신한 시간대 덕분에 마련된, 애매하게 붕 떠버린 20여 분의 고요함까지를 사랑한다.


방배를 에둘러 가는 406번 버스에서 창 밖을 오래 보았다, 두근거렸다. 오늘의 공연은 피에타, 꽤 오래 흠모해 온 것, 무신론자의 알 수 없는 사랑. 허나 조금도 설명할 수 없는 나의 사랑이란…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으로 먼저 유명한 낱말. 몇 번이고 검색하고 오래 바라본 기억쯤 있으나 대개 그 유명한 조각상만을 가리키고 있어, 말뜻은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다. 본디 이탈리어로 경외와 연민을 뜻한단다. 아들의 싸늘한 주검을 품 안에 안아 든 마리아의 회화는 미끈하고, 아무런 표정도 없는 것이 어딘가 거룩한,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경외감을 자아내곤 했다. 그러나 피에타, 경외와 연민이라. 그대는 박해에 그 자신을 바친 당신 아들을, 오직 연민하고 또 경외하였을런가. 대리석은 너무도 미끈하게, 아마 그렇노라고 대답하나… 내 가슴 안에는 한 가지 서사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아직은 다 알아볼 수 없어. 오늘의 마리아가 그것을 다 꺼내어 주기 전까지는.


*

 

뮤지컬 피에타는 어머니 마리아를 주제로 하는 모노드라마이다. 아들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 성모이기 이전 인간으로서의 마리아라는 상상적 산물. 무대엔 젊은 엄마가 등장한다. 아기 예수 역은 없었다. 그녀는 품이 가득 비어 있는 채로 어화둥둥, 어르고 달래는 애틋한 몸짓과 눈빛, 인간 어머니 특유의 제스쳐와 사랑을 듬뿍 쏟아내 있지도 않은 예수가 그 있어야 할 자리를 가득 채울 따름이었다. 보이지 않는 예수였건만, 그 얼굴이 꽤나 재기발랄할 것이 예쁘구나, 어여쁘겠구나 생각했다. 맨 앞줄에 앉은 내게로 마리아가 다가와 제 품을 기울이며, 어때요, 너무 예쁘죠 하고 물어오는데, 그 해맑은 미소 앞에 그렇노라고 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 아가만 보면 어찌할 줄을 모르는, 내 주변의 엄마들과 닮은 그녀. 제 자식이 그저 무탈한 인생을 길이 영위하길 바라는, 극 중의 그녀는 성모가 아닌 오직 어머니이다. 


 

(눅 1: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눅 1: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 1: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눅 1: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눅 1: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눅 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눅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 누가복음 1장 30-38절


 

씬 구분은 아들 예수의 성장기에 따라 분절된다. 유년, 소년, 청소년, 청년기를 지나 이윽고 선지자가 되고, 마침내 처형되기까지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극의 서술은 지극히 어머니 마리아의 관점에서 이야기된다. 독실한 교인에게는 한편 어떻게 읽히려나, 유년의 예수가 인간의 어린 자식에 지나지 않았다는 본 극의 묘사가 그의 절대위격을 낮추는 것으로 여겨질는지. 하지만 내게는 본 극의 서사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건 내 어머니의 이야기 같았거든. 


구유에 쌓인 아기 예수를 애무하는 마리아의 낯빛은 그 어찌나 사랑 가득하던지. 두 사람이 시냇가로 놀러 갔을 때, 아기 예수가 세상의 사물을 향하여 옹알이하는 것을 바라보는 때라든지, 나물 캐는 엄마를 향해 아장아장 걸어와 뒤에 안기는 순간이라든지, 먹을 걸 하나씩 먹여주는 때라든지, 그 모든 순간의 얼굴이 참 잔인할 정도로 곰살궂었다. 우리가 이 서사의 끝을 미리 아는 까닭인 한편, 그건 내 어머니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유치원에 입학하기 전, 작은 내 방에서 한글을 일러주던 내 어머니가 나는 아직도 기억난다. 오후의 붉은 낙조가 드리운 우리 방, 사근사근히 나를 사랑하던 내 어머니의 얼굴이 스무 해가 넘은 지금에까지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때 우리는 늘 두려웠지만, 우리 둘만을 의지했다. 어머니, 곧 아버지가 와요, 나는 두려워요. 어머니는 늘 나를 지켜주었다, 등으로 지켜주었다. 우리 둘만으로 충분했던 시절. 나는 이 사랑스런 극의 장면 앞에서, 벌써 어딘가 가슴 아파지기 시작했다. 

 

 

 

 

극의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10여 년을 훌쩍 지나 예수는 청년이 되어 있다. 모세가 유대인을 해방한 것에서 유래한 신성일, 유월절에 도성으로 향하는 대열 한 가운데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마리아는 아들을 잠시 인파 속에 잃어버린다. 그를 찾으러 인파를 헤친다. 청년 예수는 사람들의 무리 앞에서 웅변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조상의 예언을 다시 이 땅에 실현시킬 것입니다.' 아들은 어느새 훌쩍 컸고, 사람들 앞에서 제법 의젓하고 당당하게 말한다. 사람들은 그런 아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이 어미는 그런 아들이 참 자랑스럽다. 


 

(눅 2: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눅 2: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눅 2: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눅 2: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눅 2: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눅 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눅 2: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눅 2: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눅 2: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눅 2: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눅 2: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 누가복음 2장 41-51절

   


아들은 자신의 뜻을 펼치며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느라 고향을 떠났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고향에 돌아온단다. 어미는 문지방을 돋우 밟아 아들의 모습을 찾느라 고대한다. "아이고, 아이고, 우리 아들이 온다. 동네 사람들, 우리 아들이 돌아오고 있어요. 아들~~!! 아들~~~~!!!! 아이고, 아이고, 하하하하하. 어서 빵을 구워야지." 빵을 반죽하고, 치대고, 오븐에 넣어 굽고, 막 꺼내어 한창 뜨거운 빵을 보며 행복에 겨워한다. 어찌나 흡족해하던지. 행주 앞섶에 조심히 꺼내 든 그 투명한 빵을 먹어보라고 내게 건네는 그 복된 얼굴 앞에서, 받아들기에 뜨겁다는 시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익히 아는 얼굴, 그 앞에 한없이 약해질 얼굴. 가끔 고향에 들를 때마다 우리 어머니도 고기를 저미고, 나물을 무치고, 잡채를 버무리고, 탕을 끓이시면서 자주 밖을 서성이곤 하시었지. 아직 버스에 타 있는 나를 정확히 포착하시고 크게 손을 흔드시는데, "아들~!!!!" 하고 부르시는 소리가 차창 따위는 수월하게 넘어버리곤 하더라. 


마리아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인다. 잔치가 무르익은 다음 아들은 사람들의 앞에 나와 말하려 한다. 오늘 새로운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단다. 아들은 선포한다, 조상들의 예언이 오늘 실현됐다고. 그러나 그 예언은 유대 율법인 모세의 말씀과 같지 아니하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덧붙인다. 독실한 유대 인인 마을 사람들은 광분하여 예수를 낭떠러지로 끌고 가 폭행한다. 짓밟혀 쓰러진 아들, 마리아는 말없이 아들을 업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릴 적 나물을 캐고 있을 때면 쪼르르 달려와 폭하고 업히던 그 아들이 이렇게 컸나. 어미는 아들이 더없이 자랑스럽지만, 어딘가 두렵다. 


 

(눅 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눅 4: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눅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눅 4: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눅 4: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 4: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눅 4: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눅 4: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눅 4: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 누가복음 4장 16-30절

 

 

아들은 그럼에도 여전히 좌중 앞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며 사람을 모으고 있다. 마리아는 이따금 열심히 포교하고 있는 아들을 보러 간다. 좌중의 사람들이 마리아를 알아보아 수군거렸으니, 어머니는 먼 발치에서 아들의 얼굴을 물끄럼 바라보고 있다. 아들은 하던 말을 멈추어 어머니에 눈을 맞춘다. "저 따뜻하고 다정한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엄마가 불쌍해서 그러니?" 허나 이내 아들은 차오르던 감정을 분연하게 떨치고, 비장하게 선포한다. '여기 새로운 세상을 위해 모인 여러분이 나의 어머니요, 나의 형제들이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마리아는 쓸쓸히 집으로 돌아온다. 아들도 뒤이어 집으로 돌아왔고, 등 뒤에서 아들의 눈물이 번짐을 느낀다. 어릴 때 내가 늘 업어주던 아들, 강보에 싸서 업어 키운 나의 아들. 그녀는 아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삼킨다. 

 

 

(막 3: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막 3:32)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막 3: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막 3:34)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막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 마가복음 3장 31-35절

 


(요 2: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요 2: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요 2: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요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 2: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요 2: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요 2: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요 2: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요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 요한복음 2장 1-9절

 

 

아들은 계속해서 포교를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사람을 모으고, 그를 위해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리아는 두렵다. 최근 그의 친척 조카가 권력자에 의해 죽임 당한 까닭이다. 새로운 세상을 운운하다가 미움 받아 죽임 당하였다 하는데, 듣자하니 내 아들도 그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지라 어미는 두렵다. 이 어미는 너무 두렵다. 날이 지나 마리아가 또 예수를 보러 가는데, 그 날이 유월절 기간이라 사람으로 가득하여야 할 예루살렘은 그러나 어딘가 수상하게 비어있었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향하는 곳을 따라갔고, 거기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피칠갑이 된, 아들 예수를 발견한다. 


예수는 커다란 십자가를 이고 사냥감이 끌려가듯 땅에 피를 흘리며 처형장인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다. 군인의 채찍질로 등에 피가 튀고, 가시에 찔려 얼굴은 피범벅이다. 마리아는 절규한다. '이게 온몸과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한 아들에 대한 세상의 보답입니까. 지금 이 순간 오직 당신만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왜 침묵하십니까. 당신의 침묵이 여기 그 누구의 외침보다 더 사악합니다. 이것이 당신의 나라인가요.' 마리아의 흐느낌이 이어지던 중 갑작스럽게 깡-, 무대를 은은하게 비추던 조명이 돌연 거세게 빛을 내 마리아의 얼굴을 밝히고, 마리아의 눈동자가 파랗게 질린 듯 커다라이 뜨인다. 깡-, 귀를 찌르는 듯한 세 번의 정 소리가 울리고 무언가 살을 관통하는 소리, 마리아는 그 자리에 쓰러진다. 


 

(요 19:17)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요 19:18)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요 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요 19: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요 19: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요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요 19: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 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요 19:3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요 19:3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요 19:34)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 요한복음 19장 中

 

 

아들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허리는 창으로 꿰뚫린다. 십자가에 박힌 채 공중에 내걸린 아들의 몸, 그 그림자가 마리아의 얼굴 위로 잔인하게 떨어진다. 축하고 처진 앙상한 몸과 철철철 흐르는 피. 마리아는 땅에 놓인 아들에게로 기어가, 그 박해에 얼룩진 몸 위에 허물리듯 엎지어 통곡하다. 죽은 아들을 어찌할 줄 몰라하다, 얼굴을 어루만지다, 처절히 바라보다, 마침내 품에 안은 채로 하늘을 우러른다. 자식의 주검을 두 손으로 받친 채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힌 모습, "피에타". 피눈물로 점철된 피에타의 극적인 형상을 자아낸 뒤, 곧바로 무대는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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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적으로 재현된 피에타, 미끈한 대리석 조각의 형상에 배우 김사라의 얼굴이 덧씌인다. 내 심상 속에 간직한 피에타, 그 온유하고 무덤덤한 회백색 대리석의 조각에 색이 입히어 눈동자가 들어섰고, 그것은 곧 감정의 채색됨이며, 나를 투영할 수 있게 됨이다. 불쑥 가까이 다가온 이 심상 앞의 내 마음이 심란하였다. 이내 그 위에 내 어머니의 얼굴을 겹쳐 보일 수 있게 되어버린 까닭. 나는 잠깐 생각을 골라야만 했다. 바깥에는 차가운 바람이 소리 내 불고 있었고 여전 적요했으나, 내 가슴은 참으로 혼란해져 있었다. 


객석을 빠져나온 직후, 습관처럼 이어폰을 꼈고 듣고 있던 음악이 이어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일전 무드를 가라앉혀 두기 위해 틀어둔 쇼팽 발라드는 혼란한 감정에 미치지 못할 미온한 것이라 그저 성가시게 여겨졌다. 플레이리스트를 뒤적거렸고, 조수미 씨가 가창한 '아베 마리아'를 찾았다. 그녀가 가창한 것으로는 슈베르트의 것과 카치니(바빌로프)의 것이 있고, 둘 모두 사랑하나 오늘은 카치니의 것을 택한다. 전자는 비애, 후자는 비탄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건 조용한 꽃잎처럼 맥없이 떨어지는 슬픔과 탄성처럼 터져나가는 단말의 비명 같은 슬픔의 차이. 

 

 

 

 

비탄이 가슴에 들끓을 때마다 들어온 음악, '아베 마리아'는 직역하자면 '마리아님을 경배하나이다'라는 뜻이다. 개신교엔 해당 없는 것이지만, 천주교에는 성모를 경배하는 오랜 전통이 있다지. 일찍이 이 노래를 들으면서도, 나는 그 까닭을 궁금해 하였다. 순수한 궁금증. 여호와와 예수를 경배하면 하였지, 마리아를 경배하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런가. 이제 선뜻 다가온 심상 그 목전에서 생각할 제, 내 어머니를 투영하여 생각할 제, 어쩜 그것은 그녀의 연민과 자애와 자비에 기도한 것이 아니었을지. 마리아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어주소서, 나는 비통하나이다. 


무신론자의 해석이라 불경함과 불충함이 군데군데 박혀 있음을 이기지 못해 영 조심스러우나, 각각의 상징, 예수가 모든 억하와 복수심을 그 몸에 담아내고 받아들여 용서하는 사랑, 대속자의 상징이라면, 마리아는 단장의 아픔에 끊임없이 눈물 흘리면서도 무력하고 초연하게, 오직 슬퍼하는 사랑, 비탄과 연민의 상징이라. 내 짧은 머리로 이해한 예수는 오직 사랑하라 하심이니, 허나 나는 비통하나이다, 울며 보채어도 당신께서는 그저 사랑하라 하실진저 이 가슴 벅차오르는 억하와 눈물을 어찌해야 하니이까, 마리아님 당신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어 오직 깊이 연민하소서. 오늘 다시 들은 음악은 달리 다가온다. 


마리아님 경배하나이다, "아베 마리아." 음악은 보칼리제 형태로, 오직 저 가사만을 되뇌인다. 애통히 기도하는 듯이, 무언가 사무치는 게 있고 떨쳐낼 수 없는 것에 사로잡혀 있다는 듯이. 삼매경에 빠진 사람처럼 간절함에 넋이 나간, 혹 슬픔에 지각과 이성이 멀어버린 것처럼. 무엇이 그리 비통하고 애가 닳아 그 이름을 수없이 외치는지를 조용히 생각해. 그건 무력한 자애와 연민의 상징, 모든 슬픔을 삶으로 겪어낸 당신께서 우리를 이해해주리라고 믿는, 이 자그마한 사람들의 떨리는 목소리가 아니인가.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축복할 제 예언하였다. '네 아들은 이스라엘 많은 사람들의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될 것인즉,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이 하리라.' 그때 당신은 불과 젊은 아낙이 아니었으리이까. 우리가 그 삶에 슬픔을 느끼고, 이내 그대에게 나의 슬픔을 청한다. 그 섶에 엎지듯 쏟아지려는 이 긍휼한 사람들의 마음을 보아라. 

 

 

(눅 2: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눅 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 누가복음 2장 34-35절

 

 

마리아님, 내 어머니는 그대를 참으로 싫어한다오. 하얀 면포를 쓴 예수쟁이 시누이들은 예배일마다 당신을 경배하옵고, 그대의 조그마한 성상을 안방에 두어 기도하면서도 우리에게 끔찍한 말들을 내뱉고, 경멸스러운 일들을 자행했거든. 마리아님, 하여 한때는 나도 당신을 참으로 싫어하였다오. 그건 내 어머니를 따르는 일인 동시에, 당신을 사랑하는 그들에 대한 나의 경멸이, 어찌할 수 없이 그대로 옮아감이었으니. 할머니와 4명의 고모들은 독실한 신자였고, 그들의 악독한 위선은 어린 내 영혼에 강렬하게 남아 인간에 대한 내 태도이자 믿음인즉 원형이 되었다. 거기서부터 태어나는 염세와 불신, 경멸을 이겨내기 위해 내가 낭비한 삶을 쓸쓸히 여기매, 그러나 방황으로 낭비해야만 했던 삶을 이제 나는 축복한다. 


이제 시간은 흘러 복된 망각이 나를 덮어주었고 나는 그들을 이해하니다. 무력하게, 애초부터 그것 말고는 길이 없었다는 것을 내가 이제 아나, 그럼에도 영영 그것이 사랑됨은 아닐 것이리이다. 나는 오직 나만을 위하여 그들을 받아듦이었으니,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펼쳐진 운명을 이해하며 악하게 연민한다. 연민은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복수. 그들에게 끝내 내 삶의 복됨을 보여주리라, 영화를 경전 속에서 찾되 그 삶에서 일구어내지 못한 그대들의 앞, 마지막에 복되게 웃어주리니 그대는 삶이 비천해졌을 때 나를 찾지 말 것이고 나를 잡지 말 것이라. 나는 영영 그대를 불쌍히, 불쌍히만 여길 것이다. 


마리아님, 그러나 내 어머니는 아직도 그대를 싫어한다오. 나와 다르게 그녀의 삶은 억하와 복수로 점철된 까닭. 그 자그마한 몸으로 모조리 받아들인 까닭이외다. 당신은 어떠하였으리까. 당신은 스스로 겪은 기막힌 일들을 대하여 무력하게 이해하고, 그저 다른 방법은 없었다는 것처럼 그저 받아들이심인지. 만약 그렇다면, 끝내 내 어머니도 연민하소서. 긍휼히 여기시고 안타까이 여기소서. 하여 내 어머니가 지금 살고 있는 탈출구가 없는 복수의 땅, 연옥으로부터 건지어 올리소서. 나는 내 삶과 그녀의 삶을 동시에 구원하기에 너무 나약하다. 내 젊음은 우울로 모조리 낭비하였고 이제 늦은 자유를 꿈꾸노니, 한편 내가 자유한 것은 내 어머니를 잊음이니이다. 내가 그녀를 잊지 않고서 마음에 자유한 사람처럼 웃을 수 없음이고, 그녀를 구하지 않고서 마음에 번민 없는 사람처럼 노닐 수 없음을 알아 나는 가끔씩 완전히 무력하니다. 기도가 아무것도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얼음장처럼 차갑게 알지만, 가끔씩 마음 약해지는 오늘 같은 날이면 나는 미약하게 읊조린다. 피에타, 당신을 연민하고 경외하나이다. 그러니 당신이 한 것을 내 어머니께 주시옵소서. 내 어머니를 연민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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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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