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죽음을 배낭 삼아 떠나는 여행 - 타조소년들

글 입력 2023.11.24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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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이가 떠나는 여행엔 울림이 있다. 주어진 삶을 담담하게(혹은 화려하게) 정리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유한한 우리의 마지막을 상상하며 이입한다. 이때의 울림은 슬픔과 감동에 가까운 감정이다.

 

다만 죽은 이를 위하여 떠나는 여행은 다른 울림을 주는데, 이미 죽은 이에게 여행은 성립되지 않으며(적어도 이승의 기준에서), 그 여행은 다만 떠나는 이를 위한 것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애도는 산 자를 위한 것이다. 애도의 여행은, 그러므로, 산 자를 위한 여행이다. 이러한 여행담이 오래 사랑 받는 이유는 이 이야기 또한 진한 울림을 남기기 때문일 테다.


CK 온 스테이지 프로젝트 연극, <타조소년들>을 본다.


입장하면 무대와 관객석이 유독 가까운 극장에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 무대의 네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은 인물들의 표정은 어두운 조명 아래서도 충분히 더 어둡다. 이것은 애도의 이야기. 애도는 막이 오르기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고, 나는 어떤 우울을 예감했으며, 공연은 정확한 시간에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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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청량함을 흥겹게 나누던 네 친구가 있다. 흐르는 음악에 맞춰 격의 없이 몸을 흔들고, 서로를 향해 장난스러운 주먹을 내지르는 소년들. 그 시절은 한 친구 로스의 죽음 앞에서 굳어진다. 로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즐비한 그의 장례식에서 불쾌함을 토로하던 세 친구는 로스가 생전에 농담처럼 외치던 선언을 받들기로 한다. “로스가 로스에!” 로스의 혈기왕성했던 외침은 진중한 유언이 되고, 로스를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 로스로 보내주기 위해 친구들은 유골을 훔쳐 긴 여행을 떠난다.


극은 십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성장담의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빠른 템포로 진행된다. 십대에게 친구의 죽음이란 사건은 쉽게 수습될 수 없는 거대한 일이므로, 배우들은 소품을 이용해 높이를 주고 그것을 밟고 뛰어넘거나, 땀이 흐를 정도로 무대를 질주하면서 떠오르는 십대의 마음을 뜨겁게 표출한다.

 

여행의 모든 난관 앞에서 구체적 계획이나 능숙한 대처 없이 붕붕 떠오르던 세 친구의 혈기는 단 한순간 차분해지는데, 그것은 로스의 유골함을 열어봤을 때다. 하얀 가루로 부서져 존재하는 친구의 모습 앞에서 그들은 잠시나마 침묵하고, 이내 뛰어오른다. 세 친구는 죽음보다 삶에 가까운 청소년기의 강한 생명력을, 죽음을 위하여 사용한다. 여행 중 기차표를 잃어버리거나, 우연히 만난 또래 여자들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좌충우돌 모험은 상실에 대응하는 소년들의 건강한 생리현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죽은 이 없이(비록 극에서는 로스의 영혼이 친구들과 함께 하지만) 죽은 위를 위하여 떠나는 여행이므로, 이들의 여행은 분명 무거운 여행이다. 청소년기의 본능적 순수함과 뜨거움만으로는 결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난이도 높은 여행이므로, 이들은 본래의 순수성에서 가일층 성장해야 한다. 성장의 조건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로스가 남긴 진실을 받아들이고, 그들 자신의 죄책감과 마주하는 것. 타조처럼 모래 속에 머리를 묻은 채로는 성장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우선 고개를 들어야 한다.

 

씸은 폭력의 방관, 케니는 도움의 외면, 블레이크는 사랑의 배신으로 각각 로스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들의 여행은 목적지를 앞두고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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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여행을 포기했을 때 로스를 향해 홀로 질주하는 것은 블레이크다. 오직 그만이 길고 힘겨웠던 애도를 완성할 첫 번째 친구가 될 수 있을 텐데, 네 친구 중 로스와 함께 각각 ‘음과 양’이 되어 균형을 맞춘 이가 블레이크였으며, 번지점프대 위에서 죽음을 추체험하면서 죽은 로스에게 가장 가까워졌던 이 역시 그였고, 동일한 여성을 사랑하게 된 이도 그였기 때문이다. 요컨대 블레이크는 로스와 가장 닮은 친구였으며, 그만큼 그의 자살을 섬세히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


이후 블레이크의 뒤를 따라온 케니도 블레이크와 함께 아름다운 로스의 바다에서 애도를 무사히 마치지만, 씸만은 끝내 애도의 자리에 도달하지 못한다. 블레이크가 로스와 가장 닮은 인물이었다면, 씸은 ‘로스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할 만큼’ 로스를 가장 사랑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닮은 이를 떠나보내는 것과 자신의 한 부분을 떠나보내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블레이크와 씸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 지점에서 발생하고, 나는 이들의 차이 덕분에 이 이야기가 마침내 깊어졌다고 생각했다. 이 간극이 먼 시간과 공간에 의해 깎여 마침내 완만해졌을 때 이야기는 온전히 끝나고, 그들은 어른이 될 테다. 


나무가 빽빽한 가지를 잘라냈을 때 잎과 열매가 건강히 무성해지듯, 삶에서 누군가 떨어져 나간 후 애도를 마쳤을 때 우리도 또 한 번 자라난다. 연극 <타조소년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거대한 여행을 다룬다. 죽음을 배낭 삼아 떠난 여행에서 새로운 삶을 얻는 모순은 아름답다. 청소년을 위한 성장담이 아니라 청소년에 의한 생장담이다. 생장하는 청소년을 통해 죽어가는 어른도 삶을 다시 배운다.

 

 

 

컬처리스트 명함.jpg

 

 

[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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