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맡는 인생

나만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있다
글 입력 2023.11.12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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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냄새를 무진장 잘 맡는다. 어느 정도냐면, 교복을 입던 시절엔 몇 번이나 급식 표를 보지 않고도 급식을 맞췄고, 저녁에 만난 아빠가 점심에 드셨던 메뉴가 중국집이나 갈비였다는 것을 맞출 때도 있다. 요리할 때도 간을 보기보다는 냄새를 맡으며 요리를 한다. 또 일기예보에 비 소식이 없더라도 비 냄새가 진하게 나면 우산을 들고 나가고, 요즘처럼 겨울 냄새가 쨍하게 나는 날에는 조금 더 따뜻한 옷을 입는다. 라일락 향기가 분명 나는데 보이지 않을 때는 한참 앞으로 걸어가서야 라일락이 나오는 때도 종종 있다. 흔히 말하는 ‘개코’인 거다.

 

실제로 강아지는 사람보다 후각이 1만 배나 더 발달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마약 탐지뿐만 아니라 암세포 냄새도 맡을 수 있단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아픈 사람과 내가 화장실을 공유한다면 그 사람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유의 약 냄새 비슷한 향이 있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조금 지저분한 이야기를 해야 해서 설명을 줄이겠다. (물론 이 모든 건 절대 100퍼센트 정확한 건 아니다)

 

아무튼 이토록 예민한 후각은 좀 소름이 돋는 면도 있고 불편함을 줄 때도 있지만 꽤 낭만적인 면도 있다. 그중에서도 세부적인 냄새로 기억하는 추억들이 많다는 점은 낭만적인 면이다. 나는 여행지는 대부분 그 냄새로 추억하곤 한다. 미세먼지 농도가 진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 특유의 흙 향기는 제주도 냄새와 비슷하다. 또 어릴 적 맡았던 바닐라 향 토끼 인형 냄새는 바르셀로나 냄새와 비슷하고, 인조 코코넛 향과 햇볕 말린 바다 짠 내는 니스 해변을 떠오르게 한다. 크레파스나 지점토 같은 냄새를 맡으면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나만 맡고 아는 냄새 중에 또 특이한 냄새가 있다. 매년 까먹고 있다 보면 가을쯤 한 번씩 존재감을 풍기는, 사회탐구 과목 냄새다. 그러니까, 초등학생 시절 사회탐구라는 과목을 배우면서 맡았던 공기 냄새다. 1년에 2번 정도 맡을 수 있다. 조금은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그때 아마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처음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 냄새를 맡으면 세상이 거대하게 느껴진다. 여행할 곳도, 재미있는 일도 끝도 없는 느낌이 드는 자유로운 냄새다. 들뜨는 냄새이기도 하다.

 

올해 가을,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이 사회탐구 냄새를 확 맡고는 잊고 있던 감각이 번뜩 되살아났다. 그건 재미와 설렘의 감각이다. 요즘은 생산적이고 편한 것을 최우선으로 취하면서 조금이라도 비생산적인 것들은 뒤로 미뤘다. 비생산적인 것들이 내 삶을 들뜨고 재밌게 만들어 주는 것들이라는 것 자체를 잊었던 것 같다.

 

몇 개만 예를 들어보자면 이렇다.

 

나는 옷을 코디하고 머리를 매만지며 스타일링하는 것에서 재미를 느낀다. 그렇지만 그건 시간을 들여야 하니 비효율적이다. 그러면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아무렇게나 옷을 주워 입는다. 또 느리게 산책하며 주변 구경하기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과제도 하고 자소서도 작성해야 하는 마당에 시간이 아까우니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것으로 대체 하기로 한다.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도 파스텔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정말 즐겁지만, 그건 바쁜 일이 없어질 때까지 미루고 유튜브나 보기로 한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지내기 위해서는 남을 위한 배려도 힘들다. 내 앞길만을 보며 빠르게 걸어가기 바쁜데 주변을 살필 여력이 있을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까지 몽땅 다 생산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고 비효율적인 시간과 재미를 자꾸만 배제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인생을 재밌고 풍부하게 살아가는 것(living life to its fullest)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주어진 임무처럼 그저 충실하게만 살고 있었다.

 

내가 요새 깜빡했던 건 행복이 삶의 굵직한 성취, 나의 사회적 지위 혹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달린 게 아니라는 점이다. 행복은 삶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남들보다 많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과도하게 긴장된 상태로 지금의 재미를 부정하며 사는 삶은 살고 싶지 않다.

 

이번 여름 혼자서 한 달 정도 여행을 했다. 혼자 여행을 하면 자연스럽게 나만의 규칙이 생긴다. 여행 중 가장 집중해야 할 부분은 하루하루 내가 누릴 수 있는 재미를 충분히 느끼는 거다. 도중에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여행에 들인 시간과 비용이 아까우니 얼른 잊고 다시 재미있는 일을 한다. 평생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를 스쳐 가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도 여유 있게 즐긴다. 비효율적인 관계에서 오는 재미를 만끽한다. 그저 공원을, 동네를 목적 없이 거닐고 털썩 주저앉아 구경하며 시간 낭비도 한다.

 

여행에서의 기쁨은 여행을 통해 특정한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여행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서 나온다. 여행하고 있다는 그 즐거움 안에,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여행지에서의 모든 순간의 낭비조차도 사랑하게 된다.

 

어쩌면 내가 살고 있는 일상은 더 큰 비용과 시간을 들이고 있는 여행지이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나오는 비효율적인 재미와 행복도 최대한 만끽해야 하는 의무가 있지 않은가?

 

이 냄새를 인생에서 언제까지 기억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그래도 괜찮다. 이젠 이 글에서도 사회탐구 냄새가 희미하게 맴돌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다시금 냄새를 맡을 때마다 그 향이 더 구체적으로 변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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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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