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늘한 아이슬란드 빙하조각을 담은 연주, 비킹구르 올라프손 [음악]

비킹구르 올라프손 내한 관람
글 입력 2023.12.18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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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분야에서 정점을 달린 이가 등장하는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소위 말하는 ‘대가’가 등장하면 그 이후의 예술가들은 그의 아류작이 되거나 그의 스타일을 따르지 못한 실패자가 되고는 한다. 전혀 다른 사조를 개척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이전의 예술은 부흥기의 영광을 질질 끌어가며 내리막을 걷기도 한다.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게 좋은 작품들은 늘 등장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우리의 눈과 귀가 이미 너무나 유명해진 누군가의 형식에 절여졌다는 점이다.

 

오늘 글에서 소개할 연주곡 또한 그렇다. 바로 바흐(Bach)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크기변환]싸구려 -글렌굴드.jpg

 

 

앞서 극단적으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좋은 연주를 남긴 피아니스트들은 많다. 그럼에도 가장 유명한 골드베르크 연주자를 딱 한 명만 꼽으라면 단연 글렌 굴드(Glenn Gould)일 것이다.

 

건조하게 박자에 맞춰 타건하며 어떤 낭만적인 뉘앙스도 느껴지지 않는 피아노 음과 동시에 희미하게 들려오며 극도의 몰입을 표현하는 그의 콧노래는 모순적인 매력을 준다. 그의 연주법을 단어에 빗대자면 ‘적확함’보다 적확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사실 나는 바흐 스페셜리스트로써 굴드의 연주 중 골드베르크 변주곡보다는 Partita No. 2 in C minor, BWV 826를 더 좋아한다. 그럼에도 골드베르크를 틀어놓을 때면 습관적으로 굴드의 것을 재생하곤 했다. 물론 그의 연주가 좋아서도 있지만, 이미 그의 연주가 귀에 익어버린 탓도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다녀온 ‘비킹구르 올라프손(Vikingur olafsson)’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피아노 리사이틀이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과연 이미 귀에 익어버린 굴드의 것이 아닌 연주를 들었을 때 나는 좋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인가.

 

 

[크기변환]비킹구르1.jpg

 

 

비킹구르 올라프손은 1984년생으로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피아니스트다. 그런 그를 처음 알게 해준 앨범은 드뷔시와 라모의 작품을 모아놓은 ‘드뷔시-라모’였다.

 

이 앨범 속 그의 연주는 말 그대로 아름다웠다. 과도한 감정과 낭만이 느껴지는 연주(특히 연주자의 비언어적 몸짓이 지나치게 충만할 때)를 때로는 부담스럽게 느끼기도 하는 나에게 올라프손의 드뷔시와 라모는 건조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정확한 지점의 감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 그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앨범으로 내놓았을 때는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품었다. 굴드를 주로 듣던 나에게 있어 올라프손의 골드베르크는 자칫 너무 힘이 없거나 마냥 예쁘게만 흘러갈 것 같았다. 절제되어 있어도 그의 안에는 분명 여린 아름다움을 다루는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발매된 앨범 속 녹음은 듣기 좋았고, 내한 소식을 들었을 때 고민 없이 티켓팅을 하게끔 이끌었다. 그럼에도 실황과 녹음은 분명 다름을 알기에 마음 한 켠 걱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게 그를 한국에서 만났다.

 

 

[크기변환]비킹구르2.jpg

 

 

비킹구르 올라프손은 아이슬란드 출신이다. 누군가의 출신이 꼭 그의 색을 정한다고 여기진 않지만, 올라프손의 음악은 놀랍도록 아이슬란드를 많이 닮아있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바흐의 골드베르크에서 느낄 수 있으리라 여기지 않았던 지점이었기에 연주 내내 새로운 재미를 한껏 느끼기에 충분했다.

 

처음의 아리아를 시작으로 총 30개의 변주곡이 울려 퍼지고 다시 아리아로 회귀하는 형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수학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짜임 있게 구성된 음악이다. 거기에 더해 이제껏 들어온 굴드의 음악은 정직한 타건을 바탕으로 했던 만큼 나에게 골드베르크는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나는 올라프손의 골드베르크에서 인상주의가 떠오르는 음악적 낭만을 느꼈다. 특히 아이슬란드의 자연이 떠오르는 연주였다. 자연적이라고 하기엔 무척 현대적인 연주지만, 올라프손의 타건은 아이슬란드의 빙하 같은 투명한 얼음을 떠오르게 했다. 섬세하고 맑은 음은 곧 터질 듯한 비눗방울보다 속이 가득 차 있는 얼음덩어리를 닮아있다.

 

그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 내려앉을 때마다 얼음 조각이 하나씩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드뷔시의 인상주의가 아닌 바흐의 고전에서도 올라프손은 특유의 세심함으로 맑으면서도 힘 빠지지 않는 연주를 능숙하게 보여주었다.

 

 

[크기변환]올라프손5.jpg

 

 

많은 클래식 연주가 그렇지만, 특히 골드베르크는 자칫하면 지루해지며 길을 잃을 수 있기에 더 어려운 연주라고 생각한다. 30개의 변주곡은 각자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을 지녔는데, 너무 비슷하기만 하면 지루하고 너무 다르면 ‘변주곡’이라는 제목과 다르게 서로 이어지지 않고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올라프손의 연주는 지루할 틈 없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흘러간다. 그 사이사이 펼쳐지는 풍경은 다양했다. 얼음처럼 투명하다가도 밤하늘 별빛처럼 반짝거리고 경쾌하다가도 묵직하다.

 

그럼에도 공통점이 있다면, 그의 연주는 손가락 사이로 북유럽의 찬 바람 한 줄기가 늘 선선히 흐르는 듯 느껴진다. 따뜻할 때도 어딘지 서늘한 기운을 주고, 맑을 때는 더욱 청명하게 느껴지게 하는 바람 한 줄기 말이다. 이 지점 때문에 현대적인 연주임에도 아이슬란드의 자연이 자꾸만 떠올랐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자연이 웅대하고 장엄한 기운을 주는 종류의 것이라기보단, 마치 피보나치수열 같은 ‘수학을 품은 자연’이라는 것이다.

 

정제된 풍경을 한참 동안 떠돌던 연주는 어느새 다시 Aria Da Capo, 즉 최초의 아리아를 다시 반복한 후 끝이 난다. 분명 처음과 같은 아리아지만 느낌은 전혀 다르다. 음악적 여정의 마지막을 갈무리하며 하나씩 눌리는 음을 듣자니 앉아있던 홀은 커다란 동굴로, 울려 퍼지는 아리아는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로 바뀌어 있었다. 거대한 시간의 흐름을 동굴에서 느끼듯, 올라프손이 연주하는 골드베르크는 바흐부터 이어져 온 음악의 아름다움을 선물해 주었다.

 

늘 같은 방식의 감상에 정체되었던 나에게 새로움을 선사했다는 점만으로도 당분간은 그의 음악을 돌려 듣게 되리라. 연말의 어느 추운 겨울날, 한국에서 만나 새로운 세상을 소개해 준 아이슬란드의 낯선 피아니스트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글을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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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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