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무한한 가치를 지닌 글을 써 내려가, 뮤지컬 '브론테' [공연]

글 입력 2024.04.0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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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브론테>는 여자가 글을 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빅토리아 시대, 자유를 쫓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던 세 자매의 삶을 다룬 뮤지컬이다. 작품은 『제인 에어』의 저자 샬럿과 『폭풍의 언덕』의 저자 에밀리, 그리고 『아그네스 그레이』의 저자 앤의 인생과도 같았던 글쓰기를 이야기한다.


잉글랜드 요크셔 출신인 브론테 家의 세 자매는 가난한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그들은 힘들고 슬픈 상황에서도 이야기를 상상하는 과정을 통해 아픔을 극복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조언하고, 재구성하며 더욱 풍성하고 세밀한 글을 써 내려갔다. 그러던 중 샬럿의 제안으로 세 자매의 글을 담은 책을 집필하기로 마음먹는다. 처음에는 반대했던 에밀리 역시 벌판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듣고 난 후 속도를 붙인다.


그런데 자매들을 갈라놓는 한 통의 편지가 날아온다. 편지의 발신자는 자신은 미래에서 왔으며, 그녀들의 죽음을 지켜봤다는 음산하고 당혹스러운 말을 건넨다. 그러면서 샬럿에게는 오만함과 이기심을 버리라 하고, 에밀리에게는 당신의 작품이 성공할 것이니 본인을 믿으라 하고, 앤에게는 자신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며 세 자매를 혼란에 빠뜨린다.

 

불쾌하고 꺼림직한 편지에 샬럿은 불안해하고, 에밀리는 힘을 얻고, 앤은 방황한다. 결국, 편지에 대한 상반된 입장은 이야기에도 영향을 미치며 세 자매의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끝내 하나로 좁혀지지 않는 의견에 샬럿은 집을 나가고, 에밀리와 앤은 남아서 각기 다른 책을 출판한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는 평론가들에게 판이한 평가를 받게 된다. 이후 홀로 남겨진 샬럿의 회고를 통해 목소리와 편지의 정체가 밝혀지며 극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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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0 오후 3시

 

 

아주 어렸을 적 읽었던 고전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 그리고 조금은 생소한 『아그네스 그레이』를 집필한 작가 세 명의 일생을 관찰할 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었다. 뮤지컬 <레드북>이나 <실비아, 살다>처럼 한 시대 속 한 여성의 삶을 다룬 이야기는 많이 접했지만, 동시대에 태어난 세 명의 작가를 한 작품에서 만나는 경험은 생경했다. 심지어 한 지붕 아래 피로 얽혀있는 브론테 家의 세 자매라는 점이 그들의 관계성을 한층 더 긴밀하게 만들어주었다.


따라서 세 배우의 연기 합과 시너지가 가장 중요하게 다가왔다. 내가 관람한 회차는 정가희 샬럿-전해주 에밀리-송영미 앤 페어로, 완전히 다른 개성과 톤을 지닌 배우들이기에 더욱 짙은 캐릭터성과 흡입력을 보여줬다. 이번에 처음 만난 배우분들인데도 한순간에 팬이 될 정도로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 연기와 노래 실력을 자랑했다.


세 자매가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에서는 그림자 연출을 통해 더 큰 몰입감을 선사했다. 세 배우가 앉아있는 위치와 각도를 고려하여 조명을 설치하고, 거기에 등불, 나뭇가지, 창문 등의 소품을 비추거나 움직이는 방식으로 빛의 마술을 보여줬다. 소품에 반사된 그림자는 뒷면의 영상과 어우러져서 마치 구연동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또한 이야기를 구연할 때 흰 천을 스카프, 가방, 모자처럼 활용하고,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 천을 바닥에 덮는 방식으로 비유한 점도 눈에 띄었다. 천이 이야기 속 수많은 물체를 대변하며 갖가지 소재를 표현하는 듯해서 상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극적인 순간인 죽음을 연출하는 장면에서도 같은 천을 덮어야 했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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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에서는 라이브 밴드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들의 연주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가장 하이라이트인 ‘찢겨진 페이지처럼’ 넘버에서 세 자매의 감정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샬럿은 에밀리가 쓴 글이 파멸적이고 끔찍하다며 고치기를 권하나, 에밀리는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쓴 글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둘을 말리는 앤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의견을 굽히지 않는 에밀리와 샬럿의 감정이 격해지며 갈등이 고조된다. 여기서 그들의 뒤틀린 내면을 박자가 널뛰는 드럼으로 표현했을 때의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오직 이 연주만을 위해 다시 공연을 보고 싶을 정도로 숨 막히는 찰나였다.


초반에 깔아둔 복선은 결말에서 회수되고, 그러면서 목소리와 편지에 대한 궁금증이 자연스레 해결된다. 그 정체가 누구인지는 작품을 통해 직접 발견하길 바란다. 비록 브론테 자매를 흩트려 놓은 인물이긴 하지만, 그 속에는 그녀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뿍 들어있었다. 그렇기에 세 자매는 비로소 자기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고, 세상에 상상의 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


본인들의 꿈과도 같은 글을 펼쳐내겠다는 포부가 담긴 ‘써 내려가’ 넘버에서 노래했듯, 단명한 브론테 자매는 짧은 삶 속에서도 무한한 가치를 지닌 글을 써 내렸다. 유명한 서적 뒤에 묻혀있던 샬럿, 에밀리, 앤이란 세 작가를 뮤지컬로 옮기고, 그들의 존재를 다시 조명한다는 점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소극장을 재치 있게 활용한 아이디어와 배우들의 끈끈한 호흡이 돋보였던 뮤지컬 <브론테>. 만약 그녀들이 살아있었다면 어떤 작품을 써 내렸을까? 그 해답이 담겨 있을 목소리와 편지의 행방을 찾아 나 역시 또 다른 글을 써 내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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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커튼콜 '써 내려가'

 

 

[최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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