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비주류 인생

글 입력 2023.10.30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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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메인 스트림에 몸담은 적 없는 삶이라니까”

앞뒤 문맥은 기억나지 않는다. 숯불 닭발을 앞에 두고 맥주를 반쯤 비웠을 때인가, 마침 한 모금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을 때였던지도 모르겠다. 이 말을 들은 친구는 웃었고, 나는 상당히 억울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건 내가 원한다고 갑자기 확 바꿀 수 없는 일이다. 메인 스트림, 주류에 몸을 던지는 일은 취향으로도 ‘나’라는 존재가 지니는 특성들로도 말이다.

비주류의 삶이란 침묵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쉽게 일반화되어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고정관념과 편견을 그대로 견디는 일이기도 하고, 다른 이들이 아무런 고려 없는 단어들을 내뱉을 때 그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입을 다무는 일에 익숙해지는 일과 입을 열지 못하게 하는 압박 자체에도 익숙해지는 일에 해당한다.

나의 일상이 대중의 일상과 다르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과 그 다름을 티 내지 않으려고 하는 일이 너무 당연해서 이러한 인지적 노력이 남들에게 필요치 않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삶이다. 침묵이라고 하면 너무 능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입에 재갈이 물린 채로 태어난 삶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끔은 언어가 무섭다. 존재를 지우는 일을 넘어서, 존재의 배제 자체를 지워버린 채 단어를 입에 담고 바라보는 눈이 두렵다. 그럴 때가 오면, 다름을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행위의 주체를 자동에서 수동으로 전환한다. 재갈을 문 비주류가 점유할 수 있는 언어는 그리 많지도 않다.
 
명명은 주류가 가진 권력이다.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유니콘과 같은 존재로, 상상 속의 존재로 명명 당하기만 하는 존재가 가진 명명하는 힘이란 거리의 민들레 씨앗조차 날리지 못할 만큼 약하다.

 

“인간에게 언어는 실재를 생성하는 데 주요한 기능을 한다. (...) 하지만 이름 짓기의 모든 행위들은 한 사회가 실재로 받아들이는 것을 배경으로 하여 일어난다. 문제는 어떤 사람이 온전하고 책임감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지려면 (...) 그 사람의 일상적 경험에 부합하는 보다 더 큰 실재를 규정할 때 누가 그런 사회적 승인권을 갖느냐는 점이다.”

 

도나 J. 해러웨이,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아르테, 2023, 142쪽

 


타자가 자신의 실재를 규정할 때, 다수에 의해 명명된 언어를 빌려야 한다는 점은 자기 순환적이라는 점에서 뼈아프다. 그리고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을 벌일 때, 자신을 규정하는 언어 자체에 먼저 반기를 들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이들은 이중고에 시달린다. 
 

 

“한 사람이 말하는 상식이란 그의 생각하는 면보다는 그가 생각하지 않는 면을 더 자주 보여주며, 그의 생각하지 않는 면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비교적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당신은 방금 너무 적나라했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황정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디디의 우산》, 창비, 2019, 266쪽

 


사람들은 너무 손쉽게 말을 얹는다. 정상과 상식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소수자들을 향해 ‘너희는 모두 같은 생각이니?’라고, 당사자들을 만나본 적도 없으면서 ‘모두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텐데, 일부의 과격한 생각이다’라는 단언. 고정관념에 기대어 있지만, 기대 있는 모두가 고정관념이라고 생각지 않는 관념. 비주류 당사자들에게 당사자성마저 빼앗아 가버리는 질문. 언어도 없고 형체도 없고 당사자성마저 뺏긴 이들에게 다수는 너무 ‘적나라’하게 상식이라는 폭력을 행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를 공격하기 위해 비주류는 다시 주류의 언어를 빌려야 한다. 주류의 입맛에 맞게, 예민하지 않게, 너무 감정에 치우치지 않게. ‘전통 있고 명망 있는 아카데미 시상식’이라는 말은 ‘백인 남성 중심의 아카데미 시상식’이라는 말과 동의어라고 이야기하는 일이 얼마나 공격적으로 들리는지 상상해 보라.
 
*
 
현재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척이나 미미한 영향을 끼치는 소수자성을 하나 이야기해 보자. 나는 왼손잡이다. 2023년에 왼손잡이란 단어가 가진 함의는 무엇일까? 함의랄 것도 없다. 왼손잡이는 오른손잡이의 반대말일 뿐이다. 

조금 더 옛날로 가보자. 그렇다면 1990년대 왼손잡이가 가진 함의는 무엇일까? 90년대생인 나는 지인들에게 심심치 않게 조부모와의 식사 자리에서 왼손을 쓰는 내게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집어던진 일화를 말하고는 한다.
 
부모님이 왼손을 잡은 채 오른손으로 글씨 쓰기를 시켰던 일, 오른손잡이용 연필 잡기 보조 기구를 왼손에 꾸역꾸역 끼운 채 연필을 잡는 연습을 하던 때, 손가락 크기에 맞지도 않는 구멍에 손가락을 끼운 채 가위질을 하던 경험들이 내겐 남아있다. 당시에는 상당히 성가셨지만, 현재는 그렇게 생각도 나지 않는 아주 잔잔한 기억이다. 대학교에 와서 일체형 책상을 보고는 왼손으로 어떻게 사용하라는 건지 황당했던 경험과, 오른쪽 팔걸이 안에서 책상을 꺼내 쓰는 강당형 의자에 앉을 때는 왼쪽 좌석의 책상을 꺼내 쓴 일도, 살짝 귀찮은 일일 뿐이다. 식당에 가서 “죄송한데, 제가 왼손잡이라서요.”라는 말로 상대와 자리를 바꾸는 일도, 지하철 개찰구를 지나갈 때 언제나 오른쪽에 있는 카드 태그를 멀리 손을 뻗어 찍는 일도 나만이 가진 사사롭게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까지 호주는 학교에서 왼손잡이의 왼손 글쓰기가 허용되지 않았다. 미국은 1920년, 유럽은 50~60년대가 되어서야 왼손잡이 학생이 왼손으로 글을 쓰는 것이 허용되었다. 너무 예전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2019년까지 한국전력공사에서는 전기 및 전자 부분 직원을 채용할 때 오른손잡이로 제한했다. (중앙선데이, “은밀한 차별” 전철·화장실 등 24시간 불편한 왼손잡이, 2022.08.13)

이것은 일상 속 약간의 귀찮음과는 전혀 다르다. 개인적인 불편함이 아닌 제도적인 문제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도대체 왜 왼손잡이라는 비주류성을 틀린 것으로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언제나 논리적인 답변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원래 예전부터 왼쪽을 불길한 것으로 여겨서 그런 거야.” 혹은 “원래 사람들은 모두 오른손을 써야 해”라며 ‘원래, 예전부터’ 그렇다며 자신들의 혐오를 정당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원래 그렇다’라는 자연주의적 오류는 자연적 질서가 인간적 질서의 규준이 된다고 믿으며 자연적 질서인 사실 명제를 당위 명제(~해야 한다)로 착각할 때 발생한다. 자연에는 당위 즉, 이렇게 해야 한다는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연을 관찰하여 ‘사람들은 글씨를 쓸 때 오른손을 사용한다’라는 사실 명제를 도출한다. 이 사실 명제에서 ‘그러므로 사람들은 글씨를 쓸 때 오른손을 사용해야 한다’라는 당위 명제를 이끌어 내는 것은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는 문장이 된다. 자연적으로 그러하다는 당위를 내세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회의 관습과 전통은 언제나 주류 권력만을 위해 작동해 왔다는 역사적 사실뿐이다. 

‘원래 그렇다’라는 문장이 이유에 대한 답변이 되는 명제가 가지는 문제는, 그 명제 자체가 참/거짓의 판단이 이미 끝난 명제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원래 그렇기에’ 모두가 따른다는 점에서 명제는 이미 참이 된다. 논증의 과정은 다수가 대신한다. 밀은 《자유론》에서 관습을 더 이상 논증이 필요하지 않은 명제로 여기는 점을 지적한다. 그로부터 벌써 16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비판적 사고 없이 관습과 전통을 믿는다. 

당연히 그러할 것으로 생각하며 이야기하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으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며 이야기했고 또 보자며 웃으며 인사했다. 그 사이에 비주류 인생의 침묵은 쌓이고 애매한 답변과 어색한 쉼이 길어진다. 아니라는 답변으로 부정하고 정정하던 대화부터, 더 이상 대화에서 손사래를 꺼내지 않는 지금까지, 나는 나를 교차하지 않고 통과하는 단어들에 계속 갈 곳을 잃고 할 말을 잃는다. 
 
피투被投. 나의 실존을 설명하는 단어는 언제나 수동적이다. 세상을 향해 투신하지 못하고, 언제나 투신 당하는 실존. 끈덕지게 남아있는 불쾌와 저릿함은 무엇에서 기인하는가? 그것은 공집합이자 피투적이자 사람으로 환대받지 못하는 ‘나’에게서 온다. 가짜인 가짜, 공허인 공허에서 온다.  

언어는 표상의 기호다. 공동체 안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로 약속을 한 뒤에야만, 단어가 만들어진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그러니, 자신이 살아가는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나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 계속 공동체에서 밀려난다. 내가 어디에 속하는가를 항상 고민하게 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내가 사용하는 언어 사이에 교집합이 사라지고, 우리는 같은 단어에 같은 뜻을 명명하지 못하고, 우리 사이에 간극이 깊어지면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평생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사고가 언어에 갇힌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표현할 수 있는 사고는 언어에 갇힌다. 그리고 사고는 표현에 갇힌다. 기의를 빼앗긴 단어를 입에 담을 때마다, 언제나 세상에서 추방당하는 경험을 하며 끊임없이 그 안의 정의를 의심하고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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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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