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의 블루, 깊고 짙고 푸른 - 쇼팽, 블루노트

깊은 밤 북극성이 지나는 하늘의 색
글 입력 2023.12.2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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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수요일 밤 거리 위로는 북극 하늘이 쏟아져 내렸다. 멀리 북국 北國의 하늘색을 띤 밤, 기록적인 한파가 이 경의선 책거리에까지 골고루 지나고 있었다. 바람 가릴 아무런 차양도 돌부리도 없이 매끈히 이어진 길, 냉기의 파동이 계곡처럼 오므라진 바람목을 향하여 쏟기듯 씻기듯 흘러 지났다. 밤은 무지 찼고, 계절이 지나는 하늘은 유달리 깊고 짙고 푸른 어둠으로 내게 생각되었다.


이런 날에는 언제나 쇼팽을 생각해. 담배 생각마저 줄행랑을 치게끔 하는, 채찍같이 추운 이런 밤이면 나는... 이 밤과 꼭 맞을 시퍼런 물감으로 채색한, 유화의 풍경 같은 음색. 허나 음표라는 안료를 뭉개어 채색한 그의 세상엔 우울 따위 없을, 낭만적인 비애로 가득하다. 아 입김이 잔뜩 퍼지는 하늘 위로 나는 그를 생각해.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 고민은 짧았고, 역시 오늘 같은 여느 때에는 발라드를 틀게 되지, 콘체르토를 들어보기에 이 계절이란 우수 憂愁로 가득하니.

 

쇼팽은 우리 삶 속에 은근하게 가득 차 있었으나, 영화 '피아니스트'에 이르러 내게 온전히 닿았다. 2시간 30분의 긴 러닝타임, 음악도 소리도 없는 긴장스런 적막감의 대미를 매듭짓는 발라드 1번에서 드디어 쇼팽이 내 삶에 닿았다. 아마 그때부터 클래식을 들었던 것 같다. 그 후로 한동안은 요리조리 클래식만 찾아들었던 것으로 기억하나, 내가 클래식을 좋아하노라 말하기에는 예나 제나 모자람으로 가득하다. 폭넓게 애호하지를 못하여 말이야.


말하자면 나는 모차르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모차르트는 어딘가 귀족적이며, 발레나 궁중무도에 어울리지. 그의 음악적 훌륭함을 이해하는 머리쯤이야 내게도 달려 있으나, 그게 내 심장에 닿질 않으니 별수 없는 노릇. 비애나 유장함이 없는 음악을 아마 나는 사랑하지 못하였나니, 그건 내가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닿질 않아 무감한 것, 이런 이야기를 조심스레 건네볼 만큼의 체험 정도만이 내 기억 속에 있다. 하여, 내 플레이리스트에는 모차르트가 단 한 곡도 없어. 그런 내가 좋아하는 건 클래식이 아니라, 어쩌면 쇼팽이었을지도.


*


홍대와 신촌 사이, 경의선 책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야트막한 언덕 위로 가까이 보이는 곳. 오늘의 극장은 '산울림 소극장'이다. 듣자 하니 퍽 유서 깊은 극장인 것 같더군. 따로 디깅하지는 않았으나 회사 선배에게 '홍대와 신촌 사이'를 언급하자, 곧잘 그 이름이 튀어나오는 것으로 보아선 말이다. 그는 먼 기억 속을 더듬고는 산울림의 이름을 꺼내어 내게 주었다. 어떤 추억이 서린 눈빛으로 내게 주었다. 그건 몹시 보기에 좋았다.


길 건너편에 다다랐고, 거기서 소극장의 전경을 보노라면 퍽 기억에 남을 법한 풍경에 흡족하다. 1층 로비가 썩 머물고 싶은 브라운으로 추위 속의 우리들을 끌어대고 있었으나, 추위에 밀려 곧바로 지하의 객석으로 내려왔다. 급격히 들이찬 훈기에 안경이 번진다. 유리에 젖은 습윤이 잦아들고, 무대가 보인다. 반원형의 객석으로부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무대에는 아주 단정한 구성, 소품 몇 가지와 피아노 한 대만이 놓여 있었다. 책상과 소파와 피아노 한 가지씩이 전부였다.


이 단촐한 곳을 배경으로 쇼팽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라. 나는 그의 음악을 사랑하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아주 게으른 사랑이거든, 게으르고 느리고 깊은, 나의 사랑은. 그래도 사랑은 사랑인지라, 이렇듯 다가온 기회를 내가 붙잡은 게 아니었겠어? 나는 어딘가 짓궂은 사랑을 대할 때처럼 그 무대를 기다렸다, 초조함과 가장된 무던함 사이를 오가는, 기분 좋은 떨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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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 한 명의 배우가 무대 위로 나와 쇼팽을 연기하기 시작한다. 극 중 상드 역의 말을 빌리자면 '섬세한 소녀 같은' 남자 쇼팽, 그를 연기하는 배우의 눈이 더없이 크고 맑아 좋았다. 그건 내 상상 속의 쇼팽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그의 음악은 아주 섬세하며 나긋나긋해, 격정적으로 감정을 분출하는 발라드의 코다(CODA) 부에서조차 한결같이 느껴지는 어떤 보드라움이란, 그의 천성과 성정을 일관되게 대변하는 듯하지. 섬세하고 예민하며 여린 사람, 크고 맑은 눈을 한 쇼팽은 보드라운 목소리로, 천진난만하고도 깨질 듯 투명한 그의 감수성을 표했다.


섬세하여 예민한 사람. 섬세함과 예민함이란 똑같은 자극과 감상에 대하여서도 더욱 깊이 반응하는 감각적 반응이기에, 그건 그의 음악을 풍성히 만드는 동시에, 그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로 하여금 음표의 한 올 한 올 깊숙이 들여다보게 하는 것은 그의 섬세함이었으나, 주어지는 세상의 자극에 대하여 과민케 하는 것은 그의 예민함이었다. 무릇 섬세하여 예민한 사람에게 세상이란 너무 급변하고 어지러우며 과한 자극으로 가득 찬 곳이지. 그래서 쇼팽은 겁과 불안이 많았고, 그런 그에게 연인 조르주 상드는 그 얼만 한 뮤즈요 안식이었을지.


극의 주제는 쇼팽의 일생이다. 조금 더 자세히 고하자면 연인 조르주 상드와의 서사에 조금 더 방점이 찍히는. 극의 전반 구성은 단순하여 명료했다. 쇼팽의 일대기 사이사이에 그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구성. 일찍이 다른 문화초대 리뷰에서도 수차례 언급하였듯, 음악 리뷰의 어려운 점은 서사의 부재에 있다. 물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의 게으름에 있겠으나, 이런 관점에서 본 극은 아주 친절하다. 쇼팽의 생애와 음악을 한 데 엮어서, 손쉽게 머금어보게끔 제공한다.


피아노 리사이틀과 연극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은 예상보다 커다란 시너지를 일으킨다. 음악에 서사를 매칭시켜 몰입감을 증진시키는 것뿐 아니라, 관람 난이도를 완화해주었다. 내 주의가 산만한 탓인지, 공연이 60분이 넘어갈 즈음부터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이 언제나 고역이었는데, 연극과 공연으로 장르가 교차하면서 주의가 환기되는 것은 아주 쾌적한 공연 경험이었다.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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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들어본 것이 많아 개인적으로는 좋았다. 곡에 대한 기억, 귀에 익숙한 진행 위에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더얹노라면, 비교를 통해 관람은 더욱 풍성해진다. 5회차, 20일 자 공연은 쿠프카 피오트르의 연주로 채워졌다. 쿠프카의 연주는 내 기억 속의 그것보다 훨씬 힘차고 남성적이며 중년답다. 첫 곡인 폴로네즈 1번의 이명은 '군대', 개선군의 늠름한 발걸음을 표현하는 듯한 곡, 정박에서 조금씩 여유를 두는 쿠프카의 해석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조급하지 않은 여유와 그럼에도 음표를 단단히 내리누르는 때 퍼져나오는 음정의 단호함이 원숙함의 상으로 다가온다. 이는 프로그램 3번인 혁명에서도 마찬가지.


그리고 하나씩 차례를 지나, 이내 발라드 3번이 흘러나온다. 언제나 과민한 나를 안식케 하는 쇼팽의 발라드. 주로 즐겨 듣는 건 1번과 4번이지만, 3번도 그에 못지않게 애호해왔다. 발라드 3번은 다른 두 곡과 다르게, 조금 더 밝은 무드를 유지하는 곡. 어디까지나 쇼팽의 예민하고 과민한 성정, 그에 기인하는 우울감이 다른 두 곡에 깊이 반영된 것에 비하자면 말이다. 그의 음악에서는 좀체 명랑함이 엿보이지 않아. 그보다는 우수에 가깝지, 서정적이라는 말보다도 깊은, 아주 섬세한 영혼의 보드라운 슬픔과 무력한 전율과도 같은.

 

 

 

 

쿠프카가 연주하는 발라드에서도 일전의 원숙함은 느껴진다. 굳이 비교하자면 위에 인용한 임동혁의 발라드가 그 빠르기를 통해 소년다운 격정성을 드러내고 있다면, 쿠프카의 발라드는 조금 더 단단하여 담담하게 느껴진다. 그건 내 영혼의 어느 한 부분을 가리켜 드러내 주었다. 음악에 깊이 감응하며 분출되듯 드러나 버리고 사그라들 줄을 모르는, 격정하는 나의 감정을 통해서. 나의 블루, 깊고 짙고 푸른.


그의 음악을 듣노라면 그가 자신의 생애에 있어 얼마나 우울하였을는지, 외부의 자극과 과민한 반응을 통해 날로 심약하였으며, 그럼에도 음악적 열정과 재능을 통해 그 모든 감정들을 음표와 마찬가지로 다듬어내었는지를 이해할 것만 같아. 나는 그를 이해할 것만 같아, 특히나 이런 밤, 우수로 가득 차는 날의 발라드 앞이면. 그의 우울한 심경이 보드라운 음색을 통하여 세상에 태어날 때, 그것은 이미 아름다움이 되어있기에 우울이 아닌 우수가 되어버리지. 음률은 애초에 우울이란 감정을 똑바로 가리켜 곧대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었으니,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닮고 쉴만한 품이 되어주는 듯해. 그리하여 내가 여기 푸른 밤의 선율, '블루노트' 속에 편히 안겨 쉬고 있음이니.


'쇼팽의 블루노트'는 동명의 영화에서 먼저 활용된 제재, 조르주 상드의 말이다. 상드는 쇼팽의 선율을 들을 때 푸른색이 떠오른다고 하였지.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 나는 겨울이 깊어 갈수록 쇼팽을 생각해, 이렇게 심상한 추위가 깊어 갈수록. 푸름 보다 짙고 칠흑보단 희미한, 깊은 밤 북극성이 지나는 하늘의 색, 쇼팽의 블루를.

 

더없이 좋은 위안과 안식의 시간이었다. 다음에도 또 다른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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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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