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 Leçon 6 : 낯선 문장이 내 안으로 들어와 [문화 전반]

프랑스어 과몰입 일상
글 입력 2023.10.2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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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한 지 두 달 반. 그저 아름답다는 이유로 시작한 공부에 이렇게 홀딱 빠지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평일 아침 9시 수업. 출근길 러시아워를 피하기 위해 새벽 6시에 일어나 광화문으로 출발한다. 아이패드와 교재를 품에 안고 새벽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있다 문득 이런 순수한 열정이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 원래 이렇게 열정적인 사람이었지!" 하는 자각과 함께 지난 몇 달간 계속되었던 무기력과 우울은 내가 그런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열정을 품을 수 있는 대상을 찾기 못 했던 것뿐이라고.

 

돈, 시간, 에너지 등 많은 기회비용을 감수하고 왜 프랑스어를 배우냐고 묻는다면 답은 딱 하나뿐이다. 정말 너무너무 재미있다는 것!

 

엄마에게 주 1회 수업을 3회로 늘렸다고 얘기했더니 어쩜 아빠랑 똑같다면서 혀를 찼다. 미국 여행을 다녀온 뒤 스페인어를 배운다고 아빠가 하루 종일 방에 박혀있을 때 엄마는 나이 든 양반이 쓸데없는 공부를 한다고 잔소리를 했다. 나와 동생은 언제나 불타는 아빠의 학구열이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향했다면 우리 집은 벌써 부자가 되었을 거라 진담 섞인 농담을 나눴다. 쓸모없는 배움에 열정적인 건 집안 내력인 건지.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돈도 명예도 화려한 결과물도 아닌 "재미"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미국인 동료와 외국어 학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정작 커리어 성장에 필요한 영어는 뒷전이고 취미인 프랑스어에 열정을 불태우는 것이 길티 플레저라고 자책했고 동료는 낯선 언어를 배우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라고 말해주었다. 실력과 상관없이 영어는 일상에서 흔하게 쓰여 감흥이 떨어지는 반면 면역력이 전혀 없는 새로운 언어는 학습 체감 속도가 영어에 비해 훨씬 빠르고 다이내믹하다.

오늘도 횡단보도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 속에서 Bonne journeé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적힌 티셔츠를 발견했고, 지하철에서 졸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앞사람 에코백에  Les moment avec de lives (책과 함께 하는 순간들) 문구를 읽었다. Bonjour, Merci 밖에 몰랐던 프랑스어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치 외계어를 사용하는 듯 낯설고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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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J와 서래 마을에 다녀왔다. 나는 거리를 걷다 보이는 모든 프랑스어 간판을 죄다 읽어댔고 J는 그럴 때마다 나의 엉성한 발음을 고쳐주었다. "아이가 말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재잘거리는지 알지? 귀찮아질 각오해. 이제 시작이라고!" 호기롭게 말하는 나를 보며 J는 금방 그만둘 줄 알았던 내가 점점 더 프랑스어에 과몰입하는 것을 보고 여전히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외국어를 구사할 때는 모국어와는 다른 영역의 뇌가 사용된다고 한다. 어릴수록 언어 학습이 쉬운 이유는 뇌세포가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가소성"이 나이가 들수록 떨어지기 때문이다. 흔히 말랑한 어린 뇌가 성인이 되면 딱딱해진다고 표현하듯 성인이 되어 외국어를 익히려면 사용하지 않았던 영역의 뇌를 사용하기에 학습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하지만 나이에 상관없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활동은 기존에는 없었던 뇌의 새로운 신경망 구조를 활성화시킨다.

 

낯선 언어를 말하는 혀, 듣는 귀, 보는 눈, 생각하는 뇌. 몸의 모든 기관들이 낯선 언어를 흡수하는 과정을 감각하는 일은 흥미롭다. 매 수업 시간 선생님이 한국어 뜻을 말하면 학생들은 프랑스어 문장을 만들어낸다. 주어, 동사 변형, 여성/남성명사, 관사, 연음. 뇌세포는 풀가동 상태로 문장 퍼즐을 푼다. 첫 시도에 퍼즐을 푸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퍼즐의 위치를 요리조리 옮기다 보면 어느새 아름다운 문장이 완성된다.

 

낯선 문장은 내 것이 된다.

 

프랑스어 공부는 나에게 목적 없는 순수한 놀이고 게임이다. 지겨워지거나 스트레스가 된다면 언제라도 당장이라도 그만둘 수 있다. 그러니 그전까지는 이 낯선 언어가 내게 열어준 새로운 세계를 죄책감 없이 마음껏 유영할 테다. 푸른 바다처럼 넓고 비밀스러운 이 세계를.

 

 

J'ai beaucoup rêvé d'arriver seul dans une ville étrangère, seul et dénué de tout. J'aurais vécu humblement, misérablement même. Avant tout, j'aurais gardé le secret.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섬> 장 그르니에, 김화영 역, 민음사


 

[최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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