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남겨진 것들 - 도서 '숄'

기다랗게 이어지는
글 입력 2023.12.30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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숄은 기다란 천이다. 평상시라면 몸에 둘러 그것의 모양새로부터, 또는 그것의 온기로부터 만족감을 얻는 용도로 활용할 것이다.

 

그러나 책 속의 '숄'은 그보다 더 원초적인 인간의 욕구를, 감각을 보호한다. '생존'의 욕구, 또는 '모성'이라는 감각을 말이다. '숄'의 주인인 '로사'는 잔혹한 학살의 현장 속 그의 아이를 둘렀던 천의 모양을 기억한다. 그것에 점점 배어들었던 아이의 체향을 더듬는다.

 

아이들의 온기를 지켰던 그것은 너덜해졌지만,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플로리다의 한 단칸 방에서 살아 숨 쉰다. 차갑고 딱딱했지만 그 어디보다도 뜨거웠던 모래 지옥의 기억을 껴 안은 채로.


가한 이는 잊는다. 당한 이는 그 상흔을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사회'는 그러한 가해자의 무감각함을 경멸한다. 지금도 활발히 이루어지는 일종의 '정의 구현'들, 또는 '공론화'들은 '피해자'를 '위한' 것이라고 여기어진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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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숄'에 깃든 첫 이야기는, 로사가 두 아이를 건사하기 위해 홀로 사투를 벌였던 수용소에서의 이야기이다. 그때의 '로사'와 '숄'은 그 자체의 기능과 역할을 다 했다. 홀로 설 수 없는 어린 이의 체온을 지키고, 현장에 내어 놓을 수 없는 연약한 이를 숨겼다. 그러나 로사는, 상황이 급박했다는 이유로, 제 역할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것을 잃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상실'의 기억은 '숄'의 몸통에 깊이 남는 상처로 남는다. 허나 잃은 이를 지켰던 것 또한 '숄'이었으므로 그것을 내 버릴 수도 없게 된다.


두 번째 장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바로, 그 첫 번째 상실의 과정 속에서 살아남은 '숄'과 '로사'의 현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찌 됐건, 로사는 숄 덕분에 조카인 스텔라를 지킬 수 있었으며, 본인의 아이를 잠시나마 숨길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를 잃던 그 당시의 트라우마, 살아남고자 발버둥 쳐야 했던 참혹한 현장에서의 감각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숄은 그대로 로사의 품 안에 남는다. 숄을 부둥켜안고 플로리다의 작은방에서 그 흔적을 더듬는 로사의 삶은, 책 속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공허'하다.


*

 

받아본 책은 아주 작았다. 얇고 가벼운 책이었기에 남는 시간에 부담 없이 읽기 좋겠다 싶었다. 읽기 전에 사전 정보를 찾아보는 것이 귀찮아 그저 무심히 표지를 넘겼다. 책을 읽기 전까지의 내게 있어 '숄'은, 눈발이 날리는 창밖 풍경과 장작이 타닥타닥 익어가는 난로의 사이, 거실 소파에 앉은 이들이 어깨에 걸치는 것이었다. 딱, 시간 때우기용으로 책을 열어 본 내가 두르고 있을 법한.


그러나 책 속 '숄'은 책의 물리적인 무게와는 달리 깊고 어두운 흉터와도 같았다. '숄'이 담고 있는 두 개의 이야기는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꺼려질 정도의 깊이이자, 다가가기 두려울 정도의 어두움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책을 읽고 난 나의 감상평을 담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한참을 망설였다. 


가십과 책임, 권리와 의무의 정확히 가운데 서 있는 '대중'의 입장에서 사회를 바라보다 보니 요즘은 느끼는 바가 많다. 과연, 대중으로서의 개인은 접하는 소식의 어디까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인지, '의견'의 게시는 어떤 곳에 어떻게, 어느 정도로 이루어져야 올바른지 고민하게 된다.


확실한 것은, 과거의 일이건 현재의 일이건, 자기가 직접적으로 겪지 않은 일을 짐작하고, 느껴보지 않은 고통이 어땠을지를 가늠하는 행위가 온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일로 인해 상처 받을 수 있는 누군가가 지금 존재한다면 말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이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을 어찌 바라볼지는 개인의 영역에 속해 있기에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을 들쑤시고 드러내어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의 앞에 '전시'하고자 하는 것은 '피해자'-넓은 의미, 즉 피해자와 관계된 모든 영역의 사람들-의 상처를 제멋대로 난도질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하물며, 그 '드러냄'의 과정에서 첨가될 '사견'은 사건의 본질을 흐리기 마련이다. '사견'이 개입될 곳은 '사견을 가진 이'의 '일상'뿐이다. 관계없는 곳의 일에 책임 없는 의견을 일방적으로 얹는 것은 폭력과 다름없다. '홀로코스트'와 같이 분명한 '피해자'가 존재하는 일이라면 더욱이.


'숄'의 두 번째 장에서 로사를 찾아왔던 '박사'. 그가 들쑤시던 로사의 상처. 보는 중에도 화가 났다. 대체 그의 '연구'라는 것에 로사의 트라우마가 자극되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그 '연구'라는 것은 누군가에게든 확실한 도움을 줄 것이다. 전문 지식을 긴 시간, 객관성을 가지고 공부해 온 '박사'의 결과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고통받아야 하는 '피해자'가 존재한다면? 그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에 피해자의 '의사'가 담겨있지 않다면, 과연 옳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대상과 목적, 의도와 효과 등등이 어떻든 간에, '본인'의 긍정적인 의사가 없이 진행되는 '공론화', 또는 '고발', '탐구'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책이 의도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섣불리 판단하지는 않기로 하고.


기다랗게 이어지는, 투쟁의 상흔을 안고 있는 숄이 전부인 이들에 대한 지지를 끝으로 '숄'에 대한 감상평을 마무리한다.



[유서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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